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계에서 전통적 소재를 수용, 계승한 시각물은 흔하지 않으며 심지어 전통과 현대를 대립구도와 갈등관계로 설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활용되고 있는 전통적 대상이 있으니 바로 ‘금강산’이다.
금강산은 시대에 따라 종교적 예배의 대상, 와유적 감상물, 복을 구하는 길상물, 사생적 풍경화 등 복합적인 기능물로 전개되어 왔다. 한국전쟁이후 금지구역이 되었다가 1998년 금강산 관광이 개방되면서 금강산도는 문화적 코드로 부각되었는데, 본 논문에서는 금강산 관관이후 제작된 작품을 ‘신금강산도’라 명명하고 다양한 갈래도 확장되는 시각화 현상을 설명했다.
1997년 금강산 관광이 성립되기 이전 중앙일보사 통일문화연구소가 북한문화유산조사단을 발족했고 황창배는 남한 화가 최초로 북한을 방문했다. 선화랑에서는 <황창배 북한 기행 작품전>을 열어 조사단의 보고나 다름없는 북한 여행의 기록물을 선보였다.
금강산 관광과 더불어 국가 기관을 비롯한 언론사, 사설 미술관에서도 금강산관련 행사 및 전시를 기획하기 시작했는데 우선 근대기에 금강산 그림을 가장 많이 남긴 변관식의‘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포문을 열었고 이후 여러 전시가 개최되어 금강산의 상징성과 조형적 특성을 회고하고, 관람객에게 금강산이 한국의 명산이자 민족 대화합의 아이콘임을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선, 진경의 차용과 극복
21세기의 현대작가들도 금강산 하면 정선을 떠올린다.정선의 숭앙과 함께 고려된 개념이 바로 진경이며 진경산수는 정선의 금강산도를 비롯한 조선후기 실경산수화의 대명사로 고착되어, 지금까지도 한국의 산천을 대상으로 한 수묵화의 한 장르로 알려졌다.
현대작가들은 주로 외금강의 명승지를 그렸는데, 북한이 개방한 관광코스가 외금강으로 한정되어 2007년 이전까지는 내금강의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선은 내금강만 화폭에담았을 뿐 외금강을 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작가들은 ‘금강산’과 ‘정선’을 같은 선상으로 이해하면서 정선의 내금강 풍경에서 목격되는 요소들을 익혀나갔다.
작가들의 ‘외금강 사생’에는 정선과 진경 이외에 대안이 필요했는데 그 해법 중 하나가 바로 변관식의 ‘외금강산도’이다. 한국전쟁 이후 성역에 대한 동경과 국토 분단으로 인한 민족애의 표상이 되었던 그의 외금강 그림은 후배 작가들에게 커다란 동기를 부여했는데 이를 입증하듯 현대의 외금강 그림에서는 변관식이 즐겨 사용한 적묵법이나 찰준이자주 목격된다.
정선의 현장성을 본받은 현대작가들은 명승명소뿐만 아니라 가까운 골짜기도 직접 방문하여 오감으로 산천을 느끼면서 한국의 산하를 충실하게 화폭에 옮겼다.
송영방, <雨後金剛>,2004년, 종이에 수묵담채
송영방은 실경을 스케치 하는 대표적인 사생작가로 정선의 금강산 그림에서 목격되는 암산과 토산의 결합과 소나무 숲의 재현을 계승했다. 전통적인 필묵법으로 자연경을 표현했지만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 볼 수없는 비온 뒤의 금강산인 雨後金剛을 표현했다. 이는 김은호가 1970년대에 그린 바 있는데 김은호의 작품에서 보다 금강산의 풍광을 좀 더 멀리서 조감한 후 전경에 송림을 사선으로 배치했다.
권기윤은 산천에 지필묵을 펼친 후 사실적 경치를 담아내고 명소의 이름까지 화폭에 기록했는데 외금강의 구룡폭포를 비롯하여 명승지의 폭포를 많이 그렸다. <외금강구룡폭>을 살펴보면 실경에 의거하되 정선의 박연폭포처럼 연못의 중앙과 폭포 너머의 산등성이를 동시에 포착한 다원시점을 사용했다.
