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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기 미술사학자가 소동파의 역할을 규정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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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진, 「소식(蘇軾, 1037-1101)의 회화론과 근대기 중국미술사」, 『미술사학연구』Vol. 309, 2021.03, pp.179-208.  

근대기를 맞는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맞닥뜨린 문제를 공유하는 바가 분명히 있었다. 선진적인 서구화의 물결을 받아들여야 하는 환경에서 독자적인 것을 잃지 않고 그것을 살려나가야 했던 와중에 지식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타개책을 마련하려 했을까. 

1920년대, 중국인으로 서양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던 최초의 근대적 미술사학자가 11세기 인물 소식(蘇軾, 1037-1101)을 어떻게 이용하고 그 관점은 어떠했는지에 대한 논문을 통해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 중국 학계에 전통적 화론을 벗어나 근대적 중국미술사 체계를 잡는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중 텅구(滕固, 1901-1941)라는 학자의 소동파 논문을 분석하여 그 시기 중국 학자들의 미술사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하는 논문이다. (저자는 텅구의 중국미술사 연구로 2020년 서울대학교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북송시대 학자, 관료, 시인, 서예가이자 화가인 소식. 동파거사 소식은 문인화 개념을 태동시켜 엘리트의 그림이 화공의 그림보다 우위에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며 중국회화사 성격의 한 기준을 만들었다. 명말 동기창(1555-1636)이 이것을 남북종 이론으로 정립시킨 이후 근대기까지도 ‘문인화’가 최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자는 소식에 대한 평가가 중국회화사를 보는 시각을 대변한다고까지 썼다. 



텅구(滕固, 1901-1941)


텅구는 서구의 미술사학을 직접 습득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중국인으로, 학부는 도쿄, 박사학위는 베를린에서 받았다. 베를린 유학 도중 독일 현지 잡지에 중국 문인화에 대한 논고들을 발표했는데, 이중 소식의 회화이론에 대한 「미술평론가로서의 소동파」는 동시기 다른 저자들과는 조금 다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연구자의 입장이다. 근대기 지식인이 중국회화사에서 소식의 역할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리고 텅구의 해석이 가지고 있는 근대성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다. 
 
소식의 회화론


조맹부가 그린 소식의 초상


소식이 살던 11세기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통치이념으로 해서 과거제도를 확대하고 문인들의 개인의식 성장하던 시기로, ‘학문과 치세에 무해한 선에서 예술 작품의 창작과 감상을 통해 개인의 가치 실현 추구’가 동의되던 때다. 송의 관료이자 학자인 소식의 ‘묵희’ 이론도 이러한 것에 해당하며, 문동(文同, 1018-1079)의 묵죽화가 인기를 얻는 등 수묵화가 발달하는 토대가 마련된다. 당시 구양수가 추진했던 ‘고문 운동’, 즉 화려하고 장식적인 글을 비판하며 강건하고 질박한 정취를 가진 당나라 전성기 문풍 계승 주장했던 것이 그의 제자 소식에게 영향을 끼친 바도 있을 것이다. 문인들은 회화를 문학적 틀에 맞추려 노력했고 강건, 질박 추구 경향이 그대로 이어졌다. 이들은 전문화가가 아니니 대형화나 숙련된 기법이 필요한 채색화는 어렵고 시와 서에 익숙한 문인들이니만큼 친숙한 ‘먹’을 사용하는 수묵화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이런 형식이 추상성과 상징성을 내포하는, 주관적 내면 표현에 적합하다고 여겨지게 된다. 수묵화가 완전히 문인의 문화 속에 스며들게 된 것이다. 

소식은 여러 곳에서 ‘시와 회화는 형식이 다르지만 동등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 

“그림을 대상과 닮은 것으로만 논한다면 그림 보는 안목이 아이와 다름없다. 시를 짓는 데도 반드시 이 시여야만 한다고 하면 시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시와 그림은 본래 한 가지 이치이니 태생의 재능(天工)과 독창성(淸新)이 있을 뿐이다.(소식의 제화시 「언릉 왕주부의 절지화에 쓰다」)”

“두보가 지은 시구는 형태 없는 그림이요, 한간이 그린 그림은 말 없는 시이다.”

‘사인화’라는 용어도 그가 최초로 사용한 것이다. 회화의 창작과 감상이 사대부의 문화임을 정립시키면서 스스로 묵죽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결국 작가의 인격이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되는 토대를 만든 셈이다. 

