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전시 말미에 커다란 병풍 한 점이 최초 공개됐다. 이 그림, 조중묵의 <인왕선영도>(덕수 5520)는 1868년 박경빈(朴景彬)이라는 사람의 주문으로 제작되어 박물관에 낱장으로 보관되고 있다가 병풍으로 복원한 뒤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서대문구 홍제동과 홍은동에 걸쳐 있는 인왕산 서쪽 실제 모습을 중심으로 묘사한 그림이어서 ‘인왕산’, ‘삼각산’, ‘대남문’ 등의 지명이 그림 상에 표기되어 있다. 연구자는 현장 답사를 통해 실제와 이미지를 비교했다. 화가가 그림에서 각각의 경물을 과장하거나 생략했음을 확인했고, 실제 보여지는 모습을 표현하기보다는 수평 화면에 나열식으로 조합했음을 밝혔다.
그림을 그린 조중묵은 화원으로 활동했으며 어진화사에 참여할 정도로 초상화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의 조부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송석원시사에 참여하고 김정희와도 교유한 여항문인이었고, 손자인 조중묵도 이에 다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았다. 그는 필치가 섬약한 남종화풍 정형산수를 많이 남겼다.
이 그림에서는 양식적으로 여러 차례 먹을 겹쳐 칠해 입체적 느낌을 내는 적묵법을 많이 사용했다. 저자는 청대 사왕파 화풍과 해상화파의 기법을 모두 수용하는 19세기 후반의 도화서 분위기가 이 그림 <인왕선영도> 세부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림상 가옥은 화보를 참조하여 그린 것들이 많고, 토파에 호초점을 찍어 표현했으며, 백색 안료를 두껍게 찍어 당분법撞粉法으로 나타낸 오얏꽃 등 당시의 장식적 화풍 구사 경향도 보인다.
정선 스타일의 실경 산수화 잔영도 감지할 수 있는데, 인왕산 범바위를 짙은 먹으로 쓸어내리듯 붓질한 것, 산세의 괴량감, 가로로 붓을 대어 단순하게 그린 소나무 등에서 정선 스타일을 따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인왕산을 실경산수의 제재로 삼은 이상 시간은 많이 흘렀어도 정선의 권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묵이 이 병풍 그림에서 남종화풍의 온화하고 서정적인 표현도, 실경을 과장하여 현장성을 극대화하는 정선의 효과도 충분히 성취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했다. ‘선영도’라는 형식과 조중묵 개인의 스타일이 서로 어울리지 않았던 것을 그 원인으로 보았다.
조중묵이 주문자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림으로 실현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홍선주(洪善疇)라는 사람이 쓴 발문을 자세히 검토하는 부분이 논문에 자세히 포함되었다. 1폭과 10폭에 적힌 발문은 총 844자.
발문 내용은 ① 무덤 주인공과 이장 경위, ② 무덤의 입지와 풍수, ③ 묘제와 신이한 응답 ④ 무덤 관리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협력, ⑤ 병풍 제작의 동기인 박경빈의 효성과 수묘 ⑥ 발문을 쓴 의의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중 ②번의 내용이 화면에 충실하게 재현된 것이다.
주문자 박경빈은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다”라고 하며 <인왕선영도>에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회화미 여부와 관계없이 무덤의 풍수지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은 부합했다.
