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서화전(朝鮮書畵傳)」은 19세기까지 일본에 전해진 고려 및 조선 회화에 관해 수록한『증정고화비고(增訂古畵備考)』의 50권과 51권에 수록되어 있다.『증정고화비고』는 아사오카 오키사다가 자신이 보고 들은 회화 관련 자료를 정리한 『고화비고』를 토대로 오오타 킨 등 박물관 관련자들이 출판하였는데 증보교정을 하던 중에「조선서화전」이 보강되어 1904년 출판된 인쇄본에 수록되었다.
「조선서화전」의 집필자와 집필경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가라시 고우이치(五十嵐公一)의 논문이 가장 참고가 된다. 1845년 통신사의 내방이 예정되었던 시기에 막부(幕府)가 어용회사(御用繪師)에게 조선서화와 관련된 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고 이때 저술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이전에도 고화에 대한 자료를 모은 책에서 조선 그림 및 화가에 대해 수록한 적은 있으나 19세기까지 일본인들이 조선 그림 및 화가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수장하거나 감상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서화전」은 오세창의『근역서화징』에서 인용된 이래 꾸준히 인용되어 왔으며 19세기까지 진행된 한일 회화교류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사료임에도 종합적, 비판적인 연구는 수행되지 않았다. 본 논문에서는「조선서화전」에 수록된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작품을 선별하여 검토하고 사료로서의 특징과 한계, 19세기 한일 회화교류의 상황과 배경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조선서화전」의 내용을 살피면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일본 발음 순서에 따라 항목을 설정하고 각 화가나 작품, 기록들을 정리하였는데 동일한 화가를 다른 항목에 나누어 실은 경우도 있어 어떤 화가가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수록되어 있는지 단번에 판단하기는 어렵다. 화가의 이름이나 字號를 자세히 몰랐기 때문인지 자 또는 호를 항목의 제목으로 사용한 경우가 많아 통신사가 왕래한 17세기 이전의 화가에 대한 정보와 인식은 불완전 했음을 알 수있다. 직접 본 작품들 외에 다른 저술에서 인용한 기록도 수록되어 있고 때로는 중국 그림도 수록하여 편명(篇名)과 위배되는 부분도 있지만 한국 서화를 독립적인 분류아래 대규모로 수록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혜허, <양류관음도>, 견본채색, 144x62.6, 일본 센소사(淺草寺)와 「조선서화전」의 혜허 항목
고려시대 그림으로 실린 해애와 혜허의 작품은 모두 현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며 조선 초기 관련 항목은 19건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가운데 2건은 안견, 4건은 강희안, 1건은 최경, 7건은 이암, 5건은 계회도에 관한 것인데 조선 초기 회화를 논할 때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며 계회도 또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회화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일본에 다수 존재하는 사시도나 소상팔경도 계통의 작품이 거의 수록되지 않아 상반된다. 이와 관련해 현 국립진주박물관 소장 <소상팔경도> 8폭 병풍이 북송대 곽희(郭熙)의 작품으로 전칭되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중국화가의 작품으로 인식되었던 사시도나 소상팔경도류의 작품들은 실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견 항목 <풍신> 등 삼폭대
20세기 이전에 이미 일본에 소장되어 있던 조선 초기 작품들이 언제 어떤 계기로 건너갔으며 일본인들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지 의문이 드는 가운데 현존 작품이 적은 조선 초기 작품에 관련한 기록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목록에 있는 안견의 <경작도> 삼폭대와 <풍신> 삼폭대가 일본 어딘가에 전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있다.
안견의 뒤를 이은 대표적인 화원인 최경의 경우 현존하는 작품이 한 점도 없는 상황에서 19세기까지 일본에 <채희귀한도>가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되며 남송의 대가 유송년과 유사하다는 지적이나 원나라 말기 작품으로도 보인다는 지적은 최경의 화풍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네 항목에 나누어 실린 강희안의 경우 행장을 수록하여 주목되며 단일화가로는 가장 많인 일곱 건이 실린 이암의 경우 현존하는 이암의 작품들 대부분이 일본에 있거나 일본에서 유출된 것들이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기록을 살펴볼 때 이암은 조선에서 보다 일본에서 더욱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광한 제시 항목
조선 초의 사대부 신광한의 자인 시회(時晦), 호인 기재(企齋)가 나오고 제시로 보이는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시문의 내용상 계회도에서 인용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제시는 『기재집(企齋集)』권 6
에 실린 「제은대계회도(題銀臺契會圖)」의 내용과 동일하여 숭정원의 관원들이 모인 계회를 그린 작품이었음을 추측할 수있으며 「조선서화전」의 기록이 신빙성이 있는 자료임을 알 수있다.
「조선서화전」은 19세기 전반 경 일본에 전해지던 작품과 기록을 토대로 편찬되어 실증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일본에 소재한 한국회화 및 한일 회화고류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편찬자가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때로는 국적에 대해 의문의 여지를 남겨놓기도 했기에 비판적 분석이 필요한 자료임을 인식하고 인용해야 한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