20세기 초반의 중국에서 소식에 대한 평가를 남긴 이들은 꽤 많다. 중국미술사학계의 손꼽히는 학자인 천스쩡(陳師曾, 陳衡恪, 1876-1923), 정우창(鄭午昌, 1894-1952), 판톈서우(潘天壽, 1897-1971), 퉁수예(童書業, 1908-1968) 그리고 화가 푸바오스(傅抱石, 1904-1965) 등인데, 소식에 관한 개별 논고를 남긴 인물을 텅구가 유일하다. 텅구의 재독시기 논고는 모두 문인화와 관련된 것으로, 이를 동시기 문인화 재인식 열기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았다. 특히 소식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한 배경에는 동시기 일본과 중국에서의 문인화 연구 붐과 그가 문단에서 활동하던 작가였다는 점을 짚었다. 


문인화 재인식 열기

청나라 때 옹방강(1733-1818) 등이 주도해 송시, 소식의 서체 등을 유행시키고 소식의 생일을 추모하던 수소회를 열기도 했었는데, 이것이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 텅구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20년까지 문학에 전념했으며 일본에서도 재일(在日) 중국인 문학단체에서 활동했다. 문학계의 소식 열기를 체감하면서 그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에서도 20세기 초반에도 적벽 뱃놀이나 수소회가 열릴 정도로 옛 중국의 문인 문화 열풍이 이어졌다. 예를 들어 1922년 9월 7일에는 도쿄, 교토, 다롄의 세 도시에서 적벽회가 동시에 열려 수백 명의 문인이 참석했으며 당시 일본과 중국 지식인들의 커다란 관심을 끌었고 그들의 서화 수집 열기를 고조시켰다. 

교토의 적벽회에는 중국학의 대가 나이토 코난/토라지로(内藤湖南, 1866-1934)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송대에 근세(近世)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기도 했다. 당시 도쿄의 도요(東洋)대학에 유학 중이던 텅구는 나이토 코난의 직속 제자인 이세 센이치로(伊勢專一郞, 1891-1948)의 중국 미술 관련 논저를 읽고 유사한 글을 쓴 바 있다. 텅구가 나이토 코난의 이론을 접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므로 이들의 이론과 일본 문단의 소식 열기는 텅구의 소식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을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문인화의 위상이 계속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1900년 전후에는 한중일 모두에서 고루한 문화로 비판 대상이 되었고, 1920년-1930년대에는 맹목적 서구화에 대한 회의로 전통문화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문인화 열기는 다이쇼시기(1912-1926) 일본에서 먼저 태동되었는데, 제국주의의 팽창적 문화정책, 1등국 대열에 진입하고자 하는 의욕, 서구의 모방 → 서구와의 대립으로 변화된 방향성. 일본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지, 이러한 것들이 배경이 되어 일본의 문인화, 남화 열기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남화에 내포된 기운생동의 원리와 서구 모더니즘의 주관성이 동일하다고 까지 주장하면서 문인화에 ‘근대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부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서구의 미술에 필적할 분야로 재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동아시아를 문인화를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 군국주의적 침탈의 정당성 마련 의도도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붕괴되면서 궁정내부와 고미술품이 대거 유출될 때 상당수가 일본으로 유입됐고, 여기에는 일본에 소개되지 않았던 명청시기 명작들이 다량 포함된다. 명청대 문인화 관심이 고조될 또 하나의 환경이 형성된 것이다. 

동시기 중국에서도 문인화 재평가 분위기가 있었는데, 급격한 서구화로 인한 변화가 전통 회귀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면이 있다. 물론 일본의 문인화 열기도 한몫을 했다. 1921년 전통파 회화사단 ‘중국화학연구회’가 베이징에 설립된다. 


