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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南農(남농)] - 가문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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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    農  (남 농)
김상엽 지음ㅣ 남농미술문화재단 ㅣ 2010년 11월

 어느 한 집안에서 같은 직업을 대대로 이어나가기란 쉽기도 하지만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특히나 예술적 재능은 그 감각이나 손재주가 어느 정도 타고나야하기에 그저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안일한 마음으로는 가문의 영광을 지속해 나가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조선 말기부터 200년 남짓 화맥畫脈을 이어나가는 가문이 있으니 바로 허련을 위시한 소치 가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소치 허련에 대해 박식한 연구자이기에 소치에서 부터 남농에 이르기까지의 가문의 맥을 친절하게 짚어나가며 남농의 일대기를 보여준다.

                                      소치, <매화서옥도> 모시에 수묵담채,                                                      미산, <산수도12곡병풍>中,
21.0 x 28.0cm, 소치연구회소장  (p.25)                                                    74.0 x 32.0cm, 개인소장 (p.27)

소치 허련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진도출신 화가로 호남지방이 예향(藝鄕)으로 일컬어지게 한 인물이다. 허련은 시·서·화·전각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났던 추사 김정희의 애제자로 자리매김하며 “압록강 동쪽에서는 이만한 그림이 없다”는 극찬을 받았고, 대궐까지 출입하여 헌종을 모시기도 했다.
조선 말기 회화사에서 추사 김정희와 추사파의 활동은 완당바람 또는 완당시대라고 불렸을 만큼 지대했는데, 소치 허련은 한미한 지방의 인물임에도 중추적 일원으로 활동하며 중앙화단의 영향을 받아 지방(호남일대)으로 파급하는 중요한 역할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소치의 화업은 맏아들이었던 허은의 요절로 미산 허형이 그 맥을 이어받았다.
소치가문은 소치의 회화경향을 계승한 미산 허형의 5남 중 4남인 남농 허건(1907-1987)까지 3대째 화업을 이어갔다.

남농은 빈곤한 생활을 이유로 그림공부를 말리는 미산 탓에 10대 후반에서야 그림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남농의 동생인 임인 허림도 소치 가문의 대를 잇는 신예로 기대를 한몸에 받고 도일(渡日)하여 일본 문부성전람회에서 입선을 하는 등 재능을 보였지만 8여년의 회화활동을 끝으로 요절하고 만다.


    남농, <목포일우木浦一隅>, 1944년, 종이에 수묵담채, 148 x 179cm, 개인소장 (선전출품작 -총독상) p.65

그로 인해 남농은 동생의 유족까지 그림을 그려 팔아 꾸려가야 했기에 수요자의 요구에 의한 그림을 많이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14회 동안 입상했으며, 1944년 마지막 조선미전에서는 조선총독상이라는 최고상까지 수상한다.


               『남종회화사』한국전쟁으로 인해 1994년 출판되었다.

그러나 인간만사새옹지마라고 했던가..
가난은 남농의 왼쪽 다리를 붙들었고 28세 때부터 왼쪽다리에 통증이 시작되다가 결국 의족에 의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콤플렉스마저도 극복하고 『남종회화사』를 완성하게 된다. 이 책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출판이 미루어져 1994년 출판되었다.


              남농, <유곡청애幽谷淸靄>, 1956년, 종이에 수묵담채, 55.5  x 108.0cm, 남농기념관 소장 (p.78)

이후 1954-56년 3년은 제자들이나 후손 모두 최전성기로 꼽는데 광복 이후 일본화풍을 본 떴던 전과는 다른 화풍의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난 한국적인 남화인 신남화(新南畵)를 지향했던 남농의 바람은 목포화단의 주요한 흐름이 되었다.
광복 이후 남농을 주임으로 목포화단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제자들과 남화연구원을 조직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국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권위를 더했다. 남농 집은 손님으로 넘쳐났고 남농의 그림은 재화나 다름없어서 귀해졌음에도 가난한 문인들이나 그림을 원하는 사람에게 그림을 내어주었다.

“내 그림을 갖고 싶은 이가 있다면 아낌없이 주고 싶다. 자신의 작품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화가의 본분이다”


죽동화실에서 남농과 제자들 (p.91)

또 작업실을 항상 개방하여 남농의 작업실은 접견장이자 예술 사랑방이었는데 개방적인 작업실에 대해 절친했던 청강 김영기는 마치 장바닥을 연상케 할 만큼 시끌시끌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운림산방 (p.101)                                                              남농기념관에서 (p.112)

근면 성실했고 제자들에게 항상 아껴 쓸 것을 강조했던 남농은 평생 중요히 여겼던 운림산방이 복원된 후 진도군에 기부하였고 오랜 기간 수집한 수석등도 목포향토문화관에 기증하였다. 이러한 기증은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남농이 목포시에 기증한 것은 1981년 당시 10억 이상으로 평가되었는데, 예술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상징적 존재로 다시 한 번 주목된다.

'죽을 때 무엇을 가져가겠어. 문화는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가장 생명력 있는 것이다.”

손님 밥에 반찬을 얹어줄 만큼 자상했고, 그림을 원하는 사람에게 댓가 없이 그림을 줄 만큼 정이 많았던 남농의 성정이 빛을 발한 것이다..

남농은 가문의 화업을 이어 호남화단의 산맥을 지속함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측면에서까지 귀감이 되어 소치가문을 더 큰 산맥으로 이끌었다. 소치가문에 더 더욱 기대되는 것은 아직도 이 산맥이 끊임없이 이어지고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소치 가문의 영광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편집 스마트K (koreanart21@naver.com)
업데이트 2024.11.21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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