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호, 「변방의 미술: 엘리자베스 키스의 동양 그리기」, 『미술사학』 Vol.40,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0.08, pp.193-217.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8-1956)는 한중일 3국의 풍속을 180여 점의 판화와 수채화 작품으로 남겼는데 영국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보다 한국에서 훨씬 인지도-인기가 높으며, 심도 있는 연구도 국내에서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국내의 키스 관련 연구는 1차 사료 발굴 노력이 부족하고 불확실한 사실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또 기존 연구에서는 그녀를 객관적, 비판적 시선으로 다루기보다는 동양의 나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식의 위인전류의 해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저자는 논문을 통해 기존 국내의 엘리자베스 키스 연구의 문제점을 극복하여 향후 관련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20세기 전반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의 접촉지구에서 활동했던 한 미술가를 비판적으로 재조명, 동서양 미술사의 접점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기존 미술사 연구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미출간된 편지 및 당대 신문이나 잡지 기사 등 직접 발굴한 1차 사료를 중심으로 기존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논의되지 않았던 키스의 삶과 작품세계를 고찰하고 이를 좀 더 비판적인 관점으로 서술했다.
야나기 무네요시와의 관계
우선 키스의 형부와 친하게 지냈던 야나기 무네요시와 그녀가 알고 지냈을 가능성을 짚었다. 키스는 일본 체류기간은 물론 영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언니와 형부 스코트 부부와 함께 살았다. 영국을 사랑했던 야나기 무네요시는 언론인 스코트와 친하게 지내며 꾸준히 서신왕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방문시에 스코트의 집에 머무를 정도였으며 영어도 유창했으므로 형부의 집에 머물렀던 엘리자베스 키스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을 가능성이 크다.
키스가 1937년 영국으로 귀국한 후의 한 편지에는 자신이 조선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까지 찾아가 조선의 민화를 수집했으며, 그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어 영국박물관 동양미술 담당 학예사 등 여러 사람에게 질문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소장품 구입을 위해 조선을 방문한 시기와 키스의 조선 방문 시기 등을 고려해 볼 때,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민화를 어렵게 구하게 된 내력에는 민예운동의 창시자인 야나기의 영향이 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일본 신판화로 성공하다
키스는 영국에서는 정규 미술학교를 다니지 않은, 기본적으로는 아마추어 미술가였다. 오히려 일본에서 영국 화가인 바틀렛을 만나 교육을 받았다. 키스는 형부가 간행하는 주간지 『새로운 동양』에 삽화를 싣는 작업을 통해 작가로 등단하며 1917년 가을 도쿄에서 외교관이나 고관의 커리커쳐를 그린 작품들로 최초의 단독 전시회를 개최한다. 작품의 제작이나 전시에 형부의 도움이 큰 것은 당연했다. 키스나 스코트는 영국에서 최상류층이 아니었으나 일본에서는 일본 최상류층과 교류하는 프리미엄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자신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녀가 성공적인 화가로 발돋움하게 된 데는 1920년 도쿄 미츠코시 백화점의 수채화 전시에 왔던 와타나베 쇼자부로渡辺 庄三郎의 권유로 판화 작업을 시작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키스는 이듬해인 1921년 6월 도쿄에서 조선의 풍물을 소재로 한 첫 판화 전시회를 열었다. 키스가 판화가로서 성공을 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한 와타나베는 요코하마의 한 골동품상에서 11살의 어린 나이에 점원으로 일을 시작해 25세에 도쿄에 자신의 판화 판매점을 연 입지전적 인물이다. 우키요에를 베껴 출간해내던 기존의 판화상들과 달리 와타나베는 새로운 소재와 주제를 담은 판화를 제작다. 그는 이러한 판화를 ‘신판화(新版画)’라고 직접 명명하기도 했다. 와타나베는 새로운 판화 주제 발굴을 위해 일본인 작가들 뿐 아니라 일본에 머무르는 서양인 작가들도 정력적으로 섭외했고, 키스의 스승 바틀렛도 그들 중 하나였다.
신판화의 제작 과정은 1) 출판업자가 화가를 섭외하여 작품 디자인을 의뢰하고 2) 판각가가 주어진 디자인을 목판으로 깎고 3) 인쇄가가 목판에 채색하여 판화를 찍어내는 전통적인 일본 판화의 분업 방식으로 제작된다. 작가 한 사람이 모든 단계를 진행하는 서양의 판화와는 거리가 먼데, 1920년대에 제작된 키스의 채색목판화는 모두 이러한 분업시스템의 산물이다.
동아시아를 소재로 한 키스의 판화는 크게 인기를 끌어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각국에서 단독 전시회를 개최했다. 동아시아를 소재로 한 그 작품들의 주 고객은 서양인들이었고 런던뿐만 아니라 중소도시에서도 키스의 판화가 판매되고 있었다. 여기서 연구자는 키스 생존시의 작품 판매 가격을 조사해 당시 키스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키스가 그의 후원자인 워너에게 보낸 편지에 시기와 상황에 따라 작품가가 유동적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목판화인 <홍콩의 꽃거리 (Flower Street, Hong Kong)>의 경우 1938년에는 미화 25불이었고 2차세계대전 와중에 수요가 급감하여 1944년 ‘모든 작품의 가격을 낮추었다’고 적혀 있다. 전후 1946년 자신의 동판화(etching) 가격을 작은 것은 25불, 큰 작품은 35불로 책정했다.
