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종종 걸음을 치며 걷자면 사람 눈길은 자연히 발밑으로 쏟아지게 마련이다. 어디 돌부리나 허방이라도 있을까. 행여 헛다리라도 짚을까. 그렇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다. 허둥 되는 잰걸음도 다 소용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동동걸음 중에 가끔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그리고 저 멀리를 쳐다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이다.
파랗고 푸른 하늘에 한 조각 흰 구름이라도 둥실 하고 떠있으면 마음은 쉽게 현실을 떠난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식의 거창한 주제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무념한 장면 앞에서 쉽게 현실과는 다른 생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크고 멀고 아득한 것이 주는 힘이다. 문학에서 이런 것을 낭만적이란 말로 표현한다고 들었다.
겸재 정선의 사실을 방불케 하는 금강산 진경산수, 단원 김홍도의 시정 넘치는 새와 꽃 그림. 이런 것들은 보고 있으면 참 좋다. 마음도 푸근해지고 대단히 잘 그렸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각각의 그림이 ‘겸재는 어디서 왔고, 단원의 뿌리는 어디 있는가’라는 소박한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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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터 |
넘실대는 강물만 바라보지 않고, 비유하자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내에 지나서 숲속까지 이르러 강의 시작인 산골짝 샘물까지 생각해 보는 것이 미술사 개론서의 독서다. 물론 현실의 개론서는 거꾸로 샘물에서 시작해 멀리 내려와 넘실대는 강물을 얘기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개론서를 쓰는 일은 힘들다. 강물의 근원을 찾아가 보았거나 작은 개천들의 흐름을 어느 정도 꿰고 있지 않으면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또 설사 꿰고 있더라도 A는 B와 합쳐져 C가 되고 또 C는 D와 합쳐져 무엇이 된다는 식의 동어 반복이면 사실은 그것은 조사 보고서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이 책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에서 만큼은 합격점을 받고 시작했다. 독자의 눈길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글쓰기이다. 저자는 베스트셀러 문화유산 답사기의 필자가 아니었던가. 실제로 책을 펼치면, 개론서를 읽을 때 대개는 빨리 건너뛰고 싶은 대목인 선사시대, 청동기 시대조차 읽히게 만드는 힘이 담겨 있다. 그 힘에 약간의 인내력만 보태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삼국시대 미술을 지나 발해 미술까지 독파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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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고분군.백제,부여 능산리 | |
정말 그런가. 좀 길지만 한 두 대목 인용을 해보자. ‘특히 웅진백제 시절은 고분미술이 최고조에 발달했던 시기인데 공주 송산리에 있는 고분들이 일제의 도굴에 가까운 발굴로 그 실상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1932년에는 벽돌무덤으로 사신도가 그려진 송산리 6호무덤을 카루베 지온(輕部慈恩)이라는 공주고보 교사가 총독부와 교섭하고 발굴했다. 그런데 카루베는 출토 유물을 고스란히 챙기고 무덤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 말끔히 치운 다음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된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는 이 유물들을 중심으로 《백제 유적의 연구》라는 저서를 펴내고 일본인 소장가 오구라에게 팔아넘겨 지금은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147쪽)
‘규암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미스 백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백제 보살상의 전형이다. 1907년 규암에서 발견된 2구 중 하나로, 하나는 일본에 반출도어 현재까지 소재가 불분명하다. 복스럽게 살이 오른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있고, 현세적인 인체 비례의 늘신한 몸매는 옷자락이 신체에 밀착되어 팽창하듯 드러나고 오른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매력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보관에는 화불이 새겨져 있어 관세음보살임을 명확히 알려주고 보륨감이 강한 겹꽃 연화좌대가 백제의 우아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남김없이 보여준다.’(3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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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백제의 앞뒤 모습 규암출토 금동관음보살 입상 ㅣ높이 21.1cmㅣ국립중앙박물관 | |
이쯤 되면 딱딱한 개론서가 아니라 발굴 비화를 소개하는 신문 기사나 쉽게 설명한 작품 해설의 한 구절처럼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야들야들하고 알기 쉬운 글쓰기 이외에 이 책에는 또 다른 큰 친절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도판 사진이다. 풍부한 도판은 비단 작품 뿐만 아니라 유적지 사진, 그리고 복원 모형 사진까지 소개하면서 독자들의 시각적이고 입체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미술사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나 성격 부여 문제는 어떤가. 한국 미술의 개론서를 쓰자면 회화는 물론 불교미술, 공예, 건축, 도자기까지 전부 아우를 만한 커다란 지식 체계가 있어야 한다. 개론서라면 의당 그와 같은 지식을 바탕으로 깊은 성찰에서 나온 주관적 해석을 요구한다. 그래서인지 한국미술의 개론서는, 저자가 머리말에 밝힌 것과 같이 10년에 한권 20년에 한권이랄 정도 밖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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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터 신라경주 구황동 모습, 복원모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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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한문에 익숙치 않은 대신 컴퓨터나 핸드폰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세대들에게 적합한 한국미술사 개론서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을 ‘입문서’라고 격을 낮추어 부른다. 격조 높은 개론서이라기 보다, 새로운 세대와 알기 쉬운 해설에 대한 목마름이 가진 일반인들을 위한 책이란 것이다. 그리고 고대에서 근대까지 그리고 건축에서 불상, 회화, 공예 등의 넓은 여러 분야에 대해서는 많은 동학과 후학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책을 보다보면 가끔 ‘이 책은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느 장부터 읽어도 무방합니다’라고 써있는 책이 있다. 이 책도 그렇다. 학습 전과는 아니지만 한국 미술이 관심이 있는 독자나 일반인이라면 서재에 꽂아놓고 아무 때나 궁금한 항목에 대해, 쉽게 펼쳐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정말, 학습전과처럼 권말부록으로 ‘불교 미술의 기본원리’ ‘미술사학의 방법론’을 첨부해 각각 주요 불교 용어와 서양 미술사학의 흐름을 간략히 해설해 놓았다. 또 각 장을 좀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일반인을 위해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참고서적 목록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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