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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영회와 기로회의 차이, 현전하는 기영회도 5점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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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현, 「조선시대 耆英會圖의 일례: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본〈宣祖朝耆英會圖〉를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Vol.40, 미술사연구회, 2021, pp.191-213.

모임을 기록한 계회도 중에 원로 대신들의 모임 그림이 두 가지 있다. ‘기영회도耆英會圖’와 ‘기로회도耆老會圖’가 그것. 두 모임 모두 유교적 덕치를 기반으로 했던 조선시대에서 원로 대신들을 공경하기 위한 국가적 행사 및 연회였고, 국왕이 술과 음악을 내려주었으며,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긴 참석자들은 인원수대로 기록 그림을 주문해 자손 대대로 남길 수 있게끔 했다. 
  두 모임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했고, 어떤 차이로 구분할 수 있으며, 어떤 것들이 남아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이 요구되는데, 이 논문은 그 중에서 기영회와 기로회의 성격구분, 시대에 따른 변화와 총 열린 시기와 횟수 등을 밝히고, 남아 있는 ‘기영회도’ 간의 관계-임모 순서 등-을 밝혔다. 

기영회와 기로회에 대해 대충 비슷한 모임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성격이나 역사적 변천에 대한 연구 부재로 인한 오류라는 것이 논자의 주장이다. 


기영회는 임진왜란 이전에만 열렸던 것이므로 ‘기영회도’ 자체가 매우 드물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본을 포함해 총 6점에 불과하다. 이중 다음의 다섯 점을 연구 대상으로 했다. 

① 1585년 초가을(선조조)에 열렸던 기영회를 그린 유리건판본 1점
②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조조기영회도〉(接 2762, 이하 ‘국박접수본’)
③ 동원 기증 〈선조조기영회도〉(東 2910, 이하 ‘국박동원본’) 
④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선조조기영회》(歷 246, 이하 ‘서울대박물관본’), 
⑤ 경상북도 봉산서원 소장의 〈기영회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9호, 이하 ‘봉산서원본’)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영회도〉(신수 14888, 보물 제1328호)는 1584년 이전의 기영회를 그린 것이나 풍속화적 표현 등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논외로 함

이 연구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질문-가설은 다음처럼 정리할 수 있다.
1. 기영회도와 기로회도는 성격이 다른 별개의 모임이다
2. 유리건판본 선조조기영회도(①)는 국박접수본(②) 기영회도를 찍은 사진이다
3. 국박동원본(③), 서울대박물관본(④), 봉산서원본(⑤)은 ①, ②와 같은 기영회도를 후대에 임모한 것이다


1. 기영회도와 기로회도는 별개의 모임인가?
기로회는 나이든 왕과 전직 대신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의 모임이다. 기영회는 기로소(전함재추소라는 명칭으로 불린 시기도 있음)와 관계 없이 운영되는 전 현직 원로대신들의 사적 모임이었으니 두 모임은 성격의 차이가 난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1433년 1월에 열린 한 기영회도를 예로 든다. 우의정으로 퇴임한 류관(柳寬, 1346~1433)은 1월 20일 세종 임금의 허락을 받고 전 좌의정, 영돈녕, 전 이조판서, 전 판한성부사, 지중추원사, 공조판서 등과 기영회를 가졌다. 세종은 좋은 술과 안주를 내려주었다. 이때 참석했던 전 좌의정 이귀령(李貴齡, 1346~1439)이 자신도 기영회를 열고 싶어 임금께 청했는데 그때는 임금의 허락을 못 받았다고 한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한가롭게 있는 늙은 신하일지라도 어찌 달마다 모임을 베풀 것이랴’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2월 21일

기영회는 기로소와 관계 없고, 현직 관리도 들어가고, 처음에는 시기도 크게 관계 없었다. 원로대신들의 사적 모임을 국가적 차원에서 치러주며 우대한 것이다.(국왕의 허가는 정치색을 띤다는 오해를 벗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논문에서는 말하고 있다.)

