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관식, 「용주사 <삼세불회도> 연구의 연대 추정과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해석의 검토」, 『미술자료』97, 국립중앙박물관, 2020.06, pp.14-54.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명복을 빌고자 세운 화성 용주사. 이곳에 있는 420x350cm의 대형 불화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는 색감과 완성도, 그리고 서양식 명암법의 적극적 도입으로 더욱 특별해 보인다.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명복을 빌고자 세운 화성 용주사. 이곳에 있는 420x350cm의 대형 불화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는 색감과 완성도, 그리고 서양식 명암법의 적극적 도입으로 더욱 특별해 보인다.
김홍도, 이명기, 김득신, 상겸(尙謙) 등, 화성 용주사龍珠寺 대웅보전 <삼세불회도三世佛會圖> 1790년, 비단에 채색, 420x350cm
그간 논쟁이 있었던 것은 유례없는 서양화법이 구사되어 양식 해석을 놓고 견해가 엇갈렸기 때문이다. 누가 언제 그렸는지에 대한 주장을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790년에 김홍도가 그렸다 - 최순우, 이동주, 최완수 등
2. 1790년에 화승들(민관, 상겸, 성윤 등)이 그렸다 - 문복선(동대 사학과 석사 논문) 홍윤식(한국불화의 연구) 외
3. 1790년 김홍도, 이명기 등 화원과 화승들(경옥, 연홍, 설순)이 공동 제작했다 - 오주석(미술자료 55호, 1995)
4. 1790년 화승들이 그린 후 20세기 초에 화승이 덧칠했다 - 강영철(동대 미사과 석사논문, 2000)
5. 20세기 초 화승이 새로 그렸다 - 김경섭(동대 미사과 석사논문, 1996)
2019년 말 강관식 교수는 1790년 단원 김홍도(1745~?) 등의 도화서 화원들이 주도해 (화승들과 함께) 그린 궁중회화의 결과물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해 눈길을 끈 바 있다. 당시 논문의 결론에서 축원문 해석, 양식 분석, 작가 비정, 문헌 기록의 종합적 분석과 판단을 가지고 모든 드러난 사항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해석의 완결을 보이겠다고 했었는데,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 논문집 『미술자료』97호에서 이를 자세히 풀어놓았다.
이 논문에 앞서 발표된(미술자료 96호) 논문의 주장의 주요 부분만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존 <삼세불회도>에는 그림의 수미단 중앙에 붉은 바탕의 축원문 “主上殿下壽萬歲, 慈宮邸下壽萬歲, 王妃殿下壽萬歲, 世子邸下壽萬歲”이 큼지막하게 쓰여져 있다. 이 그림이 1790년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서 가장 주된 근거가 되는 것은 1790년 용주사 창건 당시 순조가 '원자' 신분으로 아직 세자가 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축원문에 쓰여 있는 '세자저하'라는 말이 맞지 않는다는 것인데, 강관식 교수는 논문에서 '주상전하, 왕비전하, 세자저하'의 삼전 축원은 당시의 의례적인 축원문임을 지적했다. (18세기와 19세기 후반의 축원문 양식도 리스트업 해서 차이가 있음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축원문이 처음에는 '주상전하, 왕비전하, 세자저하'의 만세를 비는 것이었다가 주상과 왕비 사이 두 번째 자리에 '자궁저하'를 추가해 고쳐 놓은 것이 현재 확인된 상태다. 이 '자궁'은 정조임금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가리킨다. 이것은 정조 때의 특별한 왕실 전례이므로 이후에 그려졌다면 이렇게 수정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싣고 있다. 의례적인 삼존 축원문을 지우고 '자궁'이라는 특별한 존호를 넣어 개서하는 이례적인 일은 정조가 현륭원과 용주사가 준공된 뒤 처음 돌아보고 오는 길에 친견했던 1791년 1월에 정조의 지시로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중앙의 축원문 부분
2020년의 논문에서는 도상과 양식분석을 통한 연대 추정과 작가 비정, 문헌 기록의 해석을 통한 작가 비정을 그 내용으로 한다.
