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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솔거의 소나무는 최첨단 기법인 청록산수 계열의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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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 그의 신분, 활동연대, 화풍」 안휘준, 『미술사학연구』 제274호(2012년6월, 한국미술사학회 간행)

한국 역사에 처음 나오는 화가가 솔거이지만 일반인들은 그의 존재를 반신반의한다는 것이 솔직한 말일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그가 황룡사 벽에 소나무를 그렸더니 참새가 날아와 머리를 부딪치고 죽었다는 것 아닌가.

원로 미술사학자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 한국 최초의 화가 솔거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 시각을 들이댔다. 금년 여름에 나온  『미술사학연구』(제274호)의 수록 논문을 간추려 소개한다.


황룡사 옛 터

이제까지 솔거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자료는 다섯가지 뿐이다. 김부식(1075-1151)의 『삼국사기』 「열전」,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  강위(1820-1884)의 『고환당집(古懽堂集)』, 조선말 대한제국 초에 쓰인 작자미상의 『동사유고(東事類考)』 그리고 「백율사 중수기(栢栗寺重修記)」이다. (원문은 모두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에 수록돼있다.)

황룡사 가람배치 모형


이들 기록은 삼국사기 기록과 약간 다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우선  『동사유고』에는 솔거가 꿈속에 단군을 만나 신필(神筆)을 얻었고 이후 단군 화상을 많이 그렸다고 돼있다. 『지봉유설』에는 황룡사가 1차 준공된 진흥왕(534-576)때 사람이며 승려라고도 한다고 했다. 「백율사 중수기」에는 중국에서 온 솔거가 인도의 향목을 가지고 관음상 3구를 제작했다고 돼있다.

안 교수는 이들 기록을 꼼꼼히 재독하며 당시 신라와 통일신라의 사정 그리고 중국의 정황들을 근거로 보다 명확하고 분명한 솔거상을 재현해 보였다.

첫째 신분에 대해 승려가 아닌 세속인으로 보았다. 솔거라는 이름은 양주동說에 따라 명화 노송도를 그린 데서 유래해 ‘솔을 그린 이’라는 뜻의 별명일 수도 있다고 했다.

둘째로 정사인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된 유일한 화가라는 점에서 솔거는 경덕왕 때 확대 개편된 전채서(典彩署), 즉 조선시대의 도화서에 해당하는 화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솔거의 실력으로 보아 이 기관의 최고 직책인 10등에 해당하는 대내마(大奈麻)였을 것으로 보았다.

셋째, ‘어찌 글씨의 김생만 있을까보냐’는 이수광 주장을 재해석해 솔거의 활동연대는 경덕왕(742-764) 연간으로 보았다. 당시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조영되는 등 통일신라문화의 절정기였다. 이때 최고의 서예가 김생(711-791)과 서화계의 쌍벽을 이룬 것으로 본 것이다.
 

넷째 황룡사 금당에 그린 소나무가 신필로 인정받은 것은 채색화로서 사실적이고 기운생동한  때문이라고 했다. 청록산수는 중국에서도 당나라때 이사훈, 이소도 부자에 의해 발전 궤도에 오른 새로운 화풍에 속한다. 당시 중국의 새로운 불상양식이 통일신라에 전해지는 것이 10-20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것에 비추어 중국의 새 기법인 청록산수 화풍 역시 이 무렵에 전해졌고 솔거가 이를 확실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냈다고 풀이한 것이다.
 
다섯째, 황룡사에는 금당이 셋 있었으나 솔거의 소나무가 그린 것은 장육존상이 있는 중앙 금당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해가 뜨는 동쪽을 숭상한 신라인들의 취향과 새들이 날아왔다는 기술로 보아 중앙 금당의 동쪽 외벽에 그려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여기에 그려진 소나무는 여러 그루가 아닌 한 그루만을 화면 중앙에 놓고 가지들을 좌우로 넓게 펼쳐 균형을 잡아 그렸을 것이라고 보았다.(윤)


황룡사 복원 조감도

글/사진 SmartK
업데이트 2024.11.23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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