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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성시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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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태평성시도 연구」, 『미술사와 시각문화』, Vol.25, pp.184~219, 2020.05.

이 논문에서 다루는 그림 <태평성시도>는 8폭의 병풍에 펼쳐진 커다란 그림으로 1913년 이왕가박물관의 구입품이다.


작가미상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부분) 19세기초, 비단에 채색, 각 폭 113.6x49.1cm, 국립중앙박물관


많은 볼거리가 있는 그림인데도 오랫동안 전시되지 않고 박물관 수장고에 남아 있다가 2002년 박물관의 풍속화전에서 <풍속도> 병풍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전시되었다. 
<태평성시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림 속 '태(太)'자와 '평(平)'자, 그리고 다양한 상업 활동이 벌어지고 있는 성시(城市)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 그림을 상품 경제가 발달한 이상적 도시를 묘사한 것으로 이해한 경우가 많았다.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으로 제작시기를 추정하게 되는데, 연구자는 이 그림이 몇 가지 독특한 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우선 여성과 아이들이 유난히 많이 그려졌다는 것, 축제 분위기를 드러내는 듯 많은 등(燈)과 등간(燈竿)이 그려졌다는 점, 특히 동아시아 그림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노파의 모습을 묘사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에 연구자는 일상적 상황이 아닌 축제-등석, 등시-의 모습이지 도시경관이 주제가 아니라는 가설을 세우고, 그림 안에 특정 성격의 이상사회가 그려져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몇 가지 논거를 통해 끌어냈다. 

주장1. 당시의 특수한 시장 ‘등시(燈市)’의 정경을 그린 것이지 도시 경관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주장2. 그림에 특정 성격의 이상사회가 그려져 있다.







<태평성시도>는 소재, 내용에서 공통점이 있어, 조선 후기 상업적 도시 한양을 그린  <성시전도>의 일종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단지 인물 및 건물은 완전한 중국풍이다. 성시도이면서 화면 속 ‘태’와 ‘평’이라는 글자로 태평성시도로 구분해서 불린다. 
성시전도의 경우 정조 때 한양을 이상도시로 구현해 제작한 것으로, 문신들에게 ‘성시전도’라는 시제로 시를 짓게 하여 상업적 대도시로 변모한 한양을 문학과 회화에서 이상도시로 표현하도록 유도했었다. <성시전도>는 당시 왕실에서 여러 점이 제작됐고, 자비대령화원 시험 속화 부문의 주제로 8번이나 나와 단일 화제로는 가장 많이 출제됐다. 실제 그림은 전해지지 않고 대신 「성시전도시」나 「성시화기」의 감상기록에서 양상을 알 수 있다.

이들 성시전도와 태평성시도는 상업 활동이 매우 활발한 도시를 묘사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두 그림 모두 <청명상하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저자는 보고 있다. 명대 화가 구영(1494?~1552?)작 또는 전칭작 청명상하도 모사본이 17세기말-18세기초 조선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고, 성시전도시에 ‘청명상하도’ 언급이 많다는 점, 또 태평성시도에 구영 모사본과 중복되는 장면이 다수 출현한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보았다. 그러나 <성시전도> <청명상하도> 등은 특정 도시 경관과 연관이 있는 반면 <태평성시도>는 특정도시 추론 단서가 전혀 없다. 도시 경관을 묘사했다기보다는 상업 공간과 비일상의 축제 분위기로 가득하다는 가장 큰 차이가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로는 이 배경이 등시 풍속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으로, 중국에서 명절 전후로 일년에 한번 열리던 세시 관등(歲時 觀燈)의 국가적 행사, 상원 연등회와의 관련성을 지적했다. 조선은 사월초파일에 관등 행사를 열어 왔다. 연행록에 기록된 서양추천이라는 공연(붉은 기둥을 세우고 가로로 시렁을 걸치고 동자가 빙빙 도는 곡예), 씨름, 근두놀이 등 상원 연등회에서 볼 수 있는 행사의 모습을 그림 속에서 찾고, 그림 속 등간에 등을 다는 것이 조선만의 고유한 풍속이라는 점(이규경(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의 배경을 설명한다. 

세시 관등 풍속 ‘등시’를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대답으로, 등시가 태평성세의 표상으로 쓰였다는 점을 들기도 했다. 왕조의 공덕을 찬양하고 왕실의 번영을 송축하는 공연을 열고, 왕과 신하가 기악백희를 관람하며 시를 짓는 것으로 마무리한 고려시대 상원연등회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성시도> 5폭 하단에 “太” “平”자를 저자는 문자등(文字燈)으로 보았으며, 이는 조선 후기 세시풍속서에도 등장한다. 당시 쓰였던 문자등의 단어는 수복, 태평, 만세, 남산 등이 있었다. 

19세기가 되면 등시가 더욱 성대하게 열렸다는 사실이 유득공의 『경도잡지』, 홍석모의 『동국세시기』등에도 나오는데, 여기에는 관등에 쓰였던 다양한 등의 형태가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경도잡지에 12종, 동국세시기에는 17종 추가 총 29종의 등의 종류가 등장한다. 

그러나 <태평성시도>의 등시는 중국풍으로 그려졌으므로 조선의 등시를 표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건축이나 인물에서 조선식의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반면 전체적으로 중국풍에 중국의 문물과 풍습도 들어 있는데, 이는 단지 이상사회의 상징성을 전달할 뿐 특정 도시를 나타낸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필 중국풍으로 이상사회를 표현했을까에 대해 연구자는 19세기의 세시풍속 관련 저술을 근거로 당시 세시풍속의 연원을 중국에서 많이 찾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오히려 저술에서 중국과 조선을 분리해서 보려는 시각이 많았으며, 중국보다 주자학적 가치관이 잘 보존되어 있는 풍속을 들어 조선의 독자성과 우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 8폭 대병의 <태평성시도>는 왕실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기의 시대에 군주가 덕망을 지니고 있고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음을 설득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준천장면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왕실의 선정을 강조하는 목적의 준천 장면은 도시 주제의 동아시아 그림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SmartK C.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5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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