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은 18세기 후반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김홍도와 이명기가 함께 그린 초상화다. 초상화에 있어서만은 확실한 작품이 남아 있지 않은 김홍도가 참여한 사실이 분명하며 정조의 41세 어진도사에서 김홍도를 제치고 주관화사에 낙점될 만큼 초상 제작에서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은 이명기가 함께 제작하여 주목된다.
<서직수 초상(徐直修 肖像)> 보물 제1487호, 148.8x72cm, 비단에 색, 국립중앙박물관
"이명기가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가 몸을 그렸다. 두 사람
은 그림으로 이름난 이들이건만 한 조각 정신은 그려내지
못하였구나. 아깝다! 내 어찌 임하에서 도를 닦지 않고 名
山雜記에 심력을 낭비하였던가! 그 평생을 대강 논의해 볼
때 속되지 않았음만은 귀하다고 하겠다. 병진년(1796) 하
일 십우헌 예순두 살 늙은이가 자신을 평하다."
그런데 서직수의 문집에 ‘戱題畵相’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 자찬문을 보면 장난삼아 쓴 글(戱題)이라고는 하나 그림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어 의문이다. 본 논문에서는 서직수가 어떤 인물이기에 당시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두 화원이 동원되었으며 서직수가 가진 불만이 무엇인지, 화가들이 초상화에 담지 못한 정신의 실체가 무엇인지 연구하였다.
서직수는 밀양부사를 지낸 부친 서명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직에 오르지 못했지만 꾸준히 관료생활을 유지하며 말년에는 인천부사와 정삼품의 돈녕도정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의 호적등본이라 할 수 있는 서직수의 준호구(準戶口) 두 장을 통해 재산규모를 파악해 보면 1771년 당시 8명이었던 솔거노비가 1789년에는 32명으로 증가하여 상당히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서직수 초상>은 서직수가 1791년 평안북도 가산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부모의 병을 이유로 1794년부터 약 4년간 관직을 떠나 서울에 머물렀던 1796년 62세 때 제작되었다.서직수는 조선 사회에서 초상을 제작하기 위한 기본적 조건인 출신과 관직, 경제적 여유까지 필요조건을 갖추었으나 지위와 재력이 충분하다 해도 김홍도, 이명기라는 두 화가에게 초상을 의뢰하였던 데는 서직수의 관리로서의 이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89년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양주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천봉(遷奉)하기 위해 현륭원을 건설하고 현륭원 인근에 원당 사찰로 용주사가 조성되었다. 서직수는 현륭원의 첫 번째 책임자로 부임했고 용주사에서 시작된 불화 제작을 화원 김홍도, 이명기, 김득신이 감독하였다. 서직수의 부임 기간은 1789년 10월부터 1790년 9월 30일까지이며 김홍도, 이명기, 김득신은 1790년 2월 19일부터 9월 29까지 용주사에 근무해 이들이 인근에 지낸 기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서직수와 용주사 화원들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1790년 가을에 조성된 용주사의 숭정명 범종 명문에 서직수의 이름이 등장하여 서직수가 용주사 불사에 관심을 기울였을 가능성이 높다.
용주사에서 돌아온 후 김홍도와 이명기는 정조의 어진 제작에 참여한 후 그에 대한 포상으로 각각 지방관에 제수되었는데 1795년 장수도역 찰방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명기와 1795년 봄 연풍현감을 마친 김홍도, 이들보다 조금 앞서 가산군수를 사임하고 서울에 머물고 있던 서직수가 친분과 더불어 비슷한 시기에 지방관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일을 계기로 초상을 제작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그런데 동시대 어느 초상화에 뒤지지 않는 격조를 보이며 당대 화가들을 논평한 글「海東書畵軸」에서 서직수 본인이 최고의 대가로 꼽은 김홍도가 참여했음에도 그림에 불만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림의 객관적 수준 때문이 아니라 그림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언급일 가능성이 높다.
또 하나의 서직수 초상이라 할 수 있는 이인문이 그린 <십우도(十友圖)>를 살펴보면 여섯 명의 인물이 고동서화를 펼쳐놓고 모임을 즐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두 개의 글이 있는데 ‘십우헌기(十友軒記)’와 ‘십우헌고시(十友軒古詩)’라는 제목으로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글의 내용은 십우헌이라는 당호의 의미와 열 명의 벗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직수는 구양수 만년의 자호 ‘六一居士’의 여섯에 문방사우의 넷을 더하여 십우를 정하였다.
이인문, <십우도>,1783년, 종이에 담채, 126×56cm, 국립중앙박물관
서직수로 보이는 중앙에 앉은 인물 주위에는 두루마리 그림, 빙렬이 있는 도자기, 기이한 형태의 필통에 꽂힌 붓, 서적, 칼 등이 있다. 중앙에 놓인 화권에는 ‘石田畵’라고 적혀있어 명대화가인 심주의 그림임을 알 수 있고 화려한 필통에 담긴 붓은 동기창의 필법을 의미한다. 서직수 곁에 놓인 책 표면에는 ‘화경(花鏡)’이라 적힌 제첨이 붙어 있는데 이는 청대의 원예서『秘傳花鏡』로 “평생 꽃과 나무를 기르는 데 힘썼다”는 서직수의 원예취미를 상기시킨다. 그 앞에 놓인 칼은 서직수의 검 수집취미와 관련 있어 서직수의 십우로 선택된 대상은 그가 일상생활에서 즐겼던 취미와 완상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서직수 초상>에서 “한 조각 정신을 그리지 못했다”는 구절에는 그의 속내가 담겨있는데 서직수의 심중을 추정 가능케 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명산잡기(名山雜記)’인데 처음썼던 넉 자를 지우고 명산잡기라는 네 글자를 다시 적었다. ‘명산잡기’는 자기검열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세상에 드러내도 괜찮은 것, 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명산잡기에 심취했던 일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상에 불만을 토로한 서직수가 자평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바는 서화와 산수유람, 원예, 각종 잡기 문학에 심취하였던 자신의 문화적 취향이었다. 두 화가를 통해 초상을 제작하며 그림에 표현되기 바랐던 자신의 진면목은 일생동안 추구한 그의 문화적 취향, 이른바 아취였을 것이다. 자찬문에 드러난 불만족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그의 일상과 문화적 격조를 초상화적 형식으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으로 읽힌다.
<서직수초상>을 제작하며 눈에 띄는 업적이 없었던 공적인 삶과 달리 일생동안 자신이 삶의 여유로움과 문화적 아취를 추구한 인물임을 세상에 보이고자 했던 서직수는 예술과 취미를 향유하는 생활에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한 조선 후기 문인의 고양된 문화적 면모를 보여준다.(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