1404년 이거이(李居易, 1348~1412)가 기영회를 조직하고 정한 모임 규약을 보면 관직 유무에 관계없이 풍류나 친목을 목적으로 한 사적 성격이 강한 모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나이로 차례를 정하고 벼슬로 차례를 정하지 않으며 기구는 되도록 간결히 하고 음식은 오미(五味)를 넘지 않으며..... 술의 순배는 세지 않되 양에 맞춰 자작하여 주인이 권하지 않고 손님 또한 사양하지 않으면서 약간 취하는 것으로 법도를 삼으며....

조선 첫 기로회는 1394년 60세를 맞은 태조 이성계(1335-1408)가 덕망 있는 원로대신들과 함께 기로소에 입소하며 연회를 개최한 것이다. 기로소는 한성부 등청방(현재 종로1가 일대)에 설치되어 있었고, 70세 이상 정2품 ‘전직’ 문관으로 입소가 제한되었으며, 이들에게는 별도의 전답, 노비, 소금 등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태종 1년(1400) 이 노인들이 한양 밖 수령을 이용하고 가렴주구하는 등의 폐단이 있자 한양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명하고 전함재추소를 설치해 그곳으로 귀속시켰다. 1428년 전함재추소 명칭을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바꾸고 이것도 약칭 기로소라고 불렀다. 기로연은 세조연간에 해마다 3월3일, 9월9일 정기행사로 정착됐다.   

기영회와 혼돈되기 시작한 것은 1473년이다. 양로적 모임이었던 기로회에 70세 미만 현직 정승이 참여하면서 국정 현안 논의의 장으로 변화됐고 당연스레 권력화되었다. 장소도 경복궁 근거리의 훈련원으로 바뀌었다. 양로적 성격을 벗어나 기영회 같은 정치적 모임이 되는 분기점을 만든 것은 정치적 영향력이 대단했던 한명회 때문이었다.

이 이후에는 기영회가 (기로회를 대체하면서) 3월 3일, 9월 9일에 정기적으로 열린다. 다음해인 1474년 3월 3일 훈련원에서 열린 기영연에 대한 사관의 기록을 보면, 70세가 안 된 현직 고관들의 참여 때문에 ‘의정연’이나 마찬가지라며 비판했다. 전직 원로대신을 예우하던 ‘기로회’가 현직 실세가 참여하는 ‘기영회’로 교체된 것이다. 1480년 성종은 ‘왕희지의 난정모임에 젊은이가 함께 했다’며 우찬성, 병판, 동래군, 광성군, 호판, 부제학, 홍문관 관리 등의 참석을 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밤늦도록 술과 음악을 즐기는 유희로 변해갔다. 1489년 9월 기영회에서의 달구경은 유연(遊宴)이라며 폐지할 것을 청하는 일도 있었다.

흉년에도 술만 하사될지언정 지속되다가 1525년 중지됐다. 그러나 양로정책을 중요시하던 중종이 문관 시험에 ‘기영회도’ 시제를 출제하기도 하더니 1542년에는 기영연을 재개했다. 선조연간의 기록은 임진왜란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1585년 초가을 기영회를 그린 <선조조기영회도> 5점이 남아 있어 임란 직전까지 기영회와 기영연이 지속되었음을 알려준다. 

