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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수근의 미국인 후원인들과 반도화랑, 문화 냉전의 부산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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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정, 「박수근과 외국인 소장가의 조우-냉전 문화의 한 양상」, 『東洋美術史學』 제14호, 2022.2, pp.199-218. 

박수근이 한국 현대미술 최고의 작가가 된 배경에는 한국전쟁 직후 1950~60년대 국내에 들어와 있었던 외국인(미국인)들의 관심과 후원이 있었다. 

박수근의 후원자를 자처한 외국인들은 작품을 구입하고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다른 외국인 컬렉터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반도화랑에서 모여 활동하고 박수근을 후원했던 이들은 누구일까.

박수근의 작품이 외국인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동서의 문화적 차이를 넘은 보편적 인간 정서를 건드리는 미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반도화랑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국민들의 초상과 그들이 가진 (의외의) 전통,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을 박수근의 그림 안에서 보았을까? 이 이면에는 2차대전 직후 냉전이라는 환경이 문화 분야에서 어떤 압력을 가하게 된 것일까?

이 논문에서는 1) 외국인 소장가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작품 소장 배경을 추적하고 2) 그들과 박수근을 이어준 ‘반도화랑’이라는 공간의 성격을 아시아재단의 문화지원 활동 맥락에서 분석하고 있다. 즉, “박수근과 외국인 소장가의 조우는 1950~1960년대 냉전문화의 한 양상이다”라는 가설 하에 논의가 전개된다.

박수근(1914-1965)에 대한 평가 시대에 따른 변화
1965년 사망 이후부터 주목받은 화가 박수근. 그의 부고 기사가 말해주듯 “신라 토기를 연상케 하는 가장 토속적 한국 서양화가”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힘들게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한 불우한 삶이 주목되고, 미협 주도로 유작전도 개최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한다. 
본격적 평가는 1970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박수근유작소품전》 등에서부터. 그에 대한 평가의 워딩을 보면, “한국의 풍미”, “순도 높은 시정”,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에 대한 애정”, “민중의 삶을 형상화”, “건강하고 한국적인”, “서민의 적나라한 삶의 풍경” 등이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토속적 화가, 소박화가라고 규정짓지 않도록 경계하는 비평도 눈에 띈다. 어쨌거나 “가장 한국적인 작가”(오광수)라는 데에 이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가 본격화되는데, “전통과 현실에 기초한 민족의 미의식을 보여준” “근대기 소시민의 초상이자 자화상”(윤범모), “근대사회 삶의 황폐함-소외를 경험하는 인간 존재”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선조의 겸손한 철학” (김현숙) 등으로 표현되었다. 
2000년대에 이르면 페미니즘과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이 추가되면서 다채로운 해석이 가해진다. 
그림 속 여인들을 “과거에 집착하는 남성의 환상 속에 구축된 타자화된 여성”으로 보거나 “조선적인 전통을 보고자 했던 외국인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더 한국스러운 것을 그려야만 했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외국인 소장가들은 누구인가
박수근의 작품을 구입하고 외국에 소개했던 1950년대의 주요 인물은 세 사람의 미국인 여성이다. 마리아 크리스틴 헨더슨(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 실리아 지머맨(미국 무역상사 주재원 부인), 마가렛 밀러. 이들 중 외교관 부인인 헨더슨 외 나머지 두 인물의 행적은 분명치가 않다. 그런데다 부정확한 기억과 기록이 확대재생산되어 학술 연구에서조차 오류가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박수근 연구자들에게 유용한 사료가 되는 박수근의 작업실 사진, 작품 사진들은 후원자가 미국에서 작품을 판매하기 위해 요구했던 참고자료들이었다. 미국인 후원자 마가렛 밀러와 주고받은 서신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작품 판매를 위한 절박함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1. 마리아 크리스틴 헨더슨(Maria-Christine Henderson, 1923~2007)
후원인 중 행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외교관 부인이던 헨더슨이다. 그는 베를린예술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미술인으로, 1950년대 초 베를린주재 미대사관 직원 헨더슨을 만나고 결혼하여 1954년 교토 미총영사관 문정관을 거쳐 1958년 5월 주한 미대사관 문정관으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1963년 3월까지 약 5년간 한국에 체류한다.
박수근 부인의 기록에 의하면 ‘미대사관문정관 부인이 반도호텔에 반도화랑을 설치해 상설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반도화랑은 1956년부터 존재했으므로, 기록상의 문정관 부인이 헨더슨이 아니거나 기억의 오류일 것이다. 
헨더슨은 미술에 관심이 많아 신문에 전시평을 기고하기도 했는데, 여기에서 박수근 작품을 소개하고 소장에도 적극적이었다. 화실방문 프로그램을 기획해 다른 주한 외국인들과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하고, 주거지에 박수근 작품을 진열하고 지인을 초청해 파티를 열기로 했다고 알려진다. 박수근은 마가렛 밀러가 미국에서 보내는 미술 재료를 헨더슨을 통해 전달받기도 했다. 

