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교양총서 5.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 글항아리 | 2011.7
지금은 제주도보다도 더 편하고 싸게 외국에 갈 수 있는 시대이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직접 외국의 문물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의 외국 여행은 소수의 특권이었다. 교통수단의 급속한 발달 이전,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사람들에게 외국 여행이란 지금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우주여행’ 정도의 귀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연구교수들이 집필한 글의 모음으로 고려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기에 다른 나라를 여행한 기록을 통해 그 시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타국으로 떠났던 사람들의 느낌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 외국에 간다는 것은 연행사나 조선통신사처럼 공적인 기회이거나, 몇몇 상인, 팔려간 사람들, 전쟁이나 표류 등의 어쩔 수 없는 이유 등 특별한 경우이다. 특별한 경우인 만큼 그들이 남긴 기록에는 그들이 만난 놀라운 장면들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모사도)
옛사람들이 제한된 정보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기록으로 남겼던 외국 지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해동제국기)에서 바깥 세상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며, 흥미진진한 중국어 학습서 노걸대를 통해 당시의 상인들의 삶을 눈앞에 펼칠 수 있다. 여운형이 만주 벌판에서 침낭에 의지하여 잠을 청하며 본 하늘의 별 등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동감이 대단하다.
여운형 일행이 여행중 촬영한 사진. 극동노동자회의 의장단의
김규식(왼쪽 첫 번째)과 여운형(서 있는 이)으로 1922년 1월의 모습이다.
그중 최부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로운데, 그의 드라마틱한 표류기는 약간의 각색을 통하면 그야말로 드라마로 제작될 만한 다이나믹한 컨텐츠이다(요즘 분위기로 봐서는 어디선가 준비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15세기 이후 자유무역이 허용되지 않아, 육로로 북경을 왕래했을 뿐 황해를 통해 강남을 왕래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제로 강남을 둘러본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표류가 아니고서는 갈 수 없었던 땅이었던 것이다. 표류할 때의 일촉즉발의 상황, 강남의 대운하를 따라 6개월 동안 항주에서 북경까지 새로운 문물을 겪은 경험들... 인텔리였던 그는 장강 이남과 이북을 대비시켜 자세히 기록, 강남사회의 특수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최부의 관찰범위는 물산, 산업, 화폐, 주택, 음식, 복식, 풍속, 산천, 교통, 무기 등 중국 문화 전반에 두루 미쳤다고 한다.
최부의 여정
“사당에 참배하고 이내 어머님께 가서 작별을 고했다. 어머님께서는 눈물을 머금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신다. 나 역시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어 슬픔을 억제하기 어렵다. 아이들을 돌아보니, 큰아이는 미리 한강가로 나갔고, 다른 아이들은 피해 숨어서 슬피 우느라 불러도 와서 보지 않는다. 어머님의 마음을 위로해드리며 눈물을 머금고 다녀오겠노라 고하고 문 밖으로 나서니 현과 순 두 아이는 내 옷자락을 붙잡고 슬피 울고, 아내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운다. 옷을 뿌리치고 말 위에 올라 길을 떠났다.”
위는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의 가족과의 이별 장면이다. 새로운 문물을 만나는 것에 대한 벅찬 기대도 있었겠지만, 위험한 뱃길, 고단한 통신사행에 객사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착잡한 심정이 더하였을 것이다.
「근강명소도회 조선빙사」, 작자미상, 1811, 전우홍 소장.
조선의 정사선(正使船)이 돛을 펴고 항해하는 모습이다.
정사가 탄 배임을 표시하는 ‘正’자가 나부끼고 있으며,
사행단과 선원들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통신사는 매우 중요해서,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국내 정치적 입지를 굳히려했던 정치세력들에게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접대 경비에 있어서도 일본 경제 규모에 비해 과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통신사 또는 ‘회답겸쇄환사’의 이름으로 일본에 간 외교사절단은 총 12차례인데, 일본 내 조선의 통신사가 남긴 흔적은 매우 컸다.
일본측에서는 통신사행이 통과하는 길가는 늘 정비하려고 애썼던 듯한데, 1711년 8차 도시법령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보기 흉한 물건은 모두 들여놓을 것... 조선인이 통과하는 거리는 특히 깨끗이 청소할 것... 화려한 빛깔의 비단 천막이나 금은 병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써도 됨...조선인이 통과하는 연로변의 다리에서 보이는 건너편 강가에 땔감, 나무 등을 쌓아둘 경우 가지런히 정리해둘 것...”
오늘날 우리가 일본에 갔을 때 받는 청결한 인상을 조선통신사들도 받았을 것이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은데 그중 대마도인들이 조선인 선호 음식 목록을 남긴 것을 보면 “소, 돼지, 사슴, 닭, 오리... 대체로 생선류를 좋아함... 해조류, 건어물,.. 수분이 많은 과일.. 국수, 떡, 사탕,.. 대체로 술 종류는 모두 좋아함(!)” 등이 씌어져 있어 실소를 자아낸다.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 속에는 그들에 대한 우월감과 함께 점차 개방적 문화에 대한 놀라움이나 그들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앞서나가는 데 대한 착잡함이 교차하고 있다.
여행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꼭지는 공녀(貢女), 즉 조공으로 바쳐져 끌려간 여성들의 예이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원, 명, 청의 요구로 대륙에 끌려간 여성들의 수는 2000명 이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공식적으로는 회당 1명에서 50명, 80년간 44차례에 걸쳐 총 170명 이상이 보내졌다고 한다. 중국이 요구하는 여자들은 처녀(궁녀나 황실가족의 처첩이 될), 여종, 집찬녀(반찬을 만드는 여자), 가무녀 등이었다.