임란 이후인 1623년 궤장 하사를 논의하던 기록에서 ‘기영연이 근래 국가에 일이 많아 폐지된지 오래되었다’고 되어 있어 임진왜란을 계기로 기영회가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광해군(재위 1608-1641) 이후 ‘기영연’이 아닌 ‘기로연’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한다(광해군이 1610년 기로연에서 밤늦도록 음주를 즐겼다고 한다). 정치사회적으로 안정기를 맞은 숙종은 1680년 새해 영의정에게 궤장을 하사하면서 기로연을 베풀었고, 1719년 70세 넘은 2품 이상 고위급 관리들과 함께 (태조처럼)기로소에 입소했다. 이를 기념하는 기사계첩이 제작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전직 고관을 위한 양로정책으로 봄가을 잔치를 열었던 기로회가 한명회 주도의 1473년 기로연에서 장소도 바뀌고 참석자도 젊은 현직을 포함시켜 실세 모임으로 바뀌며 명칭도 기영회로 바꾸게 된다. 임진왜란 때 중지되었다가 임란 이후에는 특별한 경우에 열리는 부정기 행사 ‘기로회’로 살아났다. 기영회는 임란 이전에만 존재했던 것이고 기로소와는 무관하며 현직 고관의 참석으로 국정 논의 기능을 겸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2. 유리건판본 선조조기영회도(①)과 국박접수본(②), 두 그림은 어떤 관계인가?
유리건판본 기영회도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유물조사 과정에서 촬영된 것이다. 용마루가 묘사된 건물 안에 원로대신 7명이 왕이 하사한 선온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며, 양쪽에 커다란 촛대는 연회가 한밤중까지 이어졌음을 말해준다. 기녀, 악공, 하인 등은 신분에 따라 크기가 다르게 그려졌다. 악장을 연주하고, 술을 권하는 연회를 열고 투호놀이를 하던 기영회의 기록과 일치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아래에는 기영연 참석자들이 지은 시문 7수가 적혀 있고, 참석자의 이름, 자, 호, 생년월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병풍 속 산수도는 조선중기 안견파와 절파 화풍이 절충된 것이라 기영연 당시에 제작된 원본임을 시사하지만, 대신의 얼굴이나 관복 선묘 일부는 필력이 가늘고 차이가 있어 후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유리건판의 그 기영회도는 1585년 그려진 원본이거나 임모본이라도 가까운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판단했다. 가장 제작 시기가 이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것과 국박접수본(②)을 비교하면 훼손과 오염 지점까지 거의 일치한다. 국박접수본의 훼손부위가 더 넓은 것은 유리건판본 촬영은 1930년대에 이뤄진 것이고, 국박접수본은 1949년 9월 들어와 그 사이에 훼손 부위가 더 넓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동일한 작품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3. 국박동원본(③), 서울대박물관본(④), 봉산서원본(⑤)은 후대에 그려진 임모본인가? 그렇다면 세 그림의 제작시기, 선후관계는?
서울대박물관본은 화첩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축이었으나 좌목이 절단되면서 화첩으로 개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전 <선조조기영회도> 5점은 모두 임진왜란 이전 계회도 형식인 축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대박물관본은 비단에 채색이며, 병풍 속 산수도 화풍이 남종화풍이어서 유리건판본보다 나중에 임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물 묘사 등은 거의 유사하나 건물 지붕 윗부분 연운 처리로 후대 임모 근거를 더한다. 




국박동원본은 건물, 인물 모든 면에서 화격이나 수준이 현저히 떨어진다. 선묘 위주로 그려지고 색채도 선명하지 않아 행사기록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화가에 의해 임모된 것으로 보인다. 인물 크기로 신분을 나타내는 고식적 표현이 보이지 않는 것도 후대 모사본이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지붕의 연운 묘사나 기와골 명암으로 공간감을 나타낸 것은 서울대박물관본과 비슷해, 동일한 유형의 임모본을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봉산서원본은 표제의 서체와 연회 장면, 시문과 좌목 글씨 등 확연한 수준차이를 보여 가장 나중에 임모된 것으로 보인다고 쓰고 있다.


유리건판은 현 국박접수본의 옛 모습이라는 결론. 따라서 국박접수본이 현전하는 기영회도 중 제작시기가 가장 이른 예로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나머지 중에서는 서울대박물관본이 실력이 좋은 화가가 임모한 것이지만 시기적으로는 국박접수본에 비해 나중에 임모된 것이다. 국박동원본과 봉산서원본은 행사기록화의 특징적 기법인 구륵전채법이나 고식 인물표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가장 늦은 시기에 모사된 것으로 보았다. 국박접수본이 원본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논문에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SmartK C.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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