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은 「19세기 궁중 서수도의 양상과 특징」『미술사학연구』Vol.292, 2016.12.
조선후기에 궁중회화가 꽃피우게 되면서 십장생, 모란 등 전통적 제재 뿐 아니라 요지연도, 곽분양행락도 등 중국 화제가 유입, 정착되면서 왕실과 민간에 길상화의 유행을 낳게 된다. 이 중에서도 19세기 궁중에서 사용된 상서로운 동물 그림, 서수도瑞獸圖의 의미와 확산과정을 살펴보는 논문이다.
조선후기에 궁중회화가 꽃피우게 되면서 십장생, 모란 등 전통적 제재 뿐 아니라 요지연도, 곽분양행락도 등 중국 화제가 유입, 정착되면서 왕실과 민간에 길상화의 유행을 낳게 된다. 이 중에서도 19세기 궁중에서 사용된 상서로운 동물 그림, 서수도瑞獸圖의 의미와 확산과정을 살펴보는 논문이다.
먼저 저자는 개인과 가족의 안녕과 복을 비는 ‘길상’ 이미지와 서수와 서조 등 하늘이 태평성대의 성군에게 내려준, 왕실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상서祥瑞’ 이미지의 차이를 언급한다. 좋은 임금이 나타나면 (그를 알리기 위해) 등장하는 아주 좋은 징조라는 것인데,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동중서(BC 176?-104)라는 사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1. 용, 봉황, 기린 등 전설의 동물
2. 흰 학, 흰 꿩, 거북 같은 신비한 조수
3. 연리목, 영지 등의 기이한 화초
4. 五彩雲氣, 甘露 등의 자연현상
5. 나무나 돌에 새겨진 신비한 문자
조선에서 상서는 특별히 국가적 사안으로 취급, 예조 소속 계제사稽制司에서 다루었으며, 이런 상서가 나타날 때마다 보고하고 찬양했다.
길상은 운수가 좋을 조짐,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로 이때 좋은 일이라 함은 장수, 부귀, 다남, 출세 등 현실적인 복이다. 오복은 오래 사는 것, 부유한 삶, 건강, 덕을 행하는 것, 천수를 누리다 편안히 죽는 것 등으로 칭한다. 길상은 점차 ‘복에 대한 조짐’보다는 ‘복에 대한 염원’을 위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복에 대한 바람을 사물에 의탁해 다양한 길상문과 길상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백록이나 거북처럼 상서의 의미와 겹치는 것도 있어 일부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수도가 궁중에서 19세기 들어 많이 그려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 증거로 순조 때부터 차비대령화원 녹취재 시험 화제로 꾸준히 서수가 출제되었다는 것을 들었다. 단일 화제로는 봉황(鳳凰鳴矣 于彼高岡)이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서수 화제가 19세기에 지속적으로 출제된 것을 당시 세도정치로 인한 왕권의 약화와 연관시켰다. 왕도정치가 실현되면 나타난다는 서수를 시각화하여 위축된 왕의 권위를 높이고 왕실을 美化시키고자 했던 시도라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키스 <궁중예복을 입은 공주>
궁중에서 장식화로 사용된 서수도는 주로 용, 봉황, 기린이다. 특히 용은 王孫을 의미하며, 왕실 가례 때 별궁과 내전에 사용된 용 병풍에서는 득남을 통해 왕실의 번창을 바라는 염원이 잘 드러난다. 현재 궁중 소용의 용 병풍은 전하지 않으나,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남긴 순정효황후 윤씨의 동생 윤희섭을 그린 그림에 뒤편에 용을 그린 병풍이 펼쳐져있다. 한 쌍의 봉황과 새끼 9마리를 그리는 <구추봉도>의 기록이 있다. 구추봉은 진나라 목제 때 봉황이 새끼 아홉 마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는 기록 이후 상서로 기능했으나 다산과 부부화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화제이기도 하다. 여러 마리의 새끼를 거느린 봉황은 왕손이 귀한 조선 후기 상황에서 상서 뿐 아니라 길상의 의미를 지니는 도상으로 적합했던 것이다. 기린도 유난히 새끼와 함께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봉황도> 19세기, 지본채색, 156.2×54.6㎝,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왕이 머무는 장소의 장엄에 사용된 서수로서의 용은 고려시대까지 올라간다.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을 고려의 왕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元史』에 남아 있다. 용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 달라졌으며 문양에 가까운 도식적인 성격을 띤다. 경복궁 사정전 어좌 뒷벽 벽화 형태의 <쌍룡도>는 명대의 “이룡희주” 도상과 유사하다. 용의 대신 일월오봉도를 써서 명에 대한 군신관계를 철저히 지킨 조선에서 이런 도상을 어소 장엄에 사용한 배경은 흥선대원군의 중건 때 제작되어 왕권과 자주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라고 파악할 수 있다.
<십장생도> 10폭 병풍, 비단에 채색, 210x552.3cm, 삼성미술관 리움
논문은 서수와 길상 도상이 길상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띄며 민간가례에 사용되며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백자도(백동자도)>가 <곽분양행락도>나 <한궁도>와 결합된 형태 등이 나타나고, <서수도> 또한 <장생도>와 결합되어 용, 봉황, 기린 외에도 오리, 공작, 난, 복숭아나무, 대나무, 오동나무, 모란, 연꽃, 바위, 폭포 등 수많은 동식물이 등장하는 삼성미술관의 <서수장생도> 병풍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는 <십장생도>와도 연관된다. 이것이 궁중화풍을 모방한 민화 등으로 민간에 퍼져나가게 되는데, 연꽃 위의 거북 도상의 갑작스런 등장 다수의 특정 도상이 민화로 번진 흐름과 연결되어 설명한다.
서수가 상서로운 징조, 왕권의 신성함을 강화하는 도상에서 왕실의 길상을 기원하는 도상으로, 민간에서 더 단순화되어 개인적인 복을 비는 도상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정리하며 몇몇 중요한 이미지를 제시했는데, 민화 확산 과정에서 더 많은 증거가 될 그림들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