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모,「조선후기 풍속화에 나타난 ‘일상’의 표현과 그 의미」, 『미술사학』(제25호), 2011년, 한국미술사교육학회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인 풍속화는 사소하고 평범한 것도 그림의 주제가 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조선시대 1592년부터 1636년까지 네 번의 전쟁 이후 17세기 후반부터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일상의 가치를 재인식하는 경향이 문화전반에 나타났는데 이러한 변화가 그림에 대해 표출된 것이 당시 유행한 풍속화이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후기에 유행한 풍속화에서 일상이란 어떤 내용이고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이후 회화사에서 어떤 영향력을 갖는지 주목하였다.
강세황은 김홍도 풍속화의 특징에 대해 "특히 세속의 모습을 옮겨 그리기를 잘했는데 살면서 날마다 쓰는 여러가지 말과 행동, 그리고 길거리, 나루터, 가게, 시장, 시험장, 연회장 등을 한번 그리기만 하면 사람들은 모두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외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거론하였는데 '살면서 날마다 쓰는 여러 가지 말과 행동'을 풍속화 설명에서 앞에 둘만큼 중시했음을 알 수있다. 이는 바로 일상을 말한다.
풍속화를 통해 일상이 표출됨으로써 조선후기 화단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전에 그림의 주변으로 그려졌던 일상이 그림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사소한 것의 가치와 평범함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풍속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풍속화의 위상 또한 높아졌는데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祿取才)에서 가장 많이 출제되는 그림으로 자리 잡았으며 정조는 자비대령화원에게 풍속화를 그릴 때 “모두 보자마자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그려라”라고 지시했다.
조선후기 풍속화의 유행은 실학을 비롯한 당시 사상 및 문화계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일상과 서민문화에 대한 편견이 약화되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득세하였다. 이 시기 일상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은 실학자의 글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실학자 유형원은 이상적인 사상보다는 구체적인 사물과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정조가 생각하는 학문의 목적은 심성보다는 사공이라고 표현하는 실용성을 중시했다.
윤두서, <짚신삼기>, 베에 먹, 32.4x20.2cm, 개인소장
일상을 담은 풍속화는 윤두서의 작품에서 시작되었는데 서민들이 일하는 모습을 화폭에 등장시켜 서민의 삶까지 그림의 주제로 표용했다. 이러한 시도는 조영석, 김홍도를 거치며 거침없는 일상의 풍속화로 전개되었다. 풍속화에서 다루는 일상생활은 일과 놀이가 주류를 이루고 서민 특유의 정서를 반영하는데 사회풍자, 해학, 에로티시즘이 바로 그것이다. 신분차별, 종교계의 타락, 처첩갈등과 같은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림속에 깔려있는데 해학이라는 은유적 방법을 사회의 왜곡된 부분을 고치고 구부러진 부분을 바로 펴려는 민초들의 지혜가 담겨져 있다. 김홍도, <벼타작>,《단원풍속도첩》, 종이에 채색, 27x22.7cm, 국립중앙박물관 사대부 화가의 바통을 이어받은 화원들은 단순히 노동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극적인 효과를 가미하였는데 상류계층과 하류계층의 신분간의 대비 등 사회풍자를 해학으로 보여준다. 또한 궁중문화가 교화를 목표로 하고 사대부 문화가 아취를 추구한다면 서민문화는 희노애락의 감성을 풀어낸다.
조선후기 풍속화에서 해학과 더불어 주목할만한 특색은 에로티시즘인데 도시적 성장과 상업문화의 확산에 따라 성행한 유흥적 여가문화의 산물이자 근대적 소비사회로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에로틱한 풍속화는 신윤복의 작품이 많이 알려졌는데 사실 선구자는 김홍도로《단원풍속도첩》에 실린 에로틱한 그림은 신윤복의《혜원전신도첩》보다 적어도 20여년 앞선다. 김홍도의 <소 등에 탄 촌 아낙>이나 <목화 따는 여인들>은 아낙을 훔쳐보는 나그네를 양반계층을 대신한 스턴트맨으로 등장시켜 양반의 허세와 가식에 대한 풍자를 나타낸다. 또한 신윤복의 <단오풍정>에서는 불교계의 타락상을 풍자하는데, “훔쳐보기”의 설정이 조선후기 풍속화에 표현된 에로티시즘의 중요한 기법임을 알 수 있다.
풍속화에 나타난 에로티시즘 또한 감상자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반의 허세와 가식을 비판하는 복선이 깔려있다. 풍속화의 특색인 사회풍자, 해학, 에로티시즘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후기 풍속화에 등장한 일상의 표현은 19세기 민화로 이어져 최근에 와서는 대중문화로 꽃피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풍속화에 등장한 일상표현은 한국 전통문화가 근대로 나아가는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김)
김득신, <고양이 쫓기>, 종이에 채색, 22.4x27.0cm, 간송미술관
김득신의 작품은 고양이를 쫓는 한바탕의 소동을 그린 것이지만 자리 짜기라는 노동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윤두서의 <짚신 삼기>에서 김득신의 <고양이 쫓기>로 바뀌기까지 50여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마름과 일꾼이라는 신분간의 대비를 보여준다.
김홍도, <소등에 탄 촌아낙>,《단원풍속도첩》, 종이에 채색, 27x22.7cm, 국립중앙박물관
여유로운 풍류와 힘겨운 생활의 대비를 볼 수있다.
<까치호랑이>, 19세기, 종이에 채색, 72.0x59.4cm, 일본개인소장
희화화된 호랑이와 이에 맞대응하는 기품이 느껴지는 까치는 단순히 호랑이와 까치를 그린것이 아니라 권력자와 민초의 관계를 우화적으로 나타냈다.
풍속화에서 전개된 일상의 세계는 19세기 민화의 붐으로 이어졌는데 국가에서 경영한 관요에서 생산한 도자기에 민화의 문양이 시문되고 사대부가 쓰는 가구나 생활용품에도 민화가 새겨졌다. 또 사찰이나 제실에도 민화가 등장하였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에는 민화가 더욱 활기차게 제작되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려는 민중의 긍정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되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