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연희, 「겸재 정선, 그 명성의 근거 검토」, 『대동문화연구』 vol.109, 2020.03, pp.7-32.
겸재 정선은 우리 산천을 그린 위대한 예술가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그의 위상은 그렇지 않았으며, 근현대기에 지속적으로 치받쳐진 것이다. 이 논문은 정선의 위상 향상의 근거가 되었던 사실이나 자료에 주목하면서, 활동기인 18세기, 사후 19세기, 근대기의 평가 양상을 정리했다.
(*『대동문화연구』 109집에는 겸재 정선 뿐 아니라 최북, 장승업, 신윤복의 미인도, 김정희의 위상이 정립된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들이 실려 있다.)
겸재 정선은 우리 산천을 그린 위대한 예술가로 확고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그의 위상은 그렇지 않았으며, 근현대기에 지속적으로 치받쳐진 것이다. 이 논문은 정선의 위상 향상의 근거가 되었던 사실이나 자료에 주목하면서, 활동기인 18세기, 사후 19세기, 근대기의 평가 양상을 정리했다.
(*『대동문화연구』 109집에는 겸재 정선 뿐 아니라 최북, 장승업, 신윤복의 미인도, 김정희의 위상이 정립된 과정에 대한 흥미로운 논문들이 실려 있다.)
목 차
I. 머리말
II. 평가의 이동 경로
1. 전근대기, 奇景을 잘 그린 화가
2. 근대기, ‘眞景’을 그린 화가
3. 현대기, 자주사상을 가진 탁월한 화가
III. 평가의 근거에 대한 검토
1. ‘眞景’이란 칭송의 근거
2. 朝鮮中華思想 배경설의 근거
3. ‘畫聖’으로 세운 증거
IV. 맺음말
18세기 정선은 유람산수 유행기에 기이한 경치를 잘 표현한다는 것을 칭송받았고 ‘실경’을 그린다는 특성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그의 급한 필치 등 단점 지적, 우려가 지속됐고 윤두서, 심사정, 강세황보다 낮게 평가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김정희 등에게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다가 근현대기 정선에 대한 평가가 급상승하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 초, ‘진경(眞景)’이라는 컨셉이 설정된 과정이 흥미롭다. 일제강점기 학자들이 18세기의 문헌에서 ‘진경’이라는 용어를 빌려온다. 18세기에는 실경(實景)을 의미했으나 이것을 ‘우리 산천을 그린 민족주의적 가치’가 있는, 그리고 ‘근대적인 스케치’라는 의미를 담은 용어로 전환시켰다. 한편 정선의 진경 산수의 배경으로 명나라를 조선이 계승하여 스스로 中華(小中華)라고 생각하는 ‘조선중화사상(朝鮮中華思想)’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 논거의 시점이 맞지 않는다는 점과 예시로 들은 문장의 해석에 오류가 있어 기본적으로 옳지 못함을 가려냈다. 또 ‘畫聖’이라고 불렸다는 설 또한 고전문헌의 표현방식과 경전에 대한 몰이해가 빚은 오역이었다.
어떻게 잘못된 해석이 가능했는지 예를 들어보자. 1993년 처음 화성론이 제시되었을 때, 최완수는 조선시대 박덕재의 글(『해악전신첩』 (1747) 발문)을 증거로 삼았다. 해당 글은 “이에 정씨가 그림으로 성인을 모시게 됨으로써 곧 향당에서 한번 엮어낸 畵聖人이 되었고 이공(이병연)은 시와 음률로 그 뜻을 읊음으로써 곧 비파와 거문고 소리 쨍쩅하게 내었다(대시인이 되었다)” 이라고 해석하면서, 정선은 화성인이, 이병연은 대시인이 된다는 것으로 풀이했다. (“박덕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겸재를 畵聖으로 존숭하였다”고 해설. 1747년 해악전신첩은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다.) 2009년 최완수는 『겸재 정선』 책에서 다시 이 글을 소개하면서는 시성과 대응하는 ‘화성’은 아닌 것으로 해석은 고치면서도 ‘화성인’이라는 칭호를 해설에서 반복하고 챕터 제목도 ‘화성의 길’이라고 짓는 등 화성의 명성을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박덕재의 글은 제대로 해석하면 “우리 금강산은 산수에서 ‘聖’이다. 여기에 정씨가 그림으로 모셔 앉혔으니 이는 즉 「향당편」이 성인을 그려냄이요...”라 될 수 있다. 논어의 향당편은 공자의 행동, 의복, 음식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장으로, “향당편이 성인을 그린다”라는 표현에서 성인은 공자를 뜻하고, 향당편이 공자 묘사하듯 정선이 금강산을 구체적으로 잘 묘사했음을 표현한 글이라는 것이다.
『해악전신첩』 (1747) 중 금강내산
박덕재의 발문 부분
정선이 ‘그림의 성인’으로까지 치켜세워졌다고 했던 근거가 이렇듯 허약했음을 밝혀낸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지는 모르나, 그렇게 무리한 결론을 끌어내는 노력을 기울였던 시대적 배경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목적의식이 학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세심한 검토를 지나치는 무리한 시도를 낳고, 그것이 쌓이고 쌓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의 생성은 그 자체가 성장해가면서 일반인들에게 만족감을 주고 화가들에게 용기 혹은 영감을 주었다. 우리 산천을 주제로 하는 ‘진경’의 회화예술이 근대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고, 그것을 그린 화가의 사상은 민족 자주적인 것이었으며, 이미 그 당시에도 최고로 칭송되었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 담론의 정립과 확산의 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세워진 위상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저자는 ‘과거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속적 사유와 가상의 설정, 곧 과거와 현재가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는 인문학의 살아있는 역사로 실제적 의미를 발휘하게 된다’고, 이미 세워진 겸재 정선의 명성과 위상은 한국회화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