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사는 나무들 강판권 지음 | 효형출판 | 2011.4 |
옛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고 감상하는 것에서 그 의미을 중요시 여기고 그 작업 자체를 공부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림 속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그 뜻을 가지고 존재하게 된다. 옛 그림 속 나무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느 자리에 그려져 있었는지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나무는 산수화에서 그저 배경을 풍성하게 해 주기 위해 거기 서 있던 것만은 아니었구나.
傳이상좌,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옛 그림 속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초, 모란, 살구, 해당화, 파초, 버드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풀들이 등장한다. 중국 청대농업사를 전공한 저자의 입장에서, 동양화 속의 나무와 풀들은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드러내는 인문학적인 캐릭터이기도 하고, 인간과 친했고 인간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던 생물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옛 그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식물에 대한 저자의 단상을 하나씩 풀어나간 개인적인 글의 모음이다.
저자는 “소나무 그림 한 점을 갖는 게 꿈”이라면서 “언젠가 그런 그림이 나타나면 돈을 따지지 않고 바로 살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림을 가진다면 평생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허건, <송하탄금(松下歎琴)>
소나무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나무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림 속 나무까지, 아니 나무가 있는 그림까지 사랑하게 된 저자는 모든 세상을 나무를 통해서 보고 이해한다. 누군들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틀이 없으랴만은 그 틀이 바로 ‘나무’라는 존재라는 것은 낯선 만큼 참신하게 느껴졌다. 나무에 주목해서 그림을 보는 경험 또한 신선하다.
나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저자가 산수화에 관심을 품은 것은 청나라 때의 화보《개자원화전》의 <수보(樹譜)>를 접한 이후라고 한다. 청대 강남 지역의 농업사를 전공한 저자는 난징에서 편찬된 《개자원화전》의 탄생지 '개자원'을 쉽게 찾아갈 수 있었고, 뒤이어 소상 팔경이나 적벽 등 그림의 실제 배경을 찾아다닌 발품으로 동양화를 좀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듯하다.
무원직, <적벽도>
그림은 어차피 주관적으로 보게 마련이긴 하지만, 다소 주관적인 서술과 시적 표현이 많은 것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쉬웠다. <매하횡금도축>이라는 그림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처럼 서술한다.
“가지가 적으면서 하늘 높이 줄기가 뻗어 있다. 마치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매화의 자태는 선비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주인공인 선비는 매화를 보면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그저 매화를 완상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매화와 한 몸이 되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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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 <매하횡금도축>
이렇게 비유적이고 감상적인 표현들이 많아 동감하면서 읽어가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나뭇가지에 달린 건포도는 마치 어린아이가 늙은 어미를 추위에서 보호하는 것처럼 애처롭다(?)”
“만약 터지지 않은 석류를 따서 던지면 어떻게 될까. 석류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석류 알이 파편처럼 날아가 사람들 가슴에 박힐 것이다(?)”
“버들이 오물을 정화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도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이리라(?)”
“대나무처럼 생명체는 바람에 흔들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존재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생명체가 바람에 흔들려야 하는 것은...흔들리지 않으면 뿌리가 뽑힐 수 있기 때문이고(?)...바람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과 같은 말들이다. 저자의 연륜과 감성을 따라가지 못한 나의 탓이라 생각해 보면서, 한편으론 인문학자의 눈으로 본 산수화 글 말고 식물학자, 지질학자의 눈으로 산수화를 본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도 궁금해졌다. 나무 뿐 아니라 다른 대상들, 예를 들면 초충도와 곤충학자의 조합도 재미있을 듯하다.
우리 삶에서 나무가 차지하는 자리는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200년 전이라면 나무에 둘러싸인 곳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동네마다 커다란 그늘을 드리워주던 버드나무는 길을 넓히거나 벚꽃길을 만드느라고, 또는 다른 이유들로 사라져갔다.
정선, <인곡유거>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반지의 제왕”에는 숲 속 나무들이 자신들을 마구 대한 종족에게 화가 나 결국 물을 다스려 그들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에서처럼 나무는 스스로 움직여 우리에게 복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와 숲과 멀어지고 그들의 중요성을 잊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결국은 나락으로 빠지게 될 것을 톨킨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나무에 짙푸른 잎들이 가득한 계절이 왔다. 이런 계절이면 우리 주위의 나무 중 어떤 것이 벚나무였고 어떤 것이 목련이었는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봄에만 잠깐 계절의 주인공이 될 뿐, 잎과 열매, 나무줄기의 모양은 기억되지 못한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거나 열매에 별다른 쓰임이 없는 경우 더욱 그렇다. 목련에 감나무잎처럼 두터운 잎이 있고 붉은 열매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려면 이른 봄 꽃을 피워 우리의 눈을 호사하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를 일 년 내내 가까이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게 최소한 친구에 대한 예의 같다.
조석진의 목련과 그 제자인 청전 이상범의 목련
올 여름, 벽오동나무 그늘 아래 발을 담근 처녀를 그린 화가에게, 벽오동나무에게, 벽오동 나무 그늘 아래로 불어와 주는 바람에게 감사하며 더위를 잊어봐야겠다.
심주, <동음관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