2. 실리아 지머맨(Celia Zimmerman)
당시 신문기사 중에는 청강 김영기가 지머맨 여사의 근황을 쓴 것이 있다. “화상의 딸로서 실업가를 남편으로 한 지머맨 여사는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에 한국의 현대작가들을 돕기 위해 서울미술구락부를 조직하고 중심역할을 했다. 지난 (1957년) 2월 귀국하게 되자 현대 작가들 작품과 이력을 준비해 미국에 돌아가 한국미술소개전을 한다고 하는데 먼저 홍콩으로 가 『한국현대화가Korean Artists』라는 책을 출판하여 보내왔다.” 
1957년 10월 샌프란시스코 미술관에서 개최된 《아시아와 서양의 미술》이라는 전시에 반도화랑에서 구입한 작품을 출품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편 조셉 지머맨은 미국 무역회사 코넬 브라더스의 직원. 1954년 한국영업소가 설치될 때 초대 영업소장으로 부임했다가 1957년 2월에 귀국, 2년 반 이상 체류했다.

3. 마가렛 밀러(Margaret G. Miller)
밀러는 박수근 부부와 1970년대까지 편지로 교류했는데, 그의 구체적 이력과 행적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남편의 1970년 이후 행적이 묘연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존 밀러라는 사람으로 1953년~1959년 아시아재단의 영화관련 전문가로 활동했다. 이후 뉴욕시 유니텔 필름스 인터내셔널 부사장, 1962년 3월에는 LA 시네스타 인터내셔널에서 근무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아시아재단 서울지부가 한국영화문화협회 설립 관련 그에게 1955년 방문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그는 2주간 현장조사를 하고 나서 재방문, 1956년 6월부터 12월까지 약 6개월간 한국에 체류했다. 
밀러 여사는 세 사람 중 가장 한국 체류기간이 짧았지만 박수근과 지속적 편지 교류를 통해 단순한 소장가를 넘어 작품 판매 및 알선, 전시회 제안, 작업 방향 상담 등 후원자 역할을 자처했다. 사실상 딜러 역할을 한 셈이다. 연구자는 “이는 아시아미술, 특히 한국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밀러 여사는 편지에서 박수근이 언젠가 크게 명성을 떨칠 화가라 하기도 하고, 작업이 발전하고 있으니 현재의 스타일과 색채를 유지하라는 등의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사진으로 확인되는 작품의 미묘한 변화를 지적하기도 했다. 

논문에서는 편지에 등장하는 이름의 인물들(아마도 작품을 소개하거나 구입하도록 했을)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1964년 1월 24일자 편지에 등장하는 존 릭스는 2007년 서울옥션에서 당시 국내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인 45억 2,000만원에 판매됐던 <빨래터>의 소장가임이 확인됐다. 그는 중장비 수입회사 한국영업소장으로 1954~1956년 한국에 체류했다.

<노상>을 구입한 루이스 코원은 텔레비전 PD로 CBS 사장까지 지낸 인물이고, <모자>를 구입한 베라 쿠프너는 오스트리아 맥주회사 오너의 딸로 한스 아르프를 사사한 조각가이다. 
개별적으로 박수근과 접촉한 컬렉터로는 편지(1962.9.19)와 대금을 보낸 고든 존슨(주한미대사관 2등서기관. 1962-1965), 대금을 골동상에게 맡겼다는 편지(1963.11.29.)를 쓴 토마스 콜링우드(주한미군 예술공예부대 근무) 등이 있다. 


이밖에 최근 경매나 기증을 통해서 소장가의 이름들이 밝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다. 
<노상> 구입 로버트 노드랜더 (벨트 콜린스 사 직원으로 한국에 옴)
<모자> 구입 매트 유탈(1964 유엔군 위문공연 온 레스 브라운 밴드 호른 연주자)
<귀로> 구입 후 USC 퍼시픽아시아뮤지엄에 기증, 허버트 눗바(곡물, 사료 유통업자)

