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희, 「조선 최초의 방계 혈통 국왕, 선조(宣祖)와 그림 속 주인공이 된 여성과 하층민-풍속화 이해를 위한 시론」, 『미술사와 시각문화』 2022 (30), pp.58~91.
선조 대에 그려진 <경수연도>와 <기영회도> 등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성과 하층민의 표현에는 이전과는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후에 어떻게 양상이 변화했을까. (남성)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그림의 주인공이던 조선 사회에서 선조 재위기(1567-1608)에 여성과 하층민이 ‘갑자기’ 새롭게 재현된 맥락을 살핀 연구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기영회도>(1584)를 포함, 1580년대에 제작된 선조 대의 왕실 후원 행사도에서는 이전까지 대개 뒷모습을 보이며 존재감 없이 일렬로 앉아 있는 모습으로 재현되던 여기(女妓)와 시종들이 부각되며, 뻣뻣한 모습이 아니라 잡담을 한다든가 하는 개성적인 모습으로 그려졌다. 고위 관료들의 모임 그림이 가장 성행하던 때에 하층민들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방식의 이미지의 출현은 절대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논의가 전개된다.
<기영회도(耆英會圖)> 부분, 1584년, 비단에 채색, 163.0×128.5cm, 국립중앙박물관
선조 때의 기록에는 왕이 당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여악 사용을 관찰시킨다든가, 가뭄으로 금지된 행사 음악을 아끼던 신하 노수신의 상경을 반겨 특별히 왕의 이름으로 내려준다든가 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선조의 경우 할머니가 중종의 후궁이었기에 최초로 방계로서 왕이 되면서 즉위 초 취약한 정치기반 하에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의지의 상황이었다는 사실과, 후궁과 세속의 문화에 대해 좀더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짚었다.
인종의 후궁 혜빈 정씨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왕실 비구니가 발원한 <서방구품용선접인회도>(1582)에는 후궁의 모습이 그림 속에 등장한다. 초상화는 아니지만 당시 여인의 실제 모습이 목적의식적으로 그려진 예이다. 또한 <사라수탱>(1576)에는 “선조 9년, 비구니 혜원, 혜설 등이 궁궐의 후원으로 오래된 사라수구탱을 모사하여 그린다”는 화기가 쓰여 있는데 의인왕후, 공의왕대비 등 직계여성 외에도 혜빈 정씨, 김씨... 등의 장수를 비는 내용이 들어 있어서 후궁이 후원하는 불화 제작이 이 시기에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방구품용선접인회도(西方九品龍船接引會圖)> 부분, 1582년, 비단에 금니 채색, 115.1×87.8cm, 일본 카가와(香川)현 라이코지(来迎寺)
조모가 후궁이라는 선조의 출신 배경이 회화에서 여성의 표현에 변화를 만들어내었다는 가설 하에 <기영회도> 속 의녀의 표현에도 주목한다. 선조 대의 기록에는 유독 ‘의녀가 음탕하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당시 의녀들이 기강이 해이해져 사치 풍조가 있었고 심지어 여염집 술잔치에 불려다녔다고 한다. 사가에서 행해지던 세속의 풍속을 그림 속에 넣고 기녀나 의녀를 (오히려)생생하게 표현하게 한 것은 무언가 기존의 완고한 기준을 지우려고 한 것이려나. 신하들이 자신에게 자신의 할머니를 조모라고 부르지 말고 첩모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여 역정을 내던 선조의 모습 등을 나열해 당시의 분위기/선조의 생각이 그림 속에 묻어나게 되었음을 역설한다.
근거를 더하기 위해 선조가 총애하던 신하 노수신은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긍정하는 양명학의 지지자였다는 사실, <기영회도> 제작시 도화서 별제가 김시였는데, 김시가 그린 <동자견려도>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나귀의 ‘마음’을 표현했고 시동이 주인공이어서 이른 풍속화의 예로 보인다는 것을 들기도 했다.
선조 때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임진왜란. 그 이후에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지배계층에 대한 권위를 세우기 위해 노모를 잘 모신 관료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경수연을 특별 후원했다. 이 때문에 경수연은 여성을 위한 행사라는 인식이 퍼지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그려진 <계유사마방회도>(1602)에는 마부, 구경꾼, 민가의 지붕 등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가마꾼의 모습만 한 폭으로 그린 경수연도도 전해지고 있다.
선조 이후에는 행사도에 구경꾼들의 모습이 당연하게 나타나는데, 후기로 가서 정조 때의 <화성원행도> 같은 곳에서는 일반 백성의 모습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의 의도를 담은 핵심 이미지로 발전한다.(민심의 표현) 즉, 임란 후 경수연 그림에서 하층민과 구경꾼들을 강조해 노모를 잘 모신 미담이 널리 공유되길 바란 선조의 의도가 개입되었고, 이것이 선조 후원 행사도의 특징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계유사마방회도(癸酉司馬榜會圖)> 부분, 《경수연첩(慶壽宴帖)》1602년 행사, 종이에 채색, 44.0×27.8cm,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마꾼도>, 《경수연도첩》, 1605년 행사, 종이에 채색, 39.0×28.2cm, 서울역사박물관
선조 이후에는 행사도에 구경꾼들의 모습이 당연하게 나타나는데, 후기로 가서 정조 때의 <화성원행도> 같은 곳에서는 일반 백성의 모습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의 의도를 담은 핵심 이미지로 발전한다.(민심의 표현) 즉, 임란 후 경수연 그림에서 하층민과 구경꾼들을 강조해 노모를 잘 모신 미담이 널리 공유되길 바란 선조의 의도가 개입되었고, 이것이 선조 후원 행사도의 특징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김득신 외,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부분, 《화성원행도》 1795년, 비단에 채색, 151.5×66.4cm, 국립중앙박물관
또 하나의 특징적인 점은 선조가 임란 후 공신 선정에서 양반 사대부들 뿐만 아니라 충정을 보여줬던 마부를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총 86명의 호성공신 중 6명의 마부가 포함되었다. 이전에는 없던 충격적인 이 사건은 당연히 신하들의 비판을 받았고, 이 비난에 대해 선조는 “이들의 공로는 사대부와 다를 바 없다”고 반발했다. 6명의 마부들은 다른 공신들과 마찬가지로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도록 했고 품계와 관직도 주었다. 조선 최초로 도화서 화원들이 마부의 초상을 그렸던 것이다. 이것이 하층민들에 대한 인식 변화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까. 연구자 말처럼 이후 풍속화가 등장하고 발전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을까.
선조 때 노모 주인공으로 하는 경수연도는 어느 정도 전형이 되어서 이후 왕에게 경수연 허락을 받거나 할 때 선조 때의 예를 들었던 기록들이 보인다. 이런 잔치나 모임의 기록화에는 구경꾼들과 하층민의 모습이 당연스레 포함되게 된다.
낯선 시각 이미지는 수용자가 가진 편견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해주고, 인식 확장에 영향을 주기에, 조선의 지배계층들에게 이런 이미지들은 새로운 공감 능력을 길러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 의녀, 시종, 마부, 규방의 사람들이 그림이 대상이 된다? 이것이 풍속화에 다름 아니니 그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가름해 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림의 대상의 폭이 점점 넓어지는 것에 딱히 한 가지 원인은 짚을 수 없을 것이고, 그림이 인식의 반향이기도 하면서 그림 자체가 인식 형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선조가 방계 혈통이었던 것이, 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 명백하지 않더라도 선조 대에 나타났던 여러 변화들을 모아 이전과 이후와 연결해 본 연구는 흥미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