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파랑, 「寫意 개념의 근대적 변모와 서구 추상미술의 수용」,『미술사논단』, 한국미술연구소, Vol.44(2017), pp. 35-58.
1950년대, 한국 동양화단에 나타난 추상화 경향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두 가지로 양분된다. 첫 번째는 서구미술의 수용, 두 번째는 동양화에 내재된 추상성 발현.
추상실험을 선도한 작가이자 이론가였던 안상철은 1974년 논문에서 전통적 동양화와 서구 미술의 추상 구상을 ‘추상=남화=사의’ ‘구상=북화=사실’로 대비시키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寫意가 동양화의 추상성을 나타내는 본질적 개념으로 제시되어, 수묵추상화가 현대적 문인화의 조형 양식으로 규명되는 것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저자는 이에서 더 나아가 한국 동양화단에 나타나는 추상성을 설명하는 데에 사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는지를 시대에 따라 파악하는 접근을 사용했다.
‘사의’와 서구 추상미술과 연계된 논의가 근대 한국화단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9년.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 논의는 동양화단이 아니라 심영섭, 김용준 등 동경 유학파 출신의 서양화가, 평론가의 글에서 이뤄졌다.
예를 들어 심영섭은 1929년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서양의 후기인상파 이후 미술이 자연 그대로를 묘사하는 대신 “개성과 내면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이를 ‘동양적 표현성’으로 파악한다. 사실 이렇게 단정짓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한, 자의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일본에서 1920년데 프랑스 유학파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동양주의’ ‘신일본주의’ 이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김용준 또한 마티스와 반 동겐의 선조(線條), 로랑생의 정서 등을 예로 들어 “서구의 예술이 이미 동양적 정신으로 돌아온다”고 주장했다(1930). 저자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남화에 대한 단선적 인식과 동양화에 대한 피상적 이해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당시 일본의 동양주의. 자국의 전통화 장르 “남화‘ ’림파‘ ’우키요에‘ 등을 서양 모더니즘 회화와 연계하여 각각 유사특성을 논의하여 자국 회화의 우수성을 강조했는데, 이것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
재미있는 것은 김용준은 후에 자신이 서양화를 공부할 당시에는 동양화를 다소 업신여겼다고 고백하고 1930년 무렵 동양화의 남화적 가치를 발견한 이후 ‘남화’를 동서고금 회화의 최고 정신을 담은, 계승해야 할 전통으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다음 시점은 1939년. 이때는 동양화단에서 서구의 추상과 동양의 표현원리를 연계시키는 내용이 나타난다. 중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영기가 동아일보에 연속 기고문을 통해 당시 중국 근현대 화단에 대해 소개하면서 서양 후기 인상주의의 근간과 청조 대가 石濤의 예술과 공통됨이 많다, 서구의 신예술이라고 하는 게 동양에선 300년 전에 개발된 것이다 등의 언급을 한다.
저자는 이 주장도 중국에서 자국의 문인화를 서구 모더니즘과 연계하는 접근이 당시 흔했음과 관련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를 주장했던 대표적인 중국의 화가겸 평론가 펑쯔카이豊子愷는 1920년대 일본 유학을 통해 일본 미술계의 논의들을 접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경로로는 미국 유학을 했던 텅 바이에. 그는 중국 미술을 영어로 번역하여 소개하는 저술 활동에 매진, 중국 회화 특히 문인화의 성격을 ‘암시적’이라고 규정하고, 사실적 재현에서 벗어나 있는 서구 모더니즘 운동과 동일한 선상에 위치시키는데 이 둘이 유사한 시각임을 알 수 있다.
