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삼국유사』 소재 불화 기록과 신라의 불화」, 『미술사학』 42호(2021.08), pp.7-38
한국미술사교육학회의 『미술사학』 42호(2021년 8월 발간)에는 고려 때의 승려 일연이 쓴『삼국유사』를 미술사적 시각으로 해석한 논문 세 편이 실렸다. 그 중 「『삼국유사』 소재 불화 기록과 신라의 불화」는 『삼국유사』 속 당시의 불화(佛畫)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 역사서 속에 기록된 종교화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종교화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고 나아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그 당시 그림에 대한 지식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한국미술사교육학회의 『미술사학』 42호(2021년 8월 발간)에는 고려 때의 승려 일연이 쓴『삼국유사』를 미술사적 시각으로 해석한 논문 세 편이 실렸다. 그 중 「『삼국유사』 소재 불화 기록과 신라의 불화」는 『삼국유사』 속 당시의 불화(佛畫)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 역사서 속에 기록된 종교화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종교화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고 나아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그 당시 그림에 대한 지식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의 불화 기록 열 건을 찬찬히 짚고 난 논문의 결론은 『삼국유사』 가 신비주의의 집대성이기에 불화 관련 기록도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신비하고 기이한 영험의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다양한 불화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시대의 불화는 <대방광불화엄사경大方廣佛華嚴經寫經> 변상도 한 점 뿐이다.
『삼국유사』 에 등장하는 불화 기록은 대부분 고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불화에 대한 것인데, 고려 및 중국의 불화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다(고려 1건, 중국 2건).
1. 흥륜사벽화보현조 興輪寺壁畵普賢條 (고려, 921년)
2. 삼소관음중생사조 三所觀音衆生寺條 (십일면관음보살도 : 중국화가)
3. 전후소장사리조 前後所藏舍利條 (신광사 오백나한도 : 후량에 사신으로 갔던 사신이 가져옴)
4. 선도성모수희불사조 仙桃聖母隨喜佛事條
5. 밀본최사조 密本摧邪條
6. 경흥우성조 憬興遇聖條
7. 대산오만진신조 臺山五萬眞身條
8. 월명사두율가조 月明師兜率歌條
9.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 關東楓岳鉢淵藪石記條
10. 분황사천수대비맹아득안조 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條
1번은 흥륜사 보현보살 벽화에 대한 내용으로 시기상으로는 고려 개국(918) 이후이지만 935년 경순왕이 항복을 처한 국서를 보내기 훨씬 전이므로 사실상 신라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2번째인 三所觀音衆生寺條(십일면관음보살도)의 기록은 중국 화가가 황제의 명으로 황제가 총애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다가 실수로 붓을 떨어뜨려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찍혀 여인과의 관계를 의심받아 벌을 받을 뻔하다가 꿈속에 본 십일면관음보살을 그려주고 풀려나 신라로 도망, 중생사에서 관음보살상을 완성했고 이 상이 세 가지 영험을 나타냈다는 재미있는 내용이다. 이 그림에 대해서 일연은 중국 양무제 때의 인물인 장승요張僧繇가 그렸다는 설이 있다고 기록했다. 물론 장승요가 신라로 망명했다거나 불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은 없다. 11면 관음보살도의 조상은 중국에서 6세기 중엽 이후 성행해 장승요의 활동시기(6세기 전반)와도 맞지 않는다.
3번째 오백나한도와 관련된 기록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236년작 고려시대 오백나한도 중 제427원원만존자도願圓滿尊者圖 하단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여기 묵서는 1892년에 윤옥이 덧붙여 쓴 것으로 ‘양 황제가 오도자가 그린 오백나한도를 주며 동쪽나라 명산에 봉안하도록 했다’는 내용인데, 현존하는 이 오백나한도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광사 봉안 오백나한도를 모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묵서가 쓰여진 19세기 말까지 진본이 남아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백나한도가 들어온 시기는 오도자의 활동 시기와 200여 년 차이나고 한반도에 들어 온 오도자의 그림은 전칭된 예가 많으므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광사 오백나한도는 오도자의 이름을 빈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나머지 신라의 불화 기록은 탑이나 불상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나 절, 탑의 유래, 고승의 전기, 이승(異僧)들의 행적, 영험과 감응의 신묘한 내용 등이다. 논문에서는 각 기록을 해석하고 그 불화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를 현전하는 유물 등을 바탕으로 유추하고 있다.
각 내용들은 흥미로운 서술이 가득한데, 예를 들어 5번째 흥륜사 오당 금니 미륵 벽화 金泥彌勒壁畵 (밀본최사조 密本摧邪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승상 김양도가 어린아이일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매양 한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이끌고 와서 집안의 모든 음식을 다 맛보는 것을 보았다. (중략) 조금 후에 사방의 대력신이 모두 쇠갑옷과 긴 창을 지니고 와서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갔다. 다음으로 무수한 천신이 둘러싸고 기다렸고, 잠시 후 밀본이 와서 경전을 펴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 병이 이제 완치되어 말이 통하고 몸이 풀려서 사건을 온전히 설명하였다. 양도가 이로 인해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일생동안 태만함이 없었고, 흥륜사 오당의 주존인 미륵존상과 좌우보살을 소상으로 만들고 아울러 그 당에 금색벽화를 채웠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이며 나중에 승려가 된 법흥왕이 머물렀을 정도의 국가 사찰이었다. 흥륜사 오당(吳堂)에는 승상이었던 김양도가 시주하여 제작한 금니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유래에 관한 기록이다. 어렸을 때 김양도가 입과 몸이 굳어져 꼼짝 못할 때 승려를 청해 경전을 읽었더니 김양도 몸에 붙어있던 귀신이 몽둥이로 중을 쳐서 죽였고, 다시 밀교승을 청했더니 그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방에서 무장한 대력신이 나타나 귀신들을 잡아갔고, 밀본이 도착해 경전을 펴기도 전에 병이 나아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흥륜사 오당에 소조 미륵삼존상을 만들고 금니벽화를 조성해 공양했다는 것이다. 흥륜사 오당의 모습과 벽화의 도상에 대해서는 기록에 없으나 여러 기록을 통해 적어도 오당은 금당은 아니었다는 것, 삼존불에 대한 아미타삼존상 / 미륵삼존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각 근거 등을 제시했다.
