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꿰어진 서말의 구슬
이선옥 | 사군자(매란국죽으로 피어난 선비의 마음) | 돌베개 | 2011.01
매화․난․국화․대나무 네 가지 식물을 사군자(四君子)라 부르며 특별하게 대하는 것은 이들 식물의 특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이 유교에서 지향하는 덕목을 갖춘 인간상인 ‘군자’의 품성에 비유하기 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으로 그려지기 훨씬 전부터 문인들은 시와 글에서 사군자에 얽힌 이야기를 남겼고 이러한 고사들이 그림의 소재로 다루어지면서 서화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군자를 그린다’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말기(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매난국죽 네 식물에 사군자의 의미를 부여하였다고 하며, 1620년 만들어진 『매죽난국사보』라는 책에서 네 식물을 그리는 화법을 설명하여 네 식물을 한데 묶어 다룬 최초의 문헌으로 기록되었다.
『매죽난국사보』중 매법
조선시대 중후반에 이르러 온갖 완상문화가 발달하면서 식물 자체를 아껴 키우고 감상하고 서화에도 등장시켜 곁에 두고 바라보고자 했던 경향 탓이었으리라. 당시 선비들이 원했던 이상적인 자아상과 이 식물들은 묘하게 잘 결합되어 정착이 되었다. 계절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식물이니만큼 계절을 상징하도록 차차 정비된 감도 있다-캐릭터가 겹치는 소나무 등은 빠지고 등. 그런데 각 사군자의 계절 상징이 중국과 다른 점도 흥미롭다. 중국에서는 예전부터 춘란, 하죽, 추국, 동매라 여겼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봄-매화, 여름-난, 가을-국화, 겨울-대나무라 하여 가을 국화 외에는 일치하는 것이 없다.
저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으로 매난국죽이라 여겨지는 순서를 따라 서화로 그려진 사군자를 풀이해 나간다. 매화 그림 중 고사가 딸려 있는 것들을 먼저 살펴보면, 매화를 좋아했던 맹호연의 ‘탐매(探梅)’고사와 매화를 아내 삼았다는 임포의 고사 등이 중국과 우리나라 매화 애호 문화에 큰 영향을 주어 수많은 탐매도나 매화서옥도로 전해진다. 매화를 사랑한 한국 문인들은 ‘빙등조빈연(氷燈照賓宴)’이라며 겨울밤 얼음덩이 속을 비워 촛불을 넣고 달처럼 비추도록 하고 매화를 감상하고 시를 짓는 모임을 열기도 하였다. 그 옛날 온돌방에서 애지중지 매화를 피우고, 꽁꽁 언 얼음덩이를 찾고 하는 수고로움을 마다 않았던 선비들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된다.
<파교심매도> 심사정, 조선 1766년, 비단에 수묵담채, 115.0x50.5cm, 국립중앙박물관
중국 당대의 시인 맹호연이 눈으로 덮인 산에 매화를 찾아나섰다는 옛이야기를 그린 것이 탐매도이다. 나귀를 탄 인물(대개 다리를 건넘), 설산, 꽃이 핀 매화나무, 시동 등이 등이 등장하는 것이 전형이다.
<매화서옥도축> 화암, 청대, 종이에 수묵담채, 227.7x115.0cm 남경박물관
매화를 좋아했던 송대 은일시인 임포는 산에 매화를 심어놓고 20년 동안 세상에 나가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임포의 삶은 은거를 꿈꾸는 많은 선비들의 이상이었고 이를 형상화한 그림이 매화서옥도이다.
조선시대 매화로 가장 유명한 화가는 16세기의 어몽룡과 19세기의 조희룡이라 할 수 있다. 어몽룡의 월매도는 조선 최고의 매화도라는 찬사에 힘입어 최근 오만원권 지폐에 실렸는데, 그림의 핵심인 죽 뻗은 가지와 그 끝에 걸린 달의 극적인 조화가 없어지고 달의 위치 등을 바꾸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월매도> 어몽룡, 조선 17세기, 비단에 수묵, 119.2cm×50.3cm
오만원권 지폐 도안
당시의 사람들이 실제 매화를 보고 그리기도 하였겠지만, 선배들의 그림이나 그리는 법을 다루는 화보를 보고 그리는 것이 많았을 터. 이 책의 저자는 실제의 매화 사진과 화보에서 표현하고 있는 매화의 모양을 찾아서 대조해 보여주어 눈길을 끈다.
『매화희신보』의 매화 표현과 실제 꽃송이 모양
서화를 처음 배우면 난치는 것부터 시작할 만큼 묵란은 문인화의 기본이면서 대표격이다. 고결함을 상징하는 난은『시경』 등 고서에서도 많이 등장하지만 거기서 말하는 난초는 사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난과 다르다고 한다. 그 당시에 난이라고 불리던 난은 국화과의 택란(澤蘭)으로 추정된다. 송나라 이후에야 비로소 현재의 난과 식물을 ‘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중부 이북에서는 난을 쉽게 볼 수 없어 특별히 찾아 길렀던 애란가는 거의 없다. 18세기 이후 대유행을 하게 되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서책이나 다른 서화를 참고로 하였던 듯하다.
