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자오쉐李趙雪, 「근대 일본에 있어 ‘문인화’ 개념의 생성」, 미술사논단, Vol.46. 2018.
중국회화사의 근본 개념 중 하나인 ‘문인화’라는 것이 중국 고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근세 이래 일본에서의 개념이 근대를 거치며 재편된 것임을 밝히기 위한 논문이다.
중국회화사의 근본 개념 중 하나인 ‘문인화’라는 것이 중국 고래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근세 이래 일본에서의 개념이 근대를 거치며 재편된 것임을 밝히기 위한 논문이다.
중국에서 ‘문인지화(文人之畵)’라는 표현이 명대에 나타나긴 하지만 거의 보이지 않고, 주류는 ‘남종화’라는 용어였다. 근세 일본에는 ‘남종화’ 또는 그 약어인 ‘남화’와 ‘문인화’라는 용어가 혼용되다가 1910년대 중국 회화가 다량으로 유입되며 전환기를 맞는다. 교토에 이주한 청나라 뤼전위羅振玉가 방대한 컬렉션을 가지고 오고, 이때 유입된 중국회화를 가리켜 중국연구자 홍자이신洪在新은 남종화, 일본 연구자 마에다 다마키前田環는 ‘문인화’라는 용어를 적용한다. 1929년의 일본 논문에서는 ‘문인화는 일본에서 사용되는 용어이고 중국에서는 이를 사부화士夫畵라고 한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 용어였던 ‘문인화’가 현재 중국회화 연구에서 널리 사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10년대 교토에 들어온 중국회화에 대한 출판물들과 그 연구
교토에 중국서화를 가져온 러전위는 7년간 교토에서 지내면서 출판사 하쿠분도博文堂와 협력하여 다수의 중국미술서를 편집, 출판했다. 이중 1916년 대형화집 『화원주영남종의발畵苑珠英南宗依鉢』, 이의 해제라 할 수 있는 『남종의발발미南宗依鉢拔尾』에서 뤄전위는 남종화의 계보에 대해 서술하는데, 자신의 컬렉션을 반영, 동기창이 말한 남종화의 계보와는 조금 다르다. 뤄전위는 남종화의 구별 기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으나 나가오 우잔長尾雨山은 운필의 차이 즉, ‘피마준’과 ‘부벽준’이라는 준법의 차이로 남북종화를 구별하는데, 이러한 방법은 부벽준의 이곽파, 피마준의 동거파를 대비시킨 명청시기의 통념에서 온 것이다. 이를 단적으로 적용한 책이 하쿠분도의 『남화연원南畵淵源』(1928)『북화신전北畵薪傳』(1929)이다.
왕유王維 <강산설제도江山雪霽圖>
전 동원董源 <한림중정도寒林重汀圖> 구로카와黒川고문화연구소. 博文堂에서 구입.
근세 일본의 ‘문인화’와 명청의 남종화관은 다른 것
중국근대미술사에서 ‘문인화’를 비판한 논저로 언급되는 1910년대의 논문에서도 실제 ‘문인화’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1910년대 뿐아니라 1920년대의 논문에서도 ‘문인화’보다는 ‘남종’ ‘남화’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18세기 나카야마 고요(中山高陽 1717-1780)의 『화담계륵畵譚鷄肋』에서는 중국의 남북종론에 대해 ‘문인의 화법’을 언급하면서 ‘소인화(素人畵)’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문인화․소인화 ↔ 화사의 그림으로 남종대 북종의 구도를 해석한 경향이 있었다. 또 구와야먀 고쿠슈桑山玉洲의 화론 『회사비언繪事鄙言』(1799)에는 독자적 남화론을 펼치면서 동기창의 ‘문인지화’를 ‘문인화’라고 써서 형용어를 장르 용어로 전용했다. 동기창의 권위를 빌려 가노파나 도사파 등 어용화사들에게 대항하려는 의식과, 곽약허의 ‘기운생동’에서 시작된 정신론 편향 경향이 지적된다. 즉, 근세 일본의 ‘문인화’관은 명청의 남종화관과는 다른 것이었다.
근세에서 온 문인화 개념과 뤄전위가 가져온 남종화관의 충돌
페놀로사의 『중국과 일본예술의 시대: 동아시아 디자인사 개관』(1912)에서는 bunjinga라고 써서 그 유파를 비판하는데, 이미 장르용어로서 인식, 근세 일본의 문인화 개념을 이었으며 이를 ‘literary men's painting’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에서 일한 영국의 길스가 1905년 출판한 『중국회화사입문』에는 ‘문인지화’를 ‘painting by men of literary'라 하고 유파로서 기술하지 않았다.
근세에서 내려온 문인화 개념과 1910년대에 뤄전위가 새로 가져온 남종화 개념의 충돌이 일어난 이때부터 근대 일본의 미술사 연구자는 ‘남종화’ ‘문인화’라고 하는 2개 선택지 중 ‘문인화’를 중심으로 정합, 중국회화사를 재편한다. 이를 실천한 것은 중국인과 친교가 있었던 관서의 연구자가 아니라 도쿄의 연구자들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오무라 세이가이大村西崖와 다키 세이치瀧精一 등이다.
도쿄 연구자들의 '문인화' 개념의 종합
오무라 세이가이는 『문인화의 부흥』(1921)에서 문인화를 “문학에 식견을 갖춘 사람이 그린 그림을 이르는 것으로... 설령 시부에 속하지 않더라도 신분이 높고 많은 사람들의 위에 서는 사대부는 그 인격과 식견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르는 바 문인화는 유파 양식의 이름이 아니라 작자의 신분에 근거한 구별이 된다고 해야할 것이다”라고 표현하며 남종, 문인사부의 그림, 문인화를 동일선상에서 파악하고 있다. 남종화를 문인사부의 그림으로 북종화를 화공의 그림으로 하는 명확한 구분은 청조까지도 행해지지 않던 것으로 이러한 해석은 근세 일본의 문인화관을 계승한 것이다. 이듬해 출간한 책에서는 서언에서 ‘남종문인화’라는 용어를 써서 남종화와 문인화를 접목 조정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다키 세이치는 1921년 파리 미술사대회에서 문부성 대표로 “bunjingwa"라는 강연을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인화 개론』(1922)을 출판했다. 다키는 동기창 『용대집』에서 ‘문인지화’를 인용하여 문인화의 기원을 설명하면서도 남북종에 대한 것은 인용하지 않았다. 중국문인화의 계보를 구축함에 있어서도 대부분 동기창의 ‘문인지화’와 일치한다.
신해혁명 이후 1910년대에 일본에 유입된 남종화 및 남종화관의 충격은 근세 이래 혼용되어 온 ‘남종화’(남화) 및 ‘문인화’ 단어의 재규정을 촉발했다. 오무라 세이가이와 다키 세이치의 저서가 중국의 미술사연구자들에 의해 중국에 유입, 명청대 이래 사적 컬렉션을 바탕으로 논의됐던 중국회화의 계보가 ‘문인화’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재편, 재구축되는 효과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