여섯번째인 남항사 11면관음보살도(경흥우성조 憬興遇聖條)는 『삼국유사』내에 다음의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다.
경흥이 갑자기 병이 나서 한 달을 지냈는데 한 비구니가 와서 그를 문안하고 ≪화엄경≫ 중 착한 친구가 병을 고친 이야기를 가지고 말하였다. “지금 법사의 병은 근심이 이른 바이니 즐겁게 웃으면 나을 것이다.”라고 하고 곧 열한 가지의 모습을 만들고 각각 광대와 같은 춤을 추니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하기도 하여 변하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너무 우스워 턱이 빠질 것 같았다. 법사의 병이 자기도 모르게 나았다. 비구니는 드디어 문을 나가서 곧 南巷寺로 들어가 숨어버렸는데 가지고 있던 지팡이는 十一面圓通像 탱화 앞에 있었다.
경흥은 신문왕(재위 681-692) 때의 고승이다. 병이 들어 잘 낫지 않자 한 여승이 스님의 병은 근심 때문이니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이라며 열 한 가지 모습으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어 법사를 낫게 했는데, 여승이 숨어버린 남항사에 찾아가니 그녀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가 새로 그린 11면원통상 탱화 앞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원통상은 관음보살의 또다른 이름이므로 경흥이 만난 여승은 관음보살의 현신이라는 의미이다. 저자는 남항사 11면관음보살도의 모습을 비슷한 시기 중국 서안 광택사光宅寺 칠보대七寶臺 11면 관음보살입상과 석굴암 11면관음보살입상의 예를 통해 “11면에 2개 또는 6개의 팔을 가지고 손에는 정병과 염주, 연꽃 등을 든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는 7세기에 11면관음보살신앙이 성행했고 이에 따라 해당 불화가 조성되었던 듯하다.
일곱번째 오대산 오만진신보살도(대산오만진신조 臺山五萬眞身條)에 대한 기록은 보다 자세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 산은 곧 白頭山의 큰 줄기로서 각 臺는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청색은 동대의 북각 밑과 북대의 남쪽 기슭 끝에 있으니 마땅히 관음방을 두어, 圓像의 관음보살과 푸른 바탕에 1만 관음상을 그려서 봉안하고,(중략) 적색인 남대 남면에 지장방을 두고, 원상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8대보살을 수위로 한 1만 지장보살상을 그려 봉안하고,(중략) 백색인 서대 남면에 미타방을 두고 원상의 無量壽와 흰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수위로 1만 대세지보살을 그려 봉안하고,(중략) 흑색인 북대 남면에 羅漢堂을 두고 원상의 釋迦와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수위로 5백 羅漢을 그려 봉안하고, (중략) 황색인 중대의 진여원 중앙에 진흙으로 빚은 문수보살의 不動을 봉안하고, 뒷벽에는 노란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수위로 한 36가지로 변화하는 모양을 그려 봉안하고, (중략) 보천암을 華藏社로 고쳐 세우고, 원상의 비로자나 삼존과 ≪大藏經≫을 봉안하고, 복전승 다섯 명이 ≪대장경≫을 항상 열람하고, 밤에는 華嚴神衆을 염송하고, 매년 華嚴會를 1백일 동안 베풀되, 이름을 法輪社로 하여라.
태자 보천과 효명 두 형제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다가 효명이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경주로 돌아가고 나서 보천 혼자 수행하다가 입적했는데, 그날 오대산의 의례와 예참에 대해 말했던 내용이 기록된 것이다. 신라 오대산신앙의 체제에 대해 밝힌 것으로 여기에서 "5대"에는 각각 관음보살일만관음보살도, 팔대보살일만지장보살도, 무량수여래일만대세지보살도, 석가여래오백대아라한도, 비로자나삼십육응신도를 봉안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저자는 실제로 오대에 각각 1만 구의 부처와 보살을 결합한 그림이 걸렸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 아마도 상징적 언급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당시에 팔대보살과 지장보살, 무량수여래와 대세지보살, 석가여래와 오백나한, 비로자나와 문수보살이 결합된 도상이 존재했을 가능성 등을 읽어낼 수 있다. 팔대보살과 지장보살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두 존상이 결합된 그림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삼국유사』 속 신라시대 불화에 관한 기록은 상당 부분 신묘한 현상들, 즉 신체현신神體現身과 신력현시神力顯示와 관련되어 있다. 불화가 영험을 보여주었다는 이런 표현에 대해서 논문은 불화 속 부처나 보살의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는 의미로 대체해 해석한다. 화려한 채색과 금을 써서 사실적으로 그린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통해 당시 사람들은 부처와 보살이 현신한 것처럼 느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삼국유사』 속 불화의 표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시대의 종교미술의 특성 등 역사적 사실들 근거로 해당 불화의 모습들을 최대한 유추해 서술하고, 당시 불화가 단순히 예배의 대상이거나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을 넘어서 종교적인 영험과 기적을 보여주는 마법과 같은 그림이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