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가 열리는 동안 많은 작가의 전시가 줄을 이었다. 꼬박 닷새 일정이지만 다 본다는 것은 역부족. 그래서 처음부터 꼭 보겠다고 계획했던 전시를 지역 별로 나눠 우왕좌왕하지 않고 내달렸다.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에서 열린 마를린 뒤마(Marlene Dumas, 1953~ )의 《오픈 엔드(Open End)》전은 1984년부터 현재까지의 드로잉, 특유의 번짐이 있는 인물 수채화와 함께 최근 제작된 유화를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간접적인 이미지와 직접적인 감정을 사용하는 작가”라고 말한다. 사랑과 죽음, 성별과 인종, 순수와 비난, 폭력과 부드러움 같은 그의 주제를 사회 정치적 측면, 뉴스 기사 및 미술사의 주요 주제와 결합한다. 탈맥락화된 신체의 심리적 특성을 파괴하고 개혁하는 감성적 면이 바탕에 깔려있다.
마릴린 뒤마 Losing(그녀의 의미),1988, 피노 컬렉션
영국의 인도계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1954~ )는 아카데미아 미술관(Gallerie dell’Accademia)과 팔라초 만프린(Palazzo Manfrin)에서, 그가 개발한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초 광흡수성 소재인 반타블랙(Vantablack)을 사용한 작품과 유화를 사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비어 있지만 가득 찬 물질과, 존재의 상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관능적이고 흥미로운 조각을 시간과 과정이라는 장치를 통해 선보였으나, 그의 페인팅 또는 페인팅과 함께 설치된 작품은 다소 과장된 억지스러운 느낌이었다.
Anish Kapoor 〈게토의 문에 있는 모리아 산〉2022
브루스 나우먼(Bruce Nauman, 1941~ )은 1968년 작품인 <콘트라포스토처럼 걷기(Walk with Contrapposto)>의 주제로 돌아가는 일련의 신작 비디오 설치를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에서 선보였다. 81세 개념미술의 거장이 선보이는 이 전시는 나우만이 자신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다루어온 신체, 매체로서의 소리, 창작 공간으로서의 스튜디오를 통해 단일한 주제를 심도있게 탐구하는 작가의 일관된 자세를 드러낸다. 그러나 3D로 발전시킨 작업이나 3D 입체 안경을 쓰고 보아야 하는 작품 그리고 구형 TV 모니터로 보던 구작이 대형 스크린에 비춰보이니 낯선 느낌이 들었다. 전설이 된 나우만의 신체 동영상 이미지가 수평 수직의 줄무늬로 절단되어 투사되면서 디지털 기술의 해체 효과에 대한 반영을 읽을 수 있다.
브루스 나우만 〈콘트라포스토 연구Contrapposto Studies: I부터 VII 까지〉2015-2016, Punta della Dogana 설치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조각계의 파라오라 불리던 루이스 네벨슨(Louise Nevelson, 1899~1988)은 1962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 대표작가로 참가했었는데, 이번에 그 6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를 건축가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1953~ )가 개조한 프로큐라티에 베키에(Procuratie Vecchie)에서 열었다. 그가 60년 전 미국관에서 전시한 이래 처음으로 다시 베니스에서 선보이는 이 회고전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제작한 60여 점의 작품으로 그의 진면목을 실감하게 해준다. 특히 수집된 폐기물을 재활용, 무광택의 검은색으로 균일하게 덮은 그의 작업은 각각의 오브제를 광대한 지평으로 전환시킨다.
루이스 네벨슨 전시 전경
베니스의 상징인 총독의 궁전(Palazzo Ducale). 틴토레토(Tintoretto,1518~94), 티치아노(Titian,1488/90~1576), 베로네세(Veronese,1528~88)와 내로라하는 르네상스 화가의 벽화로 가득한 살라 델로 스크루티니오(Sala dello Scrutinio)에 극장 간판처럼 펼쳐 놓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1945~ )의 대형 작품들은 원래 궁전에 있었던 33개의 천장화와 결합해 장관을 연출한다. 역사의 격변과 세계의 파멸과 재생의 끊임없는 순환을 강조하며 도시와 세계의 멸망과 재탄생의 영원한 변화와 순환을 강조한다.
두칼레 궁의 안젤름 키퍼 전시 전경
1992년 미국에서 로마로 이주한 미국 작가 스탠리 휘트니(Stanley Whitney,1946~ )의 《이탈리아 페인팅》전도 티에폴로 파시 궁에서 열리고 있다. 로마 이주 후 30년 동안 제작된 작품을 통해 이탈리아 예술과 건축이 그의 작업에 미친 영향으로 맑고 밝고 순도 높은 원색의 화면을 보여준다.
