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의 오사카에서는 한국도자기의 해외 聖地격인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의 탄생120주년을 기념해「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 다쿠미 형제의 마음과 눈」이란 제목의 전시가 4월9일부터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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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쪽에서는 이름이 생소한 언론학자 김정기 박사가 쓴 이 책은 이들-다쿠미와 그의 형 노리다카, 또 노리다카의 안내로 한국 도자기에 눈을 뜬 야나기 무네요시-에 더해 이들과 무관하지 않은 미국인 그레고리 헨더슨을 다룬 이야기이다. 주한미대사관의 문정관(재임 1958~1963년)이란 직함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헨더슨(한국명 韓大善)은 1950년대 교토문화원장 시절 해방후 귀국해 있던 노리다카와 교유하며 조선 도자기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는 점에서 이들 모두는 사실상 ‘한국도자기의 美’라는 미적 가치를 공유한 정신적 동아리멤버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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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면취초화문 표형병(靑華白磁面取草花文瓢型甁) 높이 13.5cm 1914년9월 노리다카가 야나기에게 선물로 가지고 간 병으로 이 병을 계 기로 야나기는 조선의 백자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됐다. | |
이 책은 미술사의 문외한이라고 해서, 단순히 이들이 어느 우연한 계기에 한국 도자기에서 새로운 미를 발견했다는 얘기, 즉 미술사에서는 방계쯤으로 치부하는, ‘재미난’ 컬렉션 일화를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방외인사가 미술사에서 제대로 논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날카로운 식견을 보이며 소위 본류에 대해 ‘어퍼컷’을 날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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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철회 포도율서문 항아호(靑華白磁鐵繪葡萄栗鼠文壺) 17세기후반 높이 35.7cm 일본민예관 소장 | |
야나기와 헨더슨이 한국 미술에 끼친 공적이나 영향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들이 당시 처해있었던, 그리고 누렸다고도 말하는 사회적 지위와 시대적 환경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약간의 지렛대만 들이대도 이들은 맨얼굴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일그러진 초상으로 바이어스된다. 이 책에는 그렇게 삐뚤게 보고자 시각을 바로 잡아줄 ‘교정용’ 자료를 풍부하게 들이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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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노리다카가 그린 《조선도자사생도》42.0x57.5cm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 | |
야나기에 대한 비판은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해군소장의 아들로 태어나 귀족적 교육을 받으며 서양철학에 몰두, 한국 도자기와 공예품에서는 ‘비애의 미’를 발견해 결과적으로 한국을 천시하려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 일조를 한 이론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헨더슨의 경우는 그런 류에 개인적으로 감당해야할 도덕적 비난이 더 얹혀 있다.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문화재를 빼돌렸다는 것이고 또 이 물건들은 ‘아첨’을 위해 그의 집에서 늘어선 한국인들이 선물(또는 뇌물)로 준 것이라는 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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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호작문 항아리(辰砂虎雀文壺) 18세기 높이 28.7cm 일본민예관 소장 | |
이 책에서는 야나기에 대한 비판을 두 가지로 분리해 정리하고 있다. 하나는 앞서 ‘미애의 미’에 자극된 훗날 한국 문인, 학자들이 보인 비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본 내에서의 비판이다. 일본 내에서의 비판은 국내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인데 여기에는 민예운동 당시 일본에서 새롭게 태동하던 감상도자기의 애호가들이 만든 채호회(彩壺?) 입장이 보인 한국 미술의 폄하와 야나기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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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면취북두칠성문병(靑華白磁面取北斗七星文甁) 높이 30.5cm 일본민예관 소장 | |
채호회는 1925년 무렵 생겨난 도자기 동호인회로 이들은 찻그릇이라는 실용을 떠나 중국도자기의 미적 가치에 주목해 이른바 일본에 감상(鑑賞) 도자기붐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따라서 미적 가치 그 자체가 아닌 실용의 미, 공예의 미를 주장하는 야나기는 배척의 대상이고 딛고 지나가야할 상대가 된 것이다. 채호회 멤버는 과거의 인물로 오쿠다 세이지(奧田誠一) 아오야마 지로(靑山二郞)가 있고 그리고 요즘 현역으로 참가한 이데카와 나오키(出川直樹)가 있는데 이 책에서는 야나기가 후기에 제시한 ‘의지의 미’ ‘공고의 미’ 등으로 이들의 논리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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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철회 수문 통(白磁鐵繪樹文筒) 18-19세기 높이 12.7cm 일본민예관소장 | |
헨더슨에 대해 필자는 정치학자로서 주한미대사관 문정관 헨더슨을 다루는 과정에서 문화재 강탈자로 부당하게 낙인찍힌 것을 보고 연구를 시작한 듯하다. 그는 이미 2008년에 『국회프락치 사건의 재발견ⅠⅡ』를 펴낸 바 있는데 당시 연구 과정에서 컬렉터로서의 헨더슨의 맨얼굴을 만나면서 세간의 오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알게 됐다.
