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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중앙박물관 <진하도> - 군주에게는 명분을, 신하에게는 특권을 부여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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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빈,「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陳賀圖>의 정치적 성격과 의미」, 『동악미술사학』(제13호), 2012년, 동악미술사학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하도(陳賀圖)>는 현존하는 진하도 중에서 가장 이른 예로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진하도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국립중앙박물관 서화유물도록에서 처음 공개되어 미처 본격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본 논문에서는 작품의 제작 동기를 밝히고 의례와 건물의 장면을 고증함으로써 진하도의 형식적 원형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한 뒤 진하도의 기능과 제작 관례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진하도> , 1783년경, 153.0x462.4cm, 국립중앙박물관


진하례는 왕실 관련 행사 중에 드물게 신하가 주체가 되어 왕에게 경축을 올리는 의례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진하도>는 여섯 폭에 걸쳐 진하례 장면을 그리고 두 폭에 좌목을 실었는데, 1783년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에게 존호를 올린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문무백관들이 행했던 진하례를 그린 그림이다. 가운데 3폭은 인정전에서의 행사장면을 다루고 있고 좌우 3폭은 인정전에 연결된 관아를 그려 넣었는데 이는 이후 진하례만을 독립적으로 그린 진하도의 전형이 되어 주목된다.

정조는 이 그림의 배경이 되는 1783년 행사에서 영조의 전례를 따르면서 몇 가지를 조정하였는데 진하례 시에 규장각 각신들을 인정전 안으로 입당시켜 어좌 앞에서 참석하게 하여 규장각 각신의 입지를 강화하였다. 7에서 8폭에 걸친 좌목에는 12명의 규장각 각신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는데,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각신들의 일지인『內閣日曆(내각일력)』의 기록과 비교할 때 11명이 일치한다. 11명중 8명은 본 행사에서 책임직에 임명되었는데 참석하기만 해도 부상이 이루어졌기에 규장각 각신들이 행사를 진행하는 주축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아조회지도>, 1778년, 규장각소장
정조는 즉위 2년(1778) 그간의 제도를 상고하여 조회를 위한 배반도인 <朝賀圖式(조하도식)>을 인출하여 큰 조회 시에 이 도안에 의거할 것을 명령하였는데 규장각 서책목록에 정조2년(1778) 이라 전해져 오는 <正衙朝會之圖(정아조회지도)>가 <조하도식>일 가능성이 크다.


<진하도>는 기본적인 구조는 조선 초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나 영조대『국조오례의』<인정전정지탄일조하도>와 공통되나 정조대에 개정된 <正衙朝會之圖(정아조회지도)>를 통해 볼 때 이전과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있다. 인정전 내부에 설치된 諭書(유서)와 은인(銀印)이 눈에 띄는데 이는 영조가 정조를 대리청정하게 한 것을 기념하여 하사한 것으로 정통성의 상징이다. 또한 시위군의 수가 세분화되고 증가하였는데 이는 정조가 동궁시절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이후 숙위소라는 새로운 호위 기구를 창설한 것을 반영한다. 또한 <정아조회지도>에서도 찾아 볼 수없는 경우가 있는데 승지와 사관 앞에 앉은 11명의 인물이다. 이는 이 해 진하례의 특이사항인 규장각 각신의 승전도 반영하고 있는데, 정조가 어필로 편액한 규장각 각신의 집무처인 이문원과 그 주위가 주의 깊게 그려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진하도>는 당시 주관한 각신들이 2년 전 제작한 <행원회강도병(幸院會講圖屏)>처럼 어명에 의해 계병 제작을 발의하되 관원들이 주체가 되어 추진하고 1건은 진상하고 나머지는 나누어 갖던 예처럼 제작과 분급이 이루어 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 우회적으로 왕실행사의 권위를 강화하는 진하례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으며 왕이 신하에게 행사의 의미를 전달하고 그들의 입과 행동으로 이를 재확인 한다는 점에서도 군주의 입장을 강화하는 행사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진하도>는 특정 장면을 도해한 것이라고 보기 어려워 진하의 첫 번째 식순인 致詞(치사)를 표현한 19세기 이후의 진하도와 구별되며 의례의 식순을 개념적으로 시각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자의 탄생을 조상에게 감사드린다는 명분으로 발의 되었지만 그 실질적 의도는 사도세자의 복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신하들의 지지를 통해 명분을 얻기 위해 자신의 친위 세력인 규장각 각신을 활용하였는데 의례에서 규장각 각신을 인정전 전내로 승전시킨 것은 이러한 조치 중 하나였다. 중앙 인정전을 궐내각사가 좌우에 둘러 싼 구도 또한 이상적인 군신관계의 구도를 표방하고 있어 경축 행사라는 소재와 계병이라는 형식을 통해 군주에게는 명분을 신하에게는 특권을 부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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