“...하루는 경빈이 조중묵 군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청하였다. ‘떠나시면 뒤 좇을 수 없는 사람이 어버이라네. 나는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 효를 다해 봉양하기를 잘하지 못하여 負米之嘆에 저절로 마음이 상하네....그대가 아버님의 무덤을 병풍에 그려주시게. 먼 산과 가까운 물, 하나의 언덕과 하나의 골짜기에서 나무와 꽃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그려주시게나...’... ‘병풍을 펴놓고 보니 나의 아버님의 무덤이 마치 새롭게 단장한 것 같이 눈에 완연하네. 자나 깨나 그리워함에 황홀하기가 마치 경해謦欬(헛기침)를 직접 접하는 것 같고 어렴풋하기가 마치 아버님의 태도나 몸가짐을 눈으로 보는 것 같네. 돌아가신 분을 섬김에 생각을 극진히 하였다는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게 되었네.’ 나와 경빈은 대대로 집안끼리 서로 통하던 사이요,....”(발문 일부 발췌 해석)
선영도, 즉 무덤 그림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이곳이 풍수적으로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 그림의 발문과 화면의 내용을 대응시켜 표시해 보면, 발문에 없는 내용은 거의 그려지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회화적으로 양식적으로 부족하고 조화롭지 못한 부분이 생기더라도 제발문의 내용을 충실히 살린 구성이 잘 구현되어 주문자가 만족할 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림 형식과 성격에 대해 논하는 과정에서 ‘산도(山圖)’ 개념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고 있다. 조선 후기 무덤 조성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던 가운데, 무덤 풍수를 나타낸 지도인 ‘선영도’는 한 장소의 풍수 형국을 도해한 지도인 산도의 성격을 지니며 다소간 혼용되기도 한 듯하다. 연구자는 ‘산도’가 조선시대의 지리 인식과 시각형식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조선시대의 행정 지도 또한 화면 구성이 산도의 형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영도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아무래도 부모의 묘소를 자주 왕래하지 못할 경우 수묘(守墓)를 대신하는 것이다. 저자는 16-17세기 기록에서 발견한 예를 들어, 선조 묘역을 상징하는 족자를 집에 걸고 아침 저녁으로 추모하고 관리 부임 등으로 먼 길을 떠날 때도 용이하게 운반할 수 있어 족자 형태가 적합한 점을 지적했다. 첨배의 대상이 되었던 초상화와 유사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왕선영도>는 족자보다 제작과 취급에서 훨씬 까다로운 병풍 형식을 취했다.
박경빈이 제작과 관리에 소요되는 비용을 무릅쓰고 기존에 드물었던 병풍 형식의 선영도를 주문한 의도는 병풍이 뚜렷한 공시성(公示性)과 장식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높이 160cm, 너비 360cm가 넘는 인왕선영도는 한옥 실내공간에 평상시 놓기 어려우니, 의식에 다양하게 사용될 때 꺼내거나 평상시 대청마루 등 넓은 공간을 장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의례에 배설하거나 평상시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림 속 무덤의 모습이 너무 강조되어서는 곤란했을 것이다. 정작 무덤 부분은 솔숲에 가려진 것으로 그려졌다.
지도식 선영도이면서 다용도 병풍에 적용하기 위해 성묘하는 주인공과 무덤의 이미지는 단번에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하고, 짙은 먹으로 그린 인왕산, 담묵으로 그린 북한산 연봉, 당분법으로 그린 복사꽃이 먼저 시선을 붙잡도록 했다. 선영도를 실경산수로 그린 예인 정황(1735-1800)의 <양주송추도>에서는 성묘에 나선 주인공의 여정을 볼 수 있는데 박경빈은 조중묵에게 이러한 유형도 참조하도록 했을 것이다.
<인왕선영도>를 이한철(1808-1880)의 <석파정도>(1860년경) 병풍과 비교한 부분도 흥미롭다. 흥선대원군의 별서 석파정 일대 산수를 대화면에 포착한 이 연폭 병풍에도 원경에 북한산 연봉이 이어지고, 그 형세에서 느껴지는 권위가 왕통, 절대 권력을 연상하게끔 한다. <인왕선영도>와 <석파정도>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을 뿐만 아니라 조중묵과 이한철은 당시 함께 도화서에 근무하던 직장 동료였다. 이들은 기법과 구성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조중묵의 <인왕선영도>와 이한철의 <석파정도> 외에 이들과 유사한 작품은 전해지지 않으나, 두 그림은 1860년대 화원들이 창안하고 공유한 독특한 시각형식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풍수를 잘 표현하면서 첨배의 대상이 되기도 해야 하고, 장식적이고 과시적이면서도 그 핵심 내용은 숨겨야 했던 모순적인 그림 <인왕선영도>. 조선의 신분 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던 때, 이 박경빈이라는 미지의 인물은 상류 계층의 진입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써서 ‘효’라는 보수적인 가치를 무기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소심한 모습을 보여 선영의 모습은 가려진 애매한 그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