먼저 18세기 중후반 이러한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배경에 대해 차곡차곡 자료를 제시하는데, 한 폭 짜리 삼세불회도 스타일의 유행 양상, 당시 궁중화원들이 투시법적 원근법, 음영식 명암법, 흰색 하이라이트 기법 등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등을 살펴본다.
알려진 조선불화 가운데 이 두 그림에만 보이는 타원형 天衣 고리. 상겸이라는 화승이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1911년 촬영된 용주사 삼세불회도 사진. 1920년대에 하이라이트가 추가되었다는 주장과 달리 하이라이트 부분이 확인된다.
축원문에 ‘세자저하’라고 되어 있다는 것 등을 근거로 20세기에 다시 그려졌거나 새로 그려졌다는 주장은 증거의 선택 발췌로 인한 오류 실증성과 논리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다시금 짚었다. 즉 삼세불회도의 축원문은 당시 세자 책봉을 받지 않은 원자만 있는 시기였지만, 당시의 관습대로 의례적인 3단 축원문(주상, 왕비, 세자의 수만세를 비는 내용)을 썼다가 이를 지우고 ‘자궁저하’를 넣은 특별한 내용과 예외적 순서를 보았을 때 이는 정조가 현릉원에서 돌아오던 1791년 용주사에 들렀을 때 자궁저하의 축원문을 써 넣으라고 지시했다고 가정하면 모든 상황이 설명되며 현존 삼세불회도는 1790년 원본 진작임을 말해주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삼세불회도의 형식, 도상, 양식, 화법, 미감 등을 18-19세기 불화 양식, 궁중화원 양식과 비교분석했을 때, 이 그림은 1790년 전후에만 나타났던 궁중화원의 양식 특징을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18세기 전반까지는 종교에서의 위상에 따라 존상의 크기가 결정되고 구성도 古式 원근법에 따라 평면적 조형을 보이지만 삼세불회도는 투시법적 원근법으로 구축된 공간 속에 존상들을 체계적으로 배치, 서양화 음영식 명암법을 적극 구사하여 흰색 하이라이트와 그림자도 표현했다.
저자는 원근법과 명암법이 구상-초본제작-설채 전 과정에 걸쳐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어서 사전계획된 이 그림의 조형적 본질이라 볼 수 있고 후대에 개체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보았다. 특히 흰색 하이라이트의 경우 다른 곳(홍련)에 칠해진 흰색이 같은 안료인 것으로 보아 명암법을 위해 후대에 하이라이트가 칠해진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명기 <강세황 초상>의 하부 그림자 부분. 1783년.
높은 화격에 창의적 스타일의 융합, 조선후기 회화사에서 볼 때 김홍도나 이명기, 김득신 같은 정조대 궁중화원 실력이 아니면 이룩하기 어렵다고 본 것은 살짝 논외로 하더라도 최대한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용주사에 전해져 온 기록 등을 토대로 용주사 주지가 정리한 『용주사사적』에는 김홍도가 <삼세불회도>를 그렸다고 되어 있고, 조정 공식 기록인 『일성록』과 『수원부지령등록』에는 김홍도, 이명기, 김득신이 감동(監董, 감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으레 화승들이 그려왔던 불화를 관원인 화원에게 그리게 하는 것이 부당하여 정치적 부담을 피하기 위해 감동으로 발령 후, 실제로 그림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기록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내관 출신으로 정조의 수족이었던 황덕순의 기록에는 화승 25명이 그렸다고 형식적으로 쓰여 있어 기록 자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영정조대의 어진 도사 과정에서 감동으로 불러들였던 조영석, 강세황 등도 국왕이 직접 그릴 것을 명령했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감동은 언제든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던 직책이다. 문인화가도 그랬으니 궁중화원은 더했을 것이다. 김홍도가 <삼세여래체탱>을 그렸다는 용주사사적의 기록, 김홍도 등이 ‘감동했다’는 일성록이나 수원부지령등록의 기록, 화승 25명이 그린 것이라는 황덕순의 기록은 모두 모순되기만 한 것은 아니고, 각각의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 기록이라는 것이다. 진실은 무엇일지 잘 모르겠으나 최대한 실증적 근거와 논리에 부합되는 설명을 하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