문화재 불법유출건은 1974년에 언론에 대대적으로 폭로됐는데 그즈음의 사건을 순서대로 기억해보면 4월3일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됐고 5월28일 뉴욕타임즈지에 헨더슨은 하버드 대학의 코언 교수와 함께 소위 프레이저 청문회로 기억되는 인권청문회 개최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어서 6월18일에 한 원로사학자가 등장해 불법 유출한 헨더슨은 컬렉션을 반환하라는 요구서를 낭독하자 이 내용이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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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터슨 컬레션으로 국내에 소개된 토기와 상감청자운학문 주전자 | |
이 책은 정치학자이자 언론학자의 시선으로 한국 도자기에 내재하는 미적 또는 미학적 문제를 둘러싼 비판과 응수를 다루고 있어 읽기에 따라서는 약간 성글다는 느낌이 들 때가 없지 않다 .하지만 국외자의 편견 없는 시선은 미술사에서 간과한 부분에 대한 강한 조명을 비추고 있어 새겨볼만하다. 헨더슨 자신이 가진 한국도자기에 관한 이론을 정리한 부분은 여기에 해당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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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 진사 연화문항아리(靑華白磁辰砂蓮花文壺) 18세기 높이 44.6cm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아사카와 다쿠미형제展 소개) | |
헨더슨은 한국도자기의 특징으로 ‘무게감(weight)’이나 ‘투박함(roughness)'을 꼽으면서 이는 도식화된 기법이나 공식이 전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데(the general lack of formulae and formality) 기인한다며 그 특질의 연원을 한국사회의 내재적 구조에서 찾았다.
즉 한국사회는 마을과 왕권 사이에 여하한 ‘중간매개 기구(intermediaries)가 없는 것이 특징인데 여기서 한국 도자기의 자유로움이 창조됐다는 것이다. 길지만 마지막으로 인용해보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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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진사연화문면취병(白磁辰砂蓮花文面取甁) 18세기 높이 36.3cm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소장 (아사카와 다쿠미 형제展 소개) | |
‘이 사회에는 성채 도시나 부르주아 또는 상인 단체가 결여되어 있고, 마을에는 왕권에 이르는 ’어떠한 단계적인 충성의 서열(any stepped hierachy of allegiances)'도 없었다. 그래서 의식과 정형화된 규칙은 어느 정도 엄격한 반면, 그 규칙은 사회 전반에 침투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 통제가 약화되었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할 기구가 없었던 것이다. 상하 계층간의 통제와 대화가 단절되었으며, 이는 사회적으로 천시된 도공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한국의 도공은 유럽이나 중국과 일본의 경우보다 더 자유로웠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의 도공은 스스로 해결책을 찾으려 했으며, 창조의 순간 취향과 문양에서 ‘자유의지(spontaneity)를 성취했던 것이다’(책에서 재인용)
*헨더슨 컬렉션은 그의 사후 부인을 통해 하버드대학 아더 새클러미술관에 기증되었고 그가 아사카와 노리다카에게서 구입했던 한국도자기 파편은 LA카운티 뮤지엄에 기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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