스탠리 휘트니 전시 장면
오바마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려 유명세를 얻은 케힌데 와일리(Kehinde Wiley,1977~ )의 《침묵의 고고학(An Archaeology of Silence)》전은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섬의 치니 재단에서 열리고 있다. 흑인에 대한 폭력을 그림으로 폭로했던 그는 죽음, 필멸의 삶, 무력감, 그리고 낙담한 모습, 즉 젊음과 구속에 대한 이야기 한가운데서 죽음과 부패의 병치를 통해 폭력과 권력의 저항하는 투쟁을 묘사한다. 이탈리아 고전 조각과 회화에서 차용한 포즈로 아름답지만 슬픈 극사실적인 그림과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조각은 미술의 힘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케힌데 와일리 The Wounded Achilles(Fillipo Albacini) 2022
오스트리아 액셔니즘의 대표작가 헤르만 니치(Hermann Nitsch,1938~2022)의 《20세기 회화적 액션(20th Pictorial Action)》전은 한 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액셔니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도살장처럼 만든 전시장에서 동물을 죽여 피를 흩뿌리며 절정의 환희와 억압에서 해방감을 내장을 꺼내 펼치는 광란의 퍼포먼스로 유명한 16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전시 개막 하루 전에 그는 눈을 감아 관객들을 안타깝게 했다.
헤르만 니치 전시 장면, 2022
스위스의 조각가 우고 론디노네(Ugo Rondinone,1964~ )의 《타다, 반짝이다, 날다(Burn Shine Fly)》 전과 산마르코 광장의 올리베티 매장(Negozio Olivetti)에서 열린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와 곰리(Antony Gormley,1950~ ) 전시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폰타나와 곰리 전시는 장소가 좁고 작품도 적지만, 이탈리아 모더니즘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1906~1978)가 1958년 완성한 현대적이며 구축적인 공간을 잘 살려 작품의 맛을 더했다. 역시 작품이란 공간을 잘 만나야 하며 건축과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새기게 해주었다. 큐레이터가 공간을 읽고 그것을 작품에 녹여내는 탁월한 감각과 실력이 전시의 격을 올려주었다.
우고 론디노네 전시 장면
올리베티 전시관
안토니 곰리 전시 장면
지난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독일과 유럽 전역에서 회고전 열풍을 일으켰던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1921~1961)의 전시회도 치니 궁전(Palazzo Cini)에서 나를 기다렸다. 약 40여 점의 작품은 인간과 신체의 모습 그리고 시각적 개념적 세계에서 동물의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다룬 작은 소품 위주의 전시다. 미술이 사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즉 미술을 개인의 창의성을 일깨우고 정치적 인식을 고취하며 사회 변화를 자극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치유적인 힘으로 간주했던 그의 참여와 실천의 예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 평화에 대한 열망, 사회적 헌신과 영적 탐구로서의 예술적 노력 등 오늘날 현대미술이 고민하는 주제와 접근 방식을 이미 실천에 옮겼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요셉 보이스 전시 장면
조르지오 마조레 섬에서 열리는 조르지오 치니 재단(Giorgio Cini Foundation)과 토르나부오니 아트(Tornabuoni Art)가 공동으로 마련한 《불(On Fire)》전은 모양과 무게 그리고 밀도가 없는 덧없는 불을 주제로 하여 그것이 다른 재료나 미술에 끼치는 잠재적인 영향과 적극적인 힘에 주목한 전시다.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1915~95), 이브 클라인(Yves Klein,1928~62), 아르망(Arman,1928~2005), 피에르 파올로 칼조라리(Pier Paolo Calzolari,1943~ ), 야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1936~2017)와 클라우디오 파르미지아니(Claudio Parmiggiani, 1943~ )의 작업을 통해 존재로서의 불을 보여준다. 특히 불을 가지고 그 파괴적 효과와 생성적 효과를 이용하는 작업들을 통해 현대미술의 시각적 언어에 혁신적인 매개체가 된 불을 탐구한다.
《ON FIRE》전시 전경
개인전 외에도 프라다 파운데이션의 《인간의 뇌(Human Brain)》전은 학제간, 그리고 고대와 현대를 잇는 융복합의 전형적인 전시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2018년부터 신경과학 분야에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한 결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두뇌, 그 기능의 복잡성, 인간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이해하려는 열망이 이 전시를 실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특히 철학과 신경 생물학, 심리학과 신경 화학, 언어학과 인공 지능 및 로봇 공학 등을 다루면서 미술관이 과학을 다루는 지적, 정치적 도전을 실행에 옮겼다. 바로 이런 전시가 진정한 융복합 전시인 동시에 시간과 주제를 걸러 올라가 역사와 미래를 동시에 다루는 새로운 미술관학의 실천적인 전시라는 점을 새기게 한다.
The Conversation Machine. Video interviews and orchestration by Taryn Simon. Produced by Fondazione Prada for the project Human Brains
네덜란드관 근처의 스쿠올라 그란데 델라 미세리코르디아(Scuola Grande della Misericordia)에서는 《THIS IS UKRAINE: DEFENDING FREEDOM》이 열리고 있다. 격년으로 미래 세대의 작가들을 선발해 시상해 오던 우크라이나의 핀축 아트센터(Pinchuk Art Centre)가 올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의 실상을 알리고 고발하는 의미에서 우크라이나 작가 3인과 그간 이곳에서 전시를 가졌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1946~ ),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1967~ ), JR(1983~ ), 데미안 허스트 (Damien Hirst, 1965~ ), 보리스 미하일로프(Boris Mikhailov,1938~ ),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 1962~ )등의 작업을 통해 반전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보는 것이 고통스러운 전시다.
무라카미 다카시 <우크라이나: 전쟁과 평화>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