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정, 「조선후기 채색필사본 병풍 <곤여만국전도>와 <곤여전도>의 동물 삽화-지식과 도상의 전승과 변용」, 『미술사학연구』vol.303, 2019.09, pp.131~169.
중국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1602)를 모본으로 해서 조선에서 제작된 <곤여만국전도> 병풍(1708년 등)과, 역시 중국에서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가 만든 <곤여전도>(1674)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제작된 <곤여전도> 8폭 병풍(부산박물관 소장)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다. 명말 청초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계지도를 제작한 양상과 이들이 조선에 유입되어 조선 후기에 채색필사본 세계지도 병풍으로 제작되는 과정, 이미지의 변용 과정 등이 포함되었다. 이 세계지도 병풍들은 서양화풍으로 그려진 삽화를 포함하고 있다.
중국에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1602)를 모본으로 해서 조선에서 제작된 <곤여만국전도> 병풍(1708년 등)과, 역시 중국에서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3-1688)가 만든 <곤여전도>(1674)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제작된 <곤여전도> 8폭 병풍(부산박물관 소장)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다. 명말 청초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계지도를 제작한 양상과 이들이 조선에 유입되어 조선 후기에 채색필사본 세계지도 병풍으로 제작되는 과정, 이미지의 변용 과정 등이 포함되었다. 이 세계지도 병풍들은 서양화풍으로 그려진 삽화를 포함하고 있다.
마테오 리치의 북경판 <곤여만국전도>(교토대 소장)
1.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의 조선 전래와 모사본 제작
1708년 숙종의 어명으로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 <곤여만국전도> 병풍은 다양한 이국의 해양/육지 동물, 선박을 묘사한 그림이 들어 있는데 북경판 마테오리치의 원본 지도(1602년)에는 없는 것이다. 서울대소장본 8폭 병풍, 일제강점기의 흑백사진으로만 존재하는 구 봉선사 소장본 8폭 병풍, 오사카 남만문화관에 소장된 10폭 지도 석 점이 남아 있다.
저자는 숙종대에 만들어진 <곤여만국전도> 병풍이 무엇을 원본으로 해서 만들어졌는가를 탐색해 나간다. 병풍에 있는 최석정의 발문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서는 ‘서양인 탕약망(아담 샬)이 제작한 <건상곤여도>가 전해져 숙종이 모사해서 올리도록 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숙종대 <곤여만국전도>의 윤곽, 지도, 지명, 주기, 천문학 도설 등이 마테오 리치의 1602년 북경 1판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원본은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인 것으로 추정했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는 그가 1584년부터 1610년까지 중국에서 만든 10여 종의 세계지도 중 가장 널리 유포된 버전으로 세로 168cm 가로 372cm 대형 6폭 형태이다. 이 외에도 신종 황제에게 헌상하기 위해 제작한 1608년 본과 소현세자가 청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아담 샬의 세계지도가 원본일 가능성이 있다.
서울대박물관본은 1708년 8월에, 구 봉선사본과 남만문화관본은 그해 9월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행서체의 발문이 있는 서울대박물관본은 어람용이나 궁중보관용이 아닐 것이라고 보았다. 세 본 모두 17마리의 해상 동물, 8마리의 육상동물을 포함하였고, 명암법은 광원과 그림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부분적으로만 사용됐다. 정보의 정확도, 묘사 등이 서울대박물관본보다 봉선사 본이 훨씬 완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봉선사는 조선 왕실의 원찰로 봉은사 다음의 거대 사찰이었으므로 연구자는 왕실과 친밀한 관계 덕분에 봉선사로 <곤여만국전도>가 이전된 것으로 추정했다. 1950년대까지 보관한 기록이 있으나 한국전쟁중 소실됐다.
