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는 한마디로 신화의 상실시대이다. 근대적 합리성과 과학관에 입각한 추론이 성립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모두 폐기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신화는 그 선봉이었다.
100년 전, 동양적 前근대와 서구적 근대가 한반도에서 맞부딪쳤을 때에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고 비일비재했다.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에서는 기존의 가치와 지식이 하루가 다르게 무용지물이 되어갔다.
그런 상심과 상실의 시절에 근대적 눈에는 다분히 불가사의로 포장된 偶然이었겠지만 기존 가치로 보면 마땅히 하늘이 감동한 것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당시 육군부장이자 시중무관장이었던 민영환(閔泳煥, 호는 桂庭, 1861-1905)은 치욕과 망국의 책임을 통한하면서 자결했다.
이 자결은 억눌린 민족감정 전체를 자극하면서 수많은 조선인들의 공감을 샀다. 그런데 그 공분에 감동이라도 하듯 하늘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민영환이 자결한 이완식집 사랑채는 그 후 피 묻은 옷과 칼을 그대로 나둔 채 잠가 두었다가 반년도 더 지난 이듬해 7월 문을 열자 바로 그의 샛빨간 핏자국이 흘러 떨어진 마루 밑에서 대나무가 4 그루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민영환의 혈죽(血竹)은 실로 믿기 힘든, 근대 탄생의 신화였다. 당시 애국계몽단체였던 대한구락부는 일본인 경영의 기쿠다(菊田) 사진관을 동원해 이 혈죽의 사진을 찍고 대대적으로 소개했다.
이 논문은 그 당시 일어난 이 기적을 둘러싸고 구한말 서화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또 주역 민영환의 서화가적 위치를 재조명하고자 쓴 글이다.
이때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4줄기 9가지 48개 잎사귀의 혈죽은 당시 즉각 목판으로 제작됐다. 제작자는 평양출신의 화가 양기훈(陽基薰, 호는 石然, 1843-?)으로 그는 이 <혈죽도>의 목판 원본을 두 점이나 그렸다.
두 번째 문제는 민영환의 서화가로서의 위치이다. 그동안 역대 서화가를 다룬 사전류에서 민영환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대표적인 서화가 사전인 오세창의『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도 그의 이름은 없다. 다만 그의 글씨를 통해 근대 서예가로 소개한 사례는 약간 있다.
여기에서는 민영환의 활동을 추적하며 장승업과의 친분, 상해 거주의 서화가 민영익에의 방문, 왕실 어진모사작업의 감독관 일 등을 일일이 거론하며 현재 남아있는 작품수만으로 서화가의 기준을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현재 전하는 민영환의 작품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묵죽도>와 개인 소장의 <죽석란도(竹石蘭圖)> 2 점뿐이다. 필자는 이 두 점에서 지사적 기개와 품격 그리고 전문적인 서화가로서의 기교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