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8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민화의 가치를 잘 알아보지 못하고 외국 사람들이 더 높게 평가한다며 개탄하는 말들을 종종 듣는다. 너무 흔하게 보아 왔던 것이기도 하겠고, 민화라고 한 데 묶기에 너무 다양한 특징들을 보여주기 때문일 수도 있겠고, 완성도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삼고초려도> 19세기말~20세기초, 종이에 채색, 54x38cm, 개인소장
그러나 민화는 그 때문에 언제나 흥미로운 관찰의 대상이다. 무조건적인 재미와 스타일을 좇는 젊은이들에게도 어필할 만한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우환은 2001년 겨울에 파리 기메동양박물관에서 있었던 '한국의 향수'展 도록에서 민화의 특징을 '추상적인 환상(abstract fantasy)'으로 표현했다. 사실을 그대로 묘사하려 하거나 기존의 그림 형식에 맞추어 뜻을 나타내려 하는 대신에, 다양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짜임새를 만들려는 시도 때문에 매력적인 것이라는 뜻일 게다. 민화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형태미는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종류이다.
<신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73.5x36.0cm, 파리기메동양박물관
또, 흥미로운 점은 서구의 모던미술이 3차원의 현실을 회화 평면에 재현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평면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특이한 모습으로 입체감과 평면감을 공존시켜버리는 면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8x29.2cm, 홍익대학교 박물관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채색, 74.0x41.1cm, 선문대학교 박물관
궁중회화가 교화를 목표로 하고 사대부회화가 아취를 추구한다면, 서민회화인 민화는 희로애락의 감성을 거침없이 풀어낸다. 궁중회화가 규범적이고 사대부회화가 이념적이라면 민화는 감성적이다. 걸쭉한 농담의 탈춤과 판소리, 국문소설의 느낌과도 상통한다. 해학은 서민문화의 중요한 특징일 수밖에 없다.
<봉황> 19세기, 종이에 채색, 91.5x38.5cm, 삼성미술관리움
민화의 특징 중 하나를 자유로움으로 보았을 때, 규범으로부터의 자유를 잘 보여주는 것이 책거리 그림이다. 조선후기에는 어좌 뒤에 오봉병이나 십장생도 병풍을 설치하는 것이 관례인데, 정조는 이들 그림 대신 책거리를 보란 듯이 내세웠다. 학문의 중요성을 신하들에게 일깨워주는 프로파갠더로써. 저자는 정조가 책거리를 구상했다는 사실에서 비롯하여 책거리 그림을 김홍도를 통해 구현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형록 <책가문방도 8폭병풍> 19세기, 종이에 채색, 139.5 x 421.2cm
책거리의 챕터 속에는 책거리와 책가도의 차이, 책가에 놓여 있는 물품들의 변화, 이형록과 이응록 등 작가 이야기, 에로틱한 내용이 숨어있는 책거리 그림 등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책거리> 19세기, 종이에 채색, 63.5x34.5cm, 파리 기메동양박물관
문자를 그림으로 표현한 문자도는 백수백복도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중 유교적 덕목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를 써 놓은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수험생이 책상머리에 '4당5락'을 써 놓는 것이나 할머니가 부엌에 물 수水자를 거꾸로 써서 붙여 놓는 것이나 바라는 것을 벽에 거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나 유교 덕목을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니, 그림 안에 담긴 여러 교훈적인 이야기들이 지금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운 스토리텔링감이 된다.
<문자도> 18세기, 종이에 채색, 74.2x42.2cm, 삼성미술관 리움
까치호랑이는 너무나 많은 디자인에 적용되면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민화적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동물의 왕인(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호랑이는 분명 공포의 대상이지만, 산신의 화신으로 변화되면서 경외의 대상화가 되기도 한다. 한 산신도에는 산신의 몸 속에서 호랑이가 나오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였다. 저자는 민화 까치호랑이가 중국 원나라와 명나라에 유행하던 호랑이 그림에서 연유한 것이 사실임을 담담히 인정하며, 민화 호랑이에는 그에 더하여 우리의 정서와 감정 이야기가 담긴 것임도 단언하고 있다.
<산신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102.7x70.8cm, 도쿄 일본민예관
<자연호도子連虎圖> 명(明) 16세기, 비단에 채색, 159.0x98.5cm, 도쿄 도카이안, 도쿄 국립박물관 위탁보관
저자는 민화에 간결에서 화려함까지 여러 특징들이 폭넓게 펼쳐져 있고, 콤팩트한 조형세계가 근본적으로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적인 취향에 부합하는 면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대학의 문화재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저자는 민화가 가진 현대성과 한국적인 미의 가치를 믿고 이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이의 증명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발품을 아끼지 않았다.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라는 시리즈 제목을 가진 이 첫 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민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 다음 시리즈도 이른 시일 내에 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