김용준 <산수> 1944, 종이에 수묵담채, 32x22cm
김영기 <大富貴> 1936, 종이에 채묵, 70x135cm
제백석 <蝴蝶菊花> 1939, 종이에 채색, 97.5x34.5cm
김영기 <春陽> 1936, 종이에 채색, 135x51cm
김영기가 유학하던 푸런 대학의 독일인 교수 구스타브 액케 등은 제백석의 작품을 서구 바로크 미술과 연계하여 설명하기도 했다. 1936년 런던과 파리에서 출간된 조르주 뒤티(George Duthuit)의 『지나 신비주의와 모던 아트』에서는 서구 모더니즘 대표 작가와 중국 고전 회화와의 유사성을 나란히 비교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뒤티가 비교한 중국 10세기 중반의 <二祖調心圖>와 조르주 루오의 <판사들>
김영기는 청대 후기의 문인화를 강조하여, 청대 후기에 기교를 요하는 산수, 인물이 도외시되고 “묵취 있는 화훼, 화조화”에서 진가가 발휘되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오늘날 연구자들이 ‘사의’와 청조의 개성적 화가들을 연결하여 언급하는 것에는 김영기의 17편에 이르는 장문의 기고문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吳昌碩, <桃實圖>, 1920, 종이에 채색
김영기는 청말의 대표적 ‘사의적 문인화풍’으로 오창석의 파격을 주목, 이러한 표현 정신이 세잔이나 마티스보다 높다고 상찬했다. ‘물건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건의 정수를 붙잡는 것’이라고 말했던 세잔의 조형의식이 문인화의 조형원리와 공통되는 바가 많다고 적고 있다. 이런 논리에서 관건은, 조형 원리의 유사가 조형 형식의 유사를 내포하는가라고 볼 수 있다.
1930-40년대 한국 동양화단에서는 동양 전통을 당시 첨단으로 인식되던 서구 미술과 적어도 동등하거나 원류로서의 위치를 부각시켜 재인식 촉구를 의도로 추상화 경향을 설명했다고 본다. 그러나 사실 동양화단에서 사의적 남화 또는 문인화를 서구 추상미술과 연관시킬 만한 양식상의 변화는 확인되지 않는다.
40년대 동양화단은 산수 위주의 중국식 묵화, 거기서 파생되어 특색이 가미된 일본화(신남화) 두 가지로 대별될 뿐이다. 수묵화가로 변모한 김용준조차 전통적 형식 기법에 충실한 화훼, 화조, 산수화를 남겼을 뿐이었다.
서양화 기법이 절충된 일본화가 근대적 화풍으로 각광받던 시기, 김영기의 작품은 대륙의 전통적 양식에 준하고 있어서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 김영기가 40년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 <鄕家逸趣>는 오창석의 <草書遺意圖> 처럼 주관적 감흥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김영기 <鄕家逸趣> 1948 종이에 담채 171x90cm 국립현대미술관
오창석 <草書遺意圖> 1921 종이에 담채
이때의 ‘사의’ 개념으로는 산수나 인물은 기교적일 수밖에 없기에 자신의 기분을 드러내는 데 제한적이고, ‘화훼절지’가 적절하다고 여겼던 경향도 드러난다.
1950년대에 들어서 이응로는 “사의를 중심으로 현대 동향화를 개척한다”고 언급했다. 현대 동양화를 “반추상”으로 설명하고, 반추상을 “사생적인 이념을 약화한 미의 표현이되 거기 지적 의도를 암시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사의와 사생(寫生)을 일치시키는 다소 모호한 개념인데,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사생에 대한 가중치가 큰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이응로에게 있어 ‘사의’가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것과 짝을 이루는, 혹은 이를 초래하는 개념이므로 오늘날 이응로의 50년대 추상적 경향을 ‘전통 수묵화의 계승, 남화 본연의 사의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자의적 해석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보고 있다. 이응로는 서구의 사생을 근간으로 하는 현대적 동양화가로 자신을 재정립하고자 했으나, 본인이 지양한 ‘근대적 문인화’에서 파생된 ‘사의’개념으로 이 시기 자신의 조형적 단계를 재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동양화가로서 서구의 조형을 수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고민의 흔적의 결과물이 ‘반추상’. 이후 ‘사생’과 ‘사의’의 기로에서 추상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응노 <운중풍월> 종이에 수묵, 1955
서구 추상미술이 동양화단에 수용되는 50년대 이전에는 동양화 전통 장르와 양식 속에서 작가의 자유로운 흥취를 강조하는 선에서 ‘사의’ 또는 ‘추상적 경향’이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미 전통적 문인화 양식 안에서 내재적으로 구현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동양화단의 추상 양식에 접근할 때 ‘사의’에 의한 것으로 ‘내재적 발전양식’으로 뭉뚱그려 규정하는 것은 오류라고 지적한다. 개별 작가들의 조형적 추이과정을 면밀히 살펴 해석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