남만문화관본은 <신구법천문도>와 함께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신구법천문도>는 새롭게 유입된 서구식 천문도와 전통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나란히 함께 그린 것인데, 전세계적으로 넉점이 전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의 제작 시기 기록으로 미루어 남만문화관본은 1766년 이후 이모된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봉선사 본 <곤여만국전도>
그렇다면 어람용(봉선사) <곤여만국전도>의 실제 도화에 참여했던 화가는 누구일까? 기존 연구에서 김진여(1675-1760)를 제시한 바 있으나 저자는 근거 부족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1713부터 왕실 관련 도화활동 기록이 있는데, 곤여만국전도가 제작된 1708년에 관상감에서 근무한 기록은 없다. 당시 관상감에는 정선, 강희언, 강이오 등이 있었다. 이밖에 18세기 전반기의 화원화가 중 기법적으로 서양화법을 시도한 이들로는 김진여 외에 진재해, 장득만, 장계만, 양기성 등이 있었고 병풍의 규모나 묘사필치의 차이 등으로 보아 한 명 이상의 화원이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의 모사와 동물 삽화
강희제 신임으로 청에 봉직했던 선교사 페르비스트는 <곤여전도>를 그렸고(1674년) 이 곤여전도가 조선 후기에 널리 알려졌다. 18세기에 그려진 조선의 <곤여전도>가 서울대도서관,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후대의 모본이 국립중앙박물관, 기메동양박물관, 게티미술관에 전해지고 있다. 17세기 유럽 선교사의 세계지리에 관한 지식 축적의 성과가 반영된, 동서교류의 대표적 산물이다.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호주와 미지의 남방대륙에 다수의 동물들이 그려져 있고, 선박과 해양동물들이 대양의 곳곳에 배치되었다. 18세기 곤여전도(부산박물관 소장)는 세계 유일 필사본으로 남았다. 1672년 페르비스트가 간행한 『곤여도설』의 내용을 따라 설명과 동물 이미지를 넣은 것이다. 페르비스트의 초간본 곤여전도는 연행사로 북경에 다녀온 유척기(1691-1767)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홍대용이 강희 갑인년의 곤여전도 8첩을 소장하고 있다는 언급(1776 황윤석), 이익(1681-1763)이 중국 지리를 보기 위해 곤여전도를 열람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페르비스트 <곤여전도>(1674)
3. 곤여만국전도와 곤여전도에 묘사된 동물 이미지
<곤여만국전도>에는 해양동물 17마리와 육상동물(상상동물 포함) 8마리가 그려졌고, <곤여전도>에는 육상동물 20마리, 인어 등의 가상존재를 포함한 해양동물 12마리가 그려져 있으며 서식지, 생태, 행동양상, 특징 등의 설명이 부기되었다.
저자는 사자, 악어, 코끼리 등의 도상이 어떤 자료를 참조한 것인지를 파악하고자 그 유사성과 명칭 등을 근거로 하여 백과사전류의 삽화 등 동서양의 자료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페르비스트는 동물을 시각화하거나 이름을 번역할 때 서양의 지식과 시선을 토대로 중국 전통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절충적 태도를 보였다. 상상 속의 동물도 마찬가지여서 큰 말의 형태에 머리에 뿔을 지닌 독각수는 도해의 설명은 ‘삼재도회’와 비슷하지만 시각적 표현 방식은 서양의 유니콘과 흡사하다.
부산박물관본 <곤여전도> 삽화는 <곤여만국전도>보다 서양의 원본에 가까워 보여, 서양 원본의 유입 이후 이미지가 수정된 듯한 모습도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곤여전도> 부분
4. 조선시대 병풍식 세계지도
조선 후기 제작된 필사본 채색지도에서 삽화나 천문학적 정보 등은 서양에서 유래한 자료에 상당히 충실하다. 동아시아적 변용은 여러 폭의 대형 병풍 형식으로 제작했다는 점이라고 들 수 있다. 병풍이 조선 후기 궁중에서 가장 선호했던 장황 형태인 때문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서양식 세계지도가 병풍, 족자, 책자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조선에서는 18, 19세기 뿐만 아니라 더 이른 시기에도 다폭의 병풍 형식으로 지도가 제작된 기록이 있다. 16세기 중반 명종의 명으로 제작된 <한양궁궐도병>(1590), <성천도>, <영흥도>, <의주도>, <영변도>(1562) 네 벌. <전주도>, <평양도> 등 주요 도시를 병풍으로 제작하여 감상하였고, 궐내에 보관하기도 했다.
병풍식 지도의 장점은 장식적 효과와 더불어 부감시로 다채로운 풍경을 하나의 화면에 담을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즉 정보 전달과 감상 기능에 용이한 형태이다. <곤여만국전도>와 <곤여전도>는 중국의 원도 자체가 다폭으로 제작되어 그대로 받아들인 측면이 있고 조선 후기 병풍 양식과 대형 채색 지도 제작의 관습이 더해졌다. 지리 정보와 천문 정보뿐만 아니라 이국의 진귀한 동물들, 함선의 모습이 들어 있는 이들 그림은 대형 병풍으로 제작되었을 때 장식적 효과가 극대화되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채색 필사본 세계지도는 문화지리적 정보를 상세한 주기로 표현한 전통적인 중국지도의 전통을 수용한 유럽식 지도이면서, 병풍 형식의 장황이 가지는 장식적 기능이 조선식으로 적용된 사례라고 정리할 수 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시선을 통해 재구성되어 중국인들에게 보다 익숙한 이미지로 재탄생된 이들 지리서나 세계지도들은 서구의 기법, 모티브가 중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의 시각적 변화를 보여주고 지식과 정보의 습합이라는 문화적 현상을 나타낸다. 저자는 이것이 다시 조선에 들어와 모사-번안될 때에도 유사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중국화된 서양화법이 또다른 형태로 변형된다는 것이다. 이는 제한된 접촉과 수 차례의 과정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진 조선시대 화가들의 문화적 생태와 조선 후기 궁중회화의 특수성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