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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 깨진 청자를 품다] - 알고보면 초기청자는 죽고사는 전장터에서 만들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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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깨진 청자를 품다
- 청자 가마터 기행
이기영 지음 ㅣ 효형 출판 ㅣ 2011년 02월

 

황산벌이라는 영화를 봤다며 대뜸 ‘그랑께 거시기’로 시작하는 전라도 신문에 있다면 하고 상상력을 내지르는 사람이 쓴 특이한 기행문이다. 남들이 생각지 않는 가마터를 돌아다녔다고 독특한 게 아니다. 가마터를 돌아다닌 이유가 색다르다. ‘그 많던 청자는 누가 다 만들었나’에서 누구=사기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청자공장 주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그 궁금증을 더욱 부풀려 ‘그 청자공장 공장장이 만든 청자는 누가 샀는가. 값은 얼마나 했나. 또 국보, 보물처럼 생각하는 청자 그릇엔 무얼 담아 먹었는가. 밥인가 죽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젓갈인가’ 하는 정말 쌩뚱맞고 즐거운 문제에 대해 아무도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으니 자신이 직접 나서서 현장밀착형 사고를 해보자는 게 집필 동기이다.

책에 소개된 가마터의 위치


그가 발로 답사한 청자 가마터는 22곳. 이들은 전라남도 해안지방, 영암과 고창 등지의 내륙 그리고 충청도 서산과 경기도 용인, 인천 등에 분포해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초기청자를 굽던 가마터이다.

해남 화원면 신덕리 가마터에서 찾은 청자조각. 신덕리는 장보고의 청해진에서 지척이다.

초기 청자는 신라 말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이 고려가 되고 성종 무렵이 되면, 이른바 중앙집권제가 확립되면서 모두 관영 공장으로 바뀐다. 저자가 찾아다닌 가마터는 공기업 청자공장이 등장하기 이전에 각 지방의 호족들이 운영하던 청자 가마터들이다.

해남 화원면 신덕리 가마터에서 찾은 해무리굽 청자 파편

초기에 만들어진 청자는 고급품이자 사치품이었다. 도자학계에서는 추론의 영역이라며 손을 대지 않지만 저자는 과감하게 이들 초기청자는 지방 호족들이 공장주였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사실을 고려사나 역사관련 논문 등에서 뽑아낸 사실을 날줄로 삼고 자신이 직접 돌아본 가마터를 씨줄로 삼아 엮어내고 있다.

강진 용운리 청자 조각. 유약색이 맑아 완성품이라면 질이 높았을 것이다.

가마터 기행의 첫 코스는 해남 화원면 신덕리다. 신덕리는 신라말 해상왕 장보고가 활동하던 청해진의 바로 지척에 있는 곳이다. 이곳 가마터에서 나오는 청자 파편에는 해무리굽 청자가 다수 보인다. 받침의 굽이 마치 동그란 해무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이 청자의 제조기법은 그 원산지가 중국의 월주요이다.

장흥군 용산면 풍길리의 청자 파편. 햇무리굽보다 폭이 조금 좁은 편이다.

중국에서 성공한 사업가이자 야심가였던 장보고가 해상왕국 청해진을 건설하고 착수한 것이 청자였다고 한다. 장보고는 사업적 감각을 발휘해 중국의 청자 기술자를 데려와 해무리굽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846년 장보고가 암살당하고 청해진이 무인지경이 되자 중국 장인 일부와 이들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국내 사기장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초기청자 가마터가 해안지방에, 내륙 지방에 분포하게 됐다는 것이다.

신덕리 가마터에 이어 완도 장좌리, 장흥 회진리, 강진 용운리, 고흥 운대리 등의 남해안과 영암, 고창 등지의 가마터에서 실제 유사성을 확인하고 있다. 특히 저자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바닷가로 산속으로 흩어진 이들을 다시 모아 청자를 굽게 한 사람은 당시 지방 호족들인데 이들은 청자의 경제력으로 후백제의 중심 세력이 되었고 견훤이 실패하자 왕건의 좌우가 되어 고려 초기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보았다.

가마속에 그릇을 재이는 방법을 그린 얼개도.
갑발 속에는 그릇을 하나 넣기도 했고 둘씩 넣기도 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그는 대담하게 서산 청자공장의 사장은 박술희라고 단언하고 있다. 서산의 지방호족인 박술희는 왕건이 군사를 일으킬 때 옆에서 그를 도운 공신이다. 그는 제2대 혜종을 옹립할 때에도 용인 출신의 장군 왕규와 힘을 합했다. 저자는 여기서 나아가 왕규의 거점인 용인 서리 가마터에서 나온 사금파리와 박술희의 서산 가마에서 나온 것이 유사한 점을 들어 박술희가 왕규의 용인 서리(西里) 가마에 기술적 자문을 해주었을 것이라고도 추정하고 있다.

용인 서리가마터의 갑발 더미

저자의 이런 추론은 경기도 원당 가마터가 되면 더욱 재미있는 얘기를 이끌어낸다. 그는 원당(원흥동이라고도 한다) 가마는 당시 고양 일대의 호족인 은씨 집안이 경영했다고 본다. 이 원당 가마에서 발견되는 청자 기와파편은 바로 당시 신흥도시 개성에서 일어난 주택개발붐에 편승해 틈새 시장을 노린 사업이라고는 것이다.

인천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는 현재 골프장 한가운데 옹색하게 있다.
아예 ‘녹청자 컨트리클럽’이라 했으며 역사도, 특색도 살렸을 거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도자사를 전공한 연구자라면 결정적 근거가 없는 추론에 대해서는 함구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는 방외인사에 해당한다. 원래 프랑스에서 동구권 경제발전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참 그쪽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도자엑스포 자문을 하다 신이 내린 듯 무엇에 꽂혀 도자기를 굽게 됐다고 한다. 가마터 순례는 일종의 직업 공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글속에 그런 티는 거의 없다. 가마터 얘기 약간에 신변잡사, 머릿속의 미정리 단상, 젊은 날의 기억과 꿈 그리고 세상사에의 참견 등등을 두루두루 섞어서 술술 읽히는 기행문이 썼다.

가마터라면 생각나는 제조 기법, 편년 추정같은 귀찮은 문제를 이렇게도 비켜갈 수 있구나 하는 점에서 도자미술사에 정말 괜찮은 필자 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느낌이다.

편집 스마트K (koreanart21@naver.com)
업데이트 2024.11.13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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