키스의 판화가 1920-30년대 서구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의 보도에서는 서구인들의 동아시아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키스의 사실적 판화가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키스의 모든 작품은 예외없이 전통적인 동양적 측면만을 조명하고 강조한다. 서구화된 도쿄나 상하이같은 동아시아 대도시 생활상은 한 번도 그린 적이 없다는 사실은 키스의 주제 선택이 작위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상업적인 전략이 필요하므로 이는 필연적이며, 다양한 양식과 기법 등에 관한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키스의 작가적 한계이기도 했다고 보았다. 키스는 현대미술에 대해 다분히 적대적이어서, “끔직한 현대 잡동사니가 뜨고 있다(the dreadful modern stuff takes the floor)”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접촉지구'의 화가 키스
동양 목판화를 매체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키스 본인은 자신의 작품이 현대 일본 작가와 다르며, 동양 주제에 대해 서양식 접근(Western approach to Eastern subjects)을 하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에서 인기가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 이는 키스의 판화에 대해 ‘기법은 일본식일지라도 주제를 착상하고 이에 접근하는 방식, 장소와 장면 그리고 시간대를 통해 전체 분위기를 연출하는 방식은 키스만의 독창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한 영국의 비평가 브뢰흐너(Brochner)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유리한 평가를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을 설명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키스의 이미지 홍보를 잘 보여주는 한 사진을 예로 들었다. 1930년 『재팬 타임즈The Japan Times』에 실린 사진으로, 저명한 일본 작가인 요시다 히로시(吉田博, 1876-1950)의 지도하에 키스가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요시다 히로시는 서양화가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다가 1920년 44세의 나이에 와타나베의 권유로 목판화에 입문했다. 미국, 유럽, 아프리카의 풍경을 담은 목판화를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30년 당시 서구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 목판화가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저자는 카메라를 바라보는 키스의 시선에서 작위적 연출임을 알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사진 속 인물의 모습과 주변에 놓인 도구들을 보았을 때 이 장면은 기사에 쓰여진 것과는 달리 히로시에게 지도받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오히려 이 사진이 동양과 서양의 미묘한 만남의 장인 ‘접촉지구(contact zone)’를 절묘하게 포착해 내고 있다고 해석한다. 접촉지구라는 개념은 비교문학자 프래트(Mary Pratt)가 1992년 저서 『제국의 눈(Imperial Eyes)』에서 사용한 것으로, 예전에는 지리와 역사적으로 분리되었던 주체들이 공존하며 서로의 궤적이 마주치는 시공간을 말한다. 18세기 이후 근대 유럽인들이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와 같은 비유럽 지역을 방문하면서 쓴 여행기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프래트가 창안한 핵심개념이다.
연구자가 접촉지구라는 문학에서의 분석틀을 사용한 이유는 키스의 판화도 기본적으로 그가 동아시아 여러 지역을 여행한 과정과 결과를 담은 ‘시각적 여행기’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절정의 시대에 활동한 제국주의 본산 영국 출신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프래트가 창안한 개념 중에 ‘반정복(anti-conquest)’과 ‘자율민족지(autoethnography)’도 분석에 살짝 사용한다. ‘반정복’이란 유럽의 부르주와 주체들이 헤게모니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수동적 ‘관찰자(seeing-man)’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폭력과는 거리가 먼 순진함을 가장하는 재현 전략을 일컫는다. ‘자율민족지’는 피식민 지역인들이 식민지배자의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들을 표현하는 사례를 통칭하는 말이다. 키스의 작업도 이러한 개념 틀을 이용해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에는 관심도 없었고 정규 미술교육도 받지 않은 키스가 동양에 와서 동양의 매체로 동양 주제를 사실주의적 화풍으로 재현하고, 15년 넘게 일본에 거주하면서도 일본어를 못했다는 사실은 수동적 관찰자의 입장을 택하는 반정복의 예이며, 동양의 매체인 채색목판화를 사용해 동양의 풍물을 그려낸 키스의 작업은 일종의 도치된 자율민족지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논거는 차후의 과제로 남겨두었다.
키스 연구의 방향
위대한 작가도 아니고 주류 화단에 속한 것도 아닌 키스와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미술사학의 관점에서는 중요치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는 근래 패러다임 변화의 시점에서 키스와 같은 주변인과 그의 작품은 새롭게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오리엔탈리즘이나 혼종성 등 기존의 널리 알려진 개념으로 분석하거나 여성주의(feminism)적 해석에도 적합한데, 당시 동양을 주 무대로 일본식 판화라는 매체를 사용하여 동양적 주제를 그렸던 백인 여성 작가들이 그 예가 될 수 있다(이들은 현지 작가 및 장인들과의 실질적인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했다). 여성, 동양, 판화는 모두 당시 일종의 변방적 존재였으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주변부적 요소의 결합이 일군의 동양 전문 백인 여성 판화가라는 새로운 문화권력을 탄생시켰다는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키스의 작품세계와 작업의 의미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기존 연구보다 더욱 학술적으로 엄정하고 비판적인 자세와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차 사료 발굴과 해석의 중요성, 공방이나 일본에서 제작된 신판화의 주제와 화풍에 대한 철저한 양식사 및 도상학적 탐구와 비교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일본미술사 등 동양미술사학자들의 협력과 공동작업이 필요하며 이는 향후 국내 서양미술사학과 동양미술사학의 교류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무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