많은 난 그림 중에서 이징의 <난죽도>에 얽힌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 작품은 원래 윤언직이라는 이의 그림을 100여 년 후에 이징이 모사한 것인데, 병풍에 적힌 조광조의 시로 인해 되살아난 것이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나서 조광조가 시를 써 준 난죽도 병풍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는데, 그 시를 기억하고 있던 문인들이 있어 조광조의 자손들이 병풍을 다시 만들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난죽도> 6폭병풍 중 한 폭 이징, 조선 17세기, 비단에 수묵, 116×41.8cm, 개인.
이하응 또한 다양한 묵란도를 남겼는데, 그의 난은 정치에서 물러난 후 마음을 달래는 방편이 되었다. 김정희의 난법을 배워 점차 오묘한 경지에 들어가게 됨을 볼 수 있다.
<석란> 이하응,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119×61.5cm, 개인. |
<병란도대련>중 한 폭 이하응, 조선 1887년, 비단에 수묵, 69×39cm, 학고재 |
김정희 등 19세기 대가들의 활약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 묵란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난을 기르고 여러 의미로 선물하기도 하게 되었다.
국화의 경우 군자, 은일의 의미와 함께 장수, 복락의 의미도 있었다. 도연명은 일찍이「귀거래사」에서 “뜰 안의 세 갈래 작은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꿋꿋하다”[三徑就莣, 松菊猶存]라고 노래함으로써 국화의 애틋함을 노래한 바 있다. 도연명의 국화사랑 덕에 국화는 은사의 상징인 도연명과 일체화되어 후세의 사람들에게 은일의 상징으로 애호되었으며, 서리를 이겨내는 강직함, 다른 꽃이 다 피고 진 후 늦가을에 피는 속성으로 인해 온 백성이 다 즐거워한 다음에야 즐거움을 누린다는 군자의 덕 등을 상징한다고 하여 칭송되었다.
<묵국도> 홍진구, 조선 17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32.6×37.6cm, 간송미술관.
<국죽석도> 강세황, 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 28.8×33.5cm, 고려대학교박물관.
사군자의 특성을 지닌 모습으로의 국화 외에도 작가의 모습을 대변하듯이 그려진 대나무 가지에 의지하고 있는 시들어가는 국화 그림 한 점도 있고, 괴석과 국화가 어우러진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병국도> 이인상, 조선 18세기, 종이에 수묵, 28.6×15cm, 국립중앙박물관.
<석국> 허련,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25.4×30cm, 개인.
묵죽화는 대나무의 애호 역사만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어, 중국에서는 북송대 이후 다양한 작품이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그려졌을 것이지만, 고려시대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가장 성한 시기는 조선 초중기로, 문인과 화원화가 모두 묵죽을 즐겨 그렸다.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을 뽑는 시험에서 묵죽이 산수나 인물보다 배점이 높은 것도 한 이유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묵죽을 대표하는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문인화가 탄은 이정이다. 그의 <묵죽>은 대각선 구도로 진한 먹의 대나무 줄기와 함께 담묵의 다른 줄기를 그림자처럼 그려 공간을 시원하게 열어두면서도 단조로운 느낌이 없다.
<묵죽> 이정, 조선 1622년, 비단에 수묵, 119.1×57.3cm, 국립중앙박물관.
부채에 그려진 신위의 <선면묵죽>은 죽간을 길게 남긴 여유와 멋을 느낄 수 있는데, 간결하고 균형있는 구도, 부드러운 필치가 대의 아취를 한껏 느끼도록 해 준다.
<선면묵죽> 신위, 조선 18~19세기, 종이에 수묵, 17.4×56cm, 개인.
근대에 사군자가 더욱 발전하게 된 데에는 조선미술전람회의 덕이 있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제3부에 ‘서 및 사군자’를 별도로 두었는데, 이는 조선미술전람회가 실상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화단 등용문이라는 시각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상징성이 강한 사군자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성을 표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매월죽> 정운면, 1928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본 책 속에는 사군자와 사군자그림 모두에 대해 차례로 모든 관계된 내용들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자세한 고사의 내용, 관계된 문인과 화가, 가장 이른 그림의 기록, 각 시기별 특징과 대표작, 중국과 우리나라의 예 등이 궁금할 만한 대목에서 빠짐없이 등장하여, 적지 않은 양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었다.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의 양도 상당히 많이 실려 있다. 고금의 많은 자료들을 빼곡히 엮어 놓아 잘 꿰어진 서 말의 구슬을 얻은 느낌이랄까. 다 읽고 나서 뭔가 보물을 얻은 듯한 뿌듯함이 느껴지는 책이다.
<매> 강세황, 조선 1761년 이전, 종이에 수묵, 27×26cm, 개인.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은은한 향기가 감도는 듯한 매화도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으면 밖에 나서지 않아도 다가온 봄을 느끼게 되니, 옛 사람들의 멋이란 이런 것이겠거니 조금쯤은 가늠해 볼 수 있다.
<홍매도대련> 조희룡,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각 127×30.2cm,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