텅구의 문인화론

텅구의 미술사 저서 『중국미술소사』(1925)는 서구에서 도입한 사회진화론에 의거해 집필한 것으로 서구 학술 체계를 중국미술사에 접목시키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텅구는 평생 남북종론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남종화와 북종화의 대립관계를 중국회화사 발전의 축으로 보았다. 그는 동기창을 종파론자로 규정, 기존 ‘원체화(院體畵)’ ‘문인화’ 용어를 ‘관각화(館閣畵)’ ‘고답화(高踏畵)’로 대체할 것을 주장했다. ‘문인’, ‘화원’ 등의 용어에서 우열관계 이미지를 지양해야 정당한 평가가 이뤄진다는 것이다. 문인화, 원체화 모두 중국회화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의 논고 「미술평론가로서의 소동파Su Tung P’o als Kunstkritiker」가 실린 『동아시아誌(Ostasiatische Zeitschrift)』(1932)는 유럽 최초의 동아시아미술 전문지였는데 발행인이 텅구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오토 큄멜이었다. 저자가 짚은 이 글의 독자성은 다음과 같다.
 
1. 소식의 이론을 설명하면서 ‘감정이입(感情移入, Einfuhlung)’이라는 근대의 학술 개념을 사용
2. 소식에게 ‘미술평론가’라는 새로운 정체성 부여
3. 소식의 예술관의 시대적 의의를 ‘예술을 예술 자체로 본 관점’이라고 규정

동시아시 근대기 학술은 서구화를 추구했으니 서구의 독자들에게 중국 문화와 그 대표 이론가인 소식을 그들의 키워드로 해석하여 제시한 것이다. 텅구는 중국에는 ‘사인화와 직업화 두 가지 회화가 있으며’ 그 구분은 화가의 사회적 지위와 작품의 풍격에 있다고 설명했다. 널리 알려진 소식의 문장들을 인용했다. 

예를 들어 오도자와 왕유를 비교하며 ‘오도자의 그림이 절묘하기는 하지만 뛰어난 화공에 지나지 않는다. 마힐(왕유)은 형상 밖의 것도 체득하여 새장에서 벗어난 범속을 초월한 새와 같다. 내가 본 두 사람의 그림은 모두 신묘하고 걸출한데 왕유에 대해서는 옷매무새 가다듬고 할 말을 잊는다.’ 등으로 소식의 시각을 전달했다. 

소식이 왕유를 높이 친 이유는 그가 시인이라고 생각해서다. 시와 회화의 기본 원소를 ‘추동력(Schwung)’으로 보고 문인화가만이 대상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으며 시인화가만이 진정한 화가라고 주장했다. 왕유는 당대보다 소식 이후 최고의 존숭을 받았다고 설명했는데 이런 식의 해석은 텅구가 최초다. 한편 텅구는 “진정한 예술가는 자연의 일부이며 소식이 그러하다”고 생각했으나 사실상 북송 문인들의 문인화에 대한 생각은 ‘자연과의 합일’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자는 텅구의 분석이 문인화의 핵심 개념을 장자의 ‘무위’와 동일시한 면임을 지적했다. 또 텅구는 ‘미술비평’ ‘감정이입’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소식을 ‘이론가’ ‘화가’가 아니라 ‘미술비평가’로 규정한 것에는 서구 학술의 시스템에 중국 전통을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았다. 

텅구는 유학시기 감정이입설-기운생동론 등을 공부하면서 소식을 ‘감정이입을 통한 미술비평’이라는 개념을 구현했던 인물로 파악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술비평 분야가 서구보다 훨씬 이른 북송대에 싹튼 셈이 되며, 대표 이론가가 소식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더해 텅구는 소식이 교육, 선전 등의 의도 외에 회화를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 예술의 지위를 제고시켰다고도 주장했다. 이는 텅구가 심취했던 유미주의 예술관과도 관련이 있다. 텅구의 관심은 소식의 문인화 이론보다는 문학과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한 미감(美感)에 있었다. 텅구는 작가의 내적 요구에 의한 창작과 유미적이고 낭만적인 천재성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여기에서의 작가의 내적 요구와 천재성은 곧 문인화의 기본 조건과 상통하며 이는 텅구의 소식 해석에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종합하면, 텅구는 동시기 범세계적인 사조였던 감정이입설, 미술비평의 개념, 유미주의적 관점을 적용하여 소식의 회화관을 해석한 것이며 텅구의 집필 의도는 소식의 회화관과 중국회회사를 ‘현대적이며 보편적인 미술사 이론’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서구 독자들을 위한 글이니 서구인들에게 중국 회화/중국 문화의 독자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다분히 문화민족주의적 관점으로 쓰여진 글이다. 여기에는 전통의 수호와 서구화의 추진이라는 근대기 동아시아 지식인의 양가적(兩價的) 가치관이 드러난다. 

SmartK C.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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