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은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하는 작자의 문제에 민감하다. 화원 출신이냐 문인화가냐를 따지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을 얘기다. 하지만 문인화론에서는 출신에 따라 그림의 격이 다르다고 했다.
이론의 단초를 꺼낸 송나라 때 곽약허는 이렇게 말했다. 볼만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대개 헌면재사(軒冕才士)요 암굴상사(岩窟上士)라고. 헌면이란 관리가 쓰던 모자이니 고급 관리를 말한다. 재사는 말 그대로 재능 있는 선비. 암굴상사는 굴속에 사는 명사다. 즉 속세의 벼슬에 연연하지 않은 은자, 고사류를 가리킨다.
민영익 <월영향무진(月影香無盡)> 지본수묵 59.7x32.2cm 선문대 박물관
그런데 전통 사회가 근대로 바뀌면서 이런 기준이 애매해졌다. 위아래 전도(顚倒)도 일어났다. 존경받던 고급 관료이자 문인들이 스무드하게 근대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종 사회 진보를 가로막는 수구파 우두머리가 되었다. 중인 출신은 반대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새 사회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근대 언저리에 활동한 사람들의 그림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출신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그림 자체이냐가 문제가 된다. 근대 정치가이자 화가인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바로 그런 고민스런 평가의 대상 중 한 사람이다. 더욱이 그가 주로 그린 그림이 사군자의 하나인 난초였음에 더욱 그렀다.
민영익 <노근묵란(露根墨蘭)> 지본수묵 58.4x128.5cm 호암미술관
실제 그의 평가는 엇갈린다. 물론 정치적인 해석이 전혀 개입되지 않아다고 할 수 없다. 이 글은 그의 정치적 행적과 나란히 그림을 늘어놓고 재구성한 평전이다. 행적만 놓고 보면 그의 전반생은 헌면재사다. 그러나 후반생은 가히 암굴상사에 가깝다.
그는 민비의 오빠 민승호의 양자였다. 영리하고 숙성한 그를 민비가 총애했다. 만 17살에 병과에 급제한 뒤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20살쯤에는 한말 군대의 핵심 인물돼 있었다. 23살에는 친선사절 대표로 미국을 방문했다.
민영익 <해외사란> 1896년 지본수묵 56x31cm 호암미술관
그런데 24살 때 갑오개혁이 일어나면서 모든 것이 급전직하로 헝클어졌다. 수구파의 핵심으로 지목돼 아버지는 살해됐고 자신도 칼부림을 당했다. 이후 그는 상해로 건너가 망명객이 되었다. 당시 26살이었다. 기록에는 없지만 그는 상해와 홍콩을 오가며 이왕가의 정치 자금이 되는 홍삼과 사금 무역에 종사했다고 한다.
민영익 <천연풍운(천연풍운)> 지본수묵 27.5x41cm 개인
화가 민영익의 활동은 상해로 건너간 뒤 54살로 죽은 1914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의 민영익 난 그림에 대해 필자는 애써 출신을 빼놓고 논하고 있다. 그가 그린 난초 그림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추사풍과 전혀 달랐다고 했다. 대상이 춘란(春蘭)이 아니라 건난(建蘭)이기 때문이다.
민영익 <신묘(神妙)> 지본수묵 56.5x31cm 이화여대 박물관
건란은 하늘하늘한 춘란과 달리 잎이 넓적하고 뻣뻣하다. 또 곧게 자라며 꽃도 아홉송이다. 민영익은 이를 끝이 뭉뚝한 붓으로 그렸다. 그리고 뿌리를 앙상하게 그려 일명 노근난(露根蘭)으로 묘사했다.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