이호신 <외금강옥류동>, 2000년, 종이에 수묵담채
이렇듯 금강산 관광이후 정선과 진경의 영향력 하에 변관식의 필묵법을 수용하여 독자적 화버을 구축한 신금강산도가 많이 제작되었는데 금강산의 상징성과 진경의 개념은 배제한 채 정선의 금강산 그림만 차용한 작품군도 등장했다.
형상의 해체와 추상화 경향
전종미는 정선 그림 일부만을 취했으며 황인기는 디지털 산수화 작업으로 표현했다. 또한 금강산의 독특한 형상화를 위해 여러 실험을 시도했는데 장우성은 서예적인 필묵법으로 금강산 봉우리를 수평 배열했으며 <금강산>에서는 채색을 완전히 배제한 채 갈필로 첨봉의 실루엣을 형상화 한 후 농묵으로 거리감을 조성했다. 이러한 신문인화적 금강산도는 추상화가로 알려진 정탁영에게 전승되었다.
장우성과 정탁영이 서예적 필법에 집중하여 문인산수를 제안했다면 문봉선, 김호득, 한진만은 풍부한 먹을 운용하여 상서로운 기운을 품은 영산을 창안해냈다.
한진만,<금강태>부분, 2008년
문봉선과 김호득은 唐末五代 일품화가들의 묵법처럼 간결하고 함축적이면서도 간결하고, 한진만의<금강태>는 춤추는 금강산이라 명명하는 등 명승명소가 아닌 한국 산천에서 보편적으로 감지되는 감성과 시각적 특성이 응집되어있다.
이종상, <원형상-구룡폭>, 1999년
또한 구상과 비구상을 초월한 평면 작업을 지속해 온 이종상은 금강산의 명승지를 기호화 해 작품명에 원형상(Ur-Figuration)이라는 용어를 붙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정선과 진경을 계승하되 지필묵을 버리고 색다른 매체로 금강산을 재해석한 작가군이 등장했는데, 안성복과 윤석남이다. 이들은 종이, 나무판, 우리구슬, 철사 등 다양한 재료와 마티에르를 복합하여 금강산 본연의 형상을 허물거나 입체화 했다.
기념비적 意境의 확립
현대작가들의 1차 목표는 금강산의 정확한 사생이며 신금강산도의 가장 큰 기능은 일반일들이 쉽게 방문할 수 없는 명승명소의 소개일 것이다. 압도하는 금강산을 시각화 하기위해 작가들은 먼저 큰 화면과 마주했는데 거대한 화면에 금강산을 재현한 작가로는 김선두, 박대성, 신장식이 있다.
김선두, <금강산만물상>,1999년, 장지에 채색
평생 한국의 산천을 재현해 온 박대성은 금강산도 제작을 계기로 창작경향이 전환되었는데 사실적 묘사방식을 탈피하고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형상을 떨쳐버린 작화 태도를 선택했다. <오견금강산도(吾見金剛山圖>는 동해에서 시작되어 장전항, 온정리, 삼선암, 괴면암, 만물상, 삼일포를 거쳐 해금강에 이르는 금강산 관광코스를 파노라마 사진처럼 수평으로 나열하고 춘하추동을 암시하는 꽃을 그려 사계절에 따른 절경의 변화도 암시했다. 구상과 비구상, 강조와 생략, 평원과 고원이 공존하는 산수화인 것이다.
신장식, <금강산-생명력>, 1999년, 캔버스, 한지에 아크릴릭
이처럼 금강산 관광이후 증폭된 금강산도의 생간과 유통은 한국미술계의 다변성과 확장성을 알려준다. 금강산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내면에 잠재되어 왔던 전통에 대한 향수와 재고, 과거 거장을 뛰어넘어 신 화법을 창조하려는 욕구는 금강산이라는 소재를 만나면서 외면으로 분출됐다.
정선과 진경의 수용에서 출발했지만 독특한 화법의 현장 사생화를 개발하거나 정선화를 자용한 방작으로 번안, 대상을 왜곡, 해체, 생략하면서 개인의 감수성을 이입한 심상의 산수나 관념적 영산으로 은유했다. 또한 의도적인 축소와 확대로 경물을 추상화 하고 그리고 싶은 대상만 주목하고 나머지를 과감히 생략한 신문인산수화로 전환했고 거대한 화면을 선택한 작가들은 압도적인 파노라마를 연출하여 각양각색의 시각문화로 표출했다. 21세기 신금강산도는 또 어떠한 조형언어로 탄생될지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