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역사기록 자료를 보면 일종의 편중 현상이 있다. 즉 국가나 왕가 그리고 양반 즉 사회 상류층 기록은 상당량의 자료가 남아 있는 반면 그보다 한 발자국만 내려가면 자료가 영세하기 이를 데 없다는 점이다.
중인층이 담당했던 조선시대의 화원 연구가 몇몇 유명화가를 제외하고 그다지 진척이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랄 수 있다. 유명화가라 해도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없고, 소위 국가의 공식기록이나 양반 문인들의 문집에서 끄집어내 날줄에 씨줄을 짜 맞추듯이 엮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점은 반면에 얼마든지 새로운 자료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조선 시대 겸재 정선과 함께 가장 일반인들에게 친근한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의 경우는 그동안 오주석과 진준현 서울대 교수에 의해 생애와 작품 정리가 일차 끝났지만 최근 이화여대 홍선표 교수는 『미술사논단』 제34호를 통해 김홍도 생애의 새로운 면모를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간추려 몇 가지를 소개한다.
김홍도(金弘道) <신언인도(愼言人圖)> 1773년 종이에 수묵 114.8x57.6cm 국립중앙박물관
사능(士能)이란 서명과 제작 연대가 알려진 가장 이른 그림이다.
첫째. 그의 증조부는 당시 온 나라에서 알아주던 거부였다.
김홍도 집안은 대대로 무반 출신이었다. 5대조는 오위도총부의 연대장급, 4대조는 평안도 벽단에 있던 부대의 지휘관 그리고 증조부 역시 용인부근에서 만호를 지냈다. 바로 이 증조부가 손꼽히는 거부였는데 영조때 기록(1731년)에 ‘통국거부(通國巨富)’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둘째, 조부가 증조부의 노비출신 부인 소생이었기 이때부터 서출로 분류돼 김홍도 집안이 기술직 중인계보직에 수록된 듯하다.
셋째, 널리 알려진 것처럼 어려서 강세황의 훈도를 받았는데 당시 규장각 검서관이던 성해응(成海應, 1760-1839)의 기록을 보면 심사정에게 처음 그림을 학습했다고 기술돼 있다. 성해응은 단원과 교류가 있었던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의 아들이다.
넷째, 영조팔순 어진에 대한 포상으로 문관직 종6품에 임용된 뒤에 치러진 수령강(守令講) 시험에서 글 외우기, 강론 등에서 삼책불통(三冊不通)의 최하위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과거출신자가 아니란 이유로 사정이 헤아려지며 스스로 노력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다섯째, 사능이란 호를 쓸 무렵, 즉 중년의 단원의 집은 지금의 성산동 홍제천 하류 부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81년 4월 청화절에 금성동반(錦城東畔), 즉 성산동 홍제천 하류 부근의 자신의 집에서 강희언, 정란과 함께 아회를 갖고 이를 진솔회(眞率會)라고 했다. 이 집에서는 제자도 키웠는데 당시 수장가인 김광국(김광국, 1727-1797년)이 당시 15살 전후의 소년 박유성(朴維城, 1763년경-1808년경)이 있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다.
여섯째, 단원이 연경에 다녀왔는냐는 의문에 대해 수행군관으로 뽑힌 것은 사실이다. 당시 동지정사 이성원의 수행군관으로 뽑혔지만 이듬해 봄에 그린 <기려원려도>에 강세황이 ‘오랜 병에서 깨끗이 회복된 것을 알 수 있어’ 운운한 것을 보면 중병으로 선정이 취소된 것으로 보인다.
김홍도 <추성부도(秋聲賦圖)> 부분 삼성미술관 리움.
단원의 절필작으로 알려진 그림으로 아마 1805년12월1일경(음력) 전주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일곱 번째 만년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하게 지냈다. 1799년6월8일에 지인에게 쓴 편지에는 김홍도는 병으로 몸이 아파 괴롭다고 하고 종이 파는 지전의 주문에 응해 그려준 그림값을 받지 못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낭패를 겪고 있다고 했다.
또 1805년12월19일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집안은 모두 무고하며 너의 글공부는 잘 되고 있느냐. 나의 병세는 너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에 이미 말했다’라고 했는데 이 편지는 전라도 감영이 있는 전주인 듯하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 심상규의 편지(1805년12월31일자)에도 ‘김홍도가 굶주리고 아픈 상태로 취식(取食)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면서 ‘아까운 사람이 이런 곤궁과 굶주림을 겪는다는 것은 조선에서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때를 못만나는 것이냐’하고 탄식했다.이를 보아 김홍도가 최후를 맞이한 곳은 전주 근처라고 추정된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