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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이충렬 지음 ㅣ 김영사 펴냄 ㅣ 2011년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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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란’ 하고 정색을 하고 물으면 대개 누구나 움찔하게 된다. 특히 현대미술의 개념적인 작업이나 추상 미술이란 말이 언급된 뒤라면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 개인의 주관적 생각이나 사고 그리고 감정이 작품의 많은 내용을 좌우하는 현대 미술의 경우에 그렇고 한 발자국을 뒤로 물러나 약간 과거의 그림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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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버트 보스 《민상호 초상》 캔버스에 유채 76.5x61cm 1898~1899년 이 그림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인종과 사회관’에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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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나 솜씨, 기법을 떠나, 그림을 보는 사람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내용, 즉 사실을 말해주는(전달해주는) 내용이 대개 어느 그림에나 담겨 있기 마련이다. 최근의 미술사에서는 이 점에 주목해 이를 회화의 미디어적 성격이라고 부르고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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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버트 보스 《서울 풍경》캔버스에 유채 31x8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현재의 미국대사관저의 언덕에서 경복궁, 당주동, 신문로 일대를 보고 그린 것이다. | |
이 책은 바로 어느 한 시대에 그려진 그림 속에 담겨있는 ‘사실 전달적’ 성격에 초점을 맞춰서 그림을 소개하고자 한 책이다. 대상은 한국의 근대, 1898년에서 1958년까지로 이 시기에 그려진 국내외 작가 작품 86점을 통해 그림이 알게 모르게 말해주는 ‘시대적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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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풍경》의 부분. 빈공터는 현재 덕수초등학교 부근이라 한다. | |
등장하는 작가를 보면 고종의 어진을 그린 휴버트 보스에서 엘리자베스 키스, 릴리언 밀러, 폴 자쿨레 등 외국 작가 외에 이갑향, 정종여, 구본웅 등의 국내작가 작품도 들어있다. 예로 휴버트 보스를 보자. 그는 1898년에 한양에 와서 《서울 풍경》《고종 어진》《민상호 초상》등을 유화로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필자는 보스가 남긴 그림들이 당시의 어떤 사실이 인연이 되어 그림을 그리게 됐고 또 그가 그린 그림에는 어떤 사실을 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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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민씨가의 규수》동판 37x24cm 이 조선소녀는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찬의 딸로 순종의 여동생 덕혜옹주와 유치원, 소학교 를 함께 다녔다고 한다. (키스는 1919년부터 1940년까지 여러 차례 조선을 방문해 수채화, 판화 등 약 66점의 작품을 남겼다) | |
1898년 한양에 온 보스는 당시 신혼 여행 중이었다. 신부는 하와이 왕조의 마지막 공주 카이킬라니였다고 한다. 그는 신혼여행겸 스케치 여행을 하던 중에 한양을 들른 것인데 서울에서는 미국공사 앨런의 배려로 공관 건물의 1등 서기관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 집이 마침 정동에 있어 《서울 풍경》이 가능했고 그림 속에 보는 총든 병사의 모습은 당시 정동 일대에 있는 외국공관을 보호하기 위한 경비병이라는 사실을 ‘독립신문’ 기사를 통해 입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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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언 밀러 《마하연, 금강산》다색목판 26x38cm 1928년 송영달 소장 (밀러는 서울주재 영사였던 부친을 따라 1920~1932년 동안 한국을 오가며 약 40점을 작품을 남겼다) | |
보스는 미국에 있을 때 유명인사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친교를 맺었는데 그 중 광산업자 헌트(S.J. Hunt)도 있었다. 헌트는 보스에게 정동 숙소를 내준 앨런과 관계가 있었다. 선교사로 조선에 온 앨런은 갑신정변에 부상당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준 인연으로 어의가 되었고 이후 평안북도에 있는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하사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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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자쿨레《도공》다색목판 39.3x30.0cm 1940년 개인소장 (경성제대 의대교수인 일본인과 결혼한 모친을 만나러 한국을 드나들며 작업, 그가 남긴 162점의 전작 판화는 양녀 나성순에 의해 2006년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 |
그는 이 금광을 채굴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헌트에게 출자(出資)를 받았다. 그리고 그같은 헌트의 지인 보스가 조선에 온다고 하니 자신의 공관에 묵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 보스는 이렇게 알게 된 앨런의 인맥을 통해 민상호의 초상을 그리게 되었고 또 민상호의 초상을 본 고종에 의해 어명으로 어진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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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세일러 《빈틈없는 계산》다색동판 21x29cm 1957년 개인소장 (독일 출신의 미국화가로 제2차대전 종전부터 20년간 일본에 거주하면 50년대 후반 3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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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림속의 담겨 있는 사실하고, 그림을 둘러싼 사실하고 뒤섞인 것이 되는데 실제로 이 책은 두 가지가 뒤섞여 있다. 미술사에서 말하는 그림의 미디어적 성격에 입각한 사례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처음부터 그림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와 달리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해 그림을 가져다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필자가 서문에 밝힌 듯이 격랑의 근대사를 자유롭게 바라보고 생각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림을 택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근대에 제작된 그림 속에는 ‘시대를 말해주는 사실’이 담겨있다는 ‘새로운 그림읽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일독가(一讀可)’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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