『세종실록』 권25,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공녀로 뽑혀갈 처녀를 숨겨놓는 집안에 대해 처벌을 내릴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공녀를 사냥하기 위해 조선 전체는 벌집처럼 쑤셔졌다. 압록강을 건너 공녀를 구하는 사신이 도착하면 공녀들을 선발할 임시기구를 설치하고, 각 도에 할당량을 배정했다. 뽑힌 공녀 후보들은 중국에서 온 사신에게 심사받다가 미색이 없다고(!) 분노를 사 전국적으로 다시 뽑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물론 갖가지 핑계를 대고 몸에 이상이 있는 척하고 일찍 혼인을 시키는 등의 편법을 통해 딸을 지키려는 부모들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또 그에 따라 보다 강력한 법으로 처녀들을 색출했다. 이로 인해 파직되거나 귀양가는 부모도 있었고, 서로 밀고하다가 살인사건으로 번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선발된 공녀 특히 황제의 후궁이 될 처녀들은 서울을 출발, 개성, 평양, 안주,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고, 요동을 지나 두 달간이 여행 끝에 북경에 이르게 된다. 태종8년(1408)에 선발된 다섯 명의 처녀들은 모두 명나라 황제인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이중 권씨는 뛰어난 미모와 퉁소 솜씨로 총애를 받고 현인비에 봉해졌다. 이후 권씨가 독살되고, 조선에서 함께 간 공녀의 소행으로 몰아 끔찍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락제의 또 다른 후궁이었던 한씨는 영락제가 죽자 순장되었고,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동생 한씨도 다시 선덕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두 여동생을 황제의 후궁으로 보낸 한확은 누이들의 희생으로 우의정, 좌의정 등의 관직을 얻고 딸들을 왕자와 혼인시키는 등 큰 권력을 얻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공녀 대부분은 이역만리 타국의 궁궐에 유폐되어 산송장처럼 살다 생을 마감하거나 성 노리개로 전락하였다. 타의로 나라를 떠나 이용되고 버림받은 이들의 삶에서 타국으로의 여행은 불행을 의미할 뿐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에게 북경 여행은 그들이 들여온 서양지식과 과학기술을 흡수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가 북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작은아버지 홍억의 자제군관으로서인데, 정사나 부사 등의 사절단 일행이 데려갈 수 있는 몇몇의 자제군관들은 특별히 맡은 임무가 없어 자유롭게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에만 힘쓰는 학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집안에서 그의 학문적 재능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는 결국 후에 학문적 명망을 인정받아 나중에 세손(훗날의 정조)을 보필하는 자리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일하제금합집』에 실린 홍대용 일행의 초상화.
위 왼쪽부터 부사의 군관, 상방 비장, 서장관, 부사, 정사의 모습.
구한말에 이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게 된다. 몇 십 년 전이었다면 아라사 사람을 외계인처럼 여겼던 조선인들이 1896년에는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초대받아 러시아로 공사를 파견하게 된다. 조선은 당시 아관파천(1896.2~1897.2) 시기였으므로 러시아와의 협력을 위해 특별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고종의 신임을 받던 민영환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멀리 러시아로 먼 길을 떠나보냈던 것이다.
민영환, 55×40cm, 1896, 고려대박물관.
민영환 일행은 4월 2일 인천을 떠나 4일 상하이에 도착했으나 홍콩을 경유하는 프랑스공사선을 놓치는 바람에 반대쪽 항로로 러시아에 가게 되어 뜻하지 않은 세계일주를 경험한다. 상하이를 떠나 일본의 나가사키, 고베, 요코하마, 도쿄를 거치게 되며 그곳의 풍광과 문물을 글에 담았다. 4월 17일 일본을 떠나 망망대해 태평양을 지나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한 것은 4월 29일. 기차를 타고 몬트리올을 지나 대도시 뉴욕을 보고 그 충격을 표현하기도 했다. 다시 5월 9일 미국을 떠나 대서양을 횡단, 16일에 리버풀에 도착하고, 이후로 네덜란드, 베를린, 바르샤바를 거쳐 러시아로 들어가게 된다. 사절단 중 중국어 역관이었던 김득련이 기록한 사행록과 느낀 점을 한시로 쓴 작품집이 남아 있고, 영어가 가능했던 윤치호가 남긴 지극히 사적인 감상까지 담은 영문일기에도 여정이 자세히 담겨 있다.
1896년 5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촬영한 조선의 러시아 사절단.
민영환 일행과 러시아 관원들의 모습인데,
앞줄 왼쪽 세 사람이 김득련, 윤치호, 민영환이다.
이밖에도 한성순보에 전해졌던 외국의 소식, 그 시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누렸던 화가 나혜석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 나혜석 부부의 모습. 1927년 6월 19일 촬영.
여행에 대한 기록들은 늘 흥미롭지만 이처럼 다양한 감상을 가져다주긴 어려워 보인다. 모든 것이 변하고 새로운 것들이 속속 등장하던 시기, 상상하지 못하던 세계를 본 이들이 마치 본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생생히 기록한 분들의 기록들을 보다보니, 그 때 보고 느꼈던 것을 토대로 보다 큰 통찰로 시대를 이끌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잡아야 할 것을 잡지 못하고 깨야 할 것을 깨지 못한 그 때가 더욱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