반도화랑의 역할
이들이 박수근의 작품을 접하게 되는 장소는 대개 반도호텔에 위치했던 반도화랑이다. 
반도호텔은 휴전 이후 정부가 외국 손님을 접대하는 호텔이자 사무실로 사용되던 공간으로 외교관, 실업가, 관광객의 숙소와 휴식처가 됐다. 영어가 상용되고 미국 달러만 쓸 수 있었다. 
1950년대 폐허가 된 서울의 일반적인 모습과 달리 명동의 일부에는 외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병원, 은행, 공예품 매장 등이 있었고, 반도호텔에서는 주기적으로 댄스파티 문화행사들이 열렸다. 실리아 지머맨의 남편 지머맨의 사무실도 반도호텔 6층에 입점해 있었고 박수근이 작품 대금을 상의한 주한서독총영사 헤르츠도 반도호텔 7층에 거주했다. 다양한 국제기구 관계자, 외교관, 기업가들이 모이던 곳. 그리고 음악과 무용공연 등 문화공간의 성격을 띤 곳이기도 했다. 글에서는 문화활동을 하던 동호회 회원 중 미술 동호인들이 독립해 나중에 지머맨 여사가 역할을 한 서울미술협회라는 친목 단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즉 비영리문화공간의 성격이 강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아시아재단의 반도화랑 후원
지머맨이 한국을 떠난(1957년 2월) 이후 서울미술협회 활동은 위축된 듯한데, 이를 대신해 아시아재단이 반도화랑의 운영을 떠맡고 1958년 1월 10일 본격적인 상업 화랑으로서의 반도화랑이 출발한다. 아시아재단이 6개월간 난방비와 전기료, 봉급 등을 지원했으나 운영미숙으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박수근 작품은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어 이 시기에 <한가한 날> <대기> <나그네> <여인> 등이 팔렸다. 처음 반도화랑의 운영을 맡은 운영위원회는 도상봉, 이유태, 조풍연이었고 1958년 9월 김환기, 이대원, 장우성, 윤효중의 새 운영위가 구성된다. 아시아재단은 지원금 제공하거나 문교부에 배려 부탁 편지를 보내는 등 지속적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아시아재단은 어떤 곳이기에 이런 후원을 계속했던 것일까. 1951년 5월 캘리포니아주 자유아시아위원회CFA로 시작해 1954년 10월 아시아재단으로 개편된 이 단체는 공산주의에 저항하는 아시아 민족의 의지 능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고 외부적으로는 민간 주도의 형태를 띠었지만 실제로는 CIA의 지침과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지부 설립은 1953년 2월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의 CFA 문화 프로그램』(1953)이라는 보고서를 통해서 그들의 한국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는 재능있는 사람들이 그 사회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더 많이 수용되도록 한다는 프로그램의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미술계가 직면한 난관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고, 반도화랑에 대한 지원이 낭비라 인식했음에도 화랑 자립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재단 수행 문화프로그램의 구현 의지 표현한 것이다.
마가렛 밀러의 남편이 아시아재단의 영화분야 전문가로 소속되어 있었고. 지머맨의 남편 회사도 아시아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던 윌버가 회장으로 있는 윌버엘리스 사의 자회사였다. 마가렛 밀러나 실리아 지머맨이 정관계 문화계 지원 속에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당사자가 인식하고 있었든 아니든 반도화랑은 외견상 순수한 문화공간이지만 이면에서는 문화적 냉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공간에서 박수근의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단지 낯설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 한국을 방문한 기념으로 사 갈 만한 ‘이국적 풍물이 있는’ ‘애틋한 정서가 있는’ 작품이어서일까. 그러나 박수근의 후원자 헨더슨, 지머맨, 밀러에게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마리아 헨더슨은 한 비평글에서 “서구 지향이라는 새로운 시대사조가 젊은 미술가들의 창작 의욕을 지배하고 있다”고 간파했고, 1년 후에는 “여러 현실 양상 속에서 자신의 생명의 형식과.. 능력 및 사물 파악력에 앎자은 창작법”을 발견한 가장 한국적인 미술가로 박수근을 꼽았다. 그의 작품에 대해 “앉아있는 남녀, 그들의 전통적 복장과 자세 속에서 미를 탐구하며 그것들을 잘 조화된 장식적 스타일로 배치한다. 한국의 자기를 연상시키는 그의 침잠한 백색과 회색의 색조는 조용함을 발하고 넓은 형식들은 힘을 말해준다”고 평가했다. 1년 만에 한국 정서와 미의식 이해가 깊어진 것이다.

짐머맨의 소책자 내 박수근의 <노변의 행상>에 대한 평을 보면 그는 “질감에 있어서 새로운 양식의 창안자”이며 그의 회화에서 보이는 텍스쳐가 “한국의 여러 사찰에서 발견되는 동물 형상이나 꽃장식을 묘사한 화강암 조각과 같은 느낌이 난다. 그의 주제는 한국과 전후 세계를 사는 한국인들이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유대감을 상실한 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고독하게 등장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대다수 그의 인물들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결단과 불굴의 용기를 보여준다.”고 소개한다. 

마가렛 밀러의 경우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디자이너스 웨스트』에 쓴 글(1965)을 보면 박수근의 개인전 사전 홍보 목적의 것으로 보인다. “굴곡진 역사 속에서도 불굴의 용기로 자신의 문화를 보존하려는 의지를 지닌 한국의 평온한 심리적 특성이 소박하고 절제된 화면구성과 평범하게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인물들에 반영되어 있다” 멕시코 벽화/리베라와의 유사성도 언급했다. (논문에서는 미국인들에게 익숙한 멕시코 벽화와 유사성이 있는 작품 미적 특성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말한다.)

문화 분야에서 펼쳐졌던 냉전의 양상이 한반도 서울에서 박수근의 후원으로 결과짓게 되기까지를 보여주는 논문이다.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박수근 작품의) 그 고요한 역동성, 그것은 냉전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삶을 이어 가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외국인 소장가들이 박수근의 작품에서 2차대전 종전 이후 확산하여가던 문화 냉전에 처한 인류의 초상을 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SmartK C.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9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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