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はすごいですね. ほんとうに羨ましい.’(한국은 대단하네요. 정말 부러워.)
‘でも、日本もよく頑張ったじゃないですか’(그런데 일본도 열심히 잘 하지 않았나요.)
‘ええ、日本はぜんぜんダメですよ.’(아니요, 일본은 전혀 틀렸어요.)
2002년 여름 일본에 있었던 한국인들은 주위에서 ‘한국은 대단해요’라는 말을 들으면서 우쭐한 기분을 한껏 즐겼다. 당시 공동개최한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은 연전연승 중이었다. 일본도 조별리그는 1위로 통과했으나 16강에서는 그만 터키에 지는 바람에 열기가 반으로 줄었다. 그래서 대단한 성적을 내는 이웃 나라 한국팀을 몹시 부러워했고 과거라면 하기 힘든 ‘한국이 부럽다’는 말도 축제의 열기 속에서 웃음 가득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건넸다. 당시 일본 극성팬들은 도쿄의 한국인 거리인 신오쿠보에까지 나와 한국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함께 응원도 했다.
이렇게 월드컵 기간 만큼은 적어도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과거 따위는 완전히 잊고 지냈다. 만나면 웃는 얼굴로 서로 인사를 나누며 또 서로 축하하고 격려하면서 축구공이 가져다준 평화를 100% 즐겼다. 축구공은 응원에서만 두 나라를 맺어준 데 그치지 않았다. 한국과 일본은 월드컵 공동주최를 기회로 상대의 나라에 각각의 문화를 심도 있게 소개할 기회로 삼고자 약속했다. 그래서 한일(일한) 문화재교류 특별전이 마련돼 각각 한국과 일본에서 열렸다. 한국 미술은 한일국교 정상화 10주년을 기념해 이미 1976년에 일본에 크게 한번 소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월드컵에 맞춰 기획된 특별전은 그때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2002년에 일본에서 열린 한국 전시의 타이틀은 ‘한국의 명보(名寶)전’이었다. 이름난 보물이라는 제목 그대로 출품작 270여 점 가운데 4분의 1가량인 국보(31점), 보물(39점)로 채워졌다. 거기에는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국보 제87호), 기마인물 토우(국보 제91호), 고려청자 투각칠보문 향로(국보 제95호), 백자 철화매죽문 항아리(국보 제166호),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보물 제213호), 김홍도 <풍속화첩>(보물 제527호) 등 국내에서도 한자리에서 보기 힘든 유물들이 다수 포함됐다. 이들 한국대표 미술품은 월드컵 개막에 앞서 3월15일부터 오사카역사박물관에 먼저 소개됐다. 그리고 월드컵이 개막된 직후에 도쿄로 옮겨져 도쿄국립박물관에서 다시 선사·삼국, 불교미술, 고려청자, 조선도자, 회화·서예, 궁정·양반 등 6개 테마로 나누어 6월11일부터 7월28일까지 소개됐다. 이 전시는 한국 축구팀의 연전연승 뉴스와 함께 일본 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뜨거웠던 월드컵 열기에 묻혀 입장객이 많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2002년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의 관람객 베스트10 전시를 보면 모두 월드컵 기간과는 무관한 봄가을 전시들이 차지했다.(참고로 이 해 가장 많은 관람객을 모은 전시는 3월부터 6월 초까지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에서 열린 ‘프라도 미술관’ 전시로 51만6천 명이 관람했다)
엄청난 기획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열기를 넘어서지 못한 일본에서의 한국 특별전과 달리 서울의 일본미술전은 큰 히트를 쳤다. 전시 타이틀은 비슷하게 ‘일본미술명품’전이었다. 5월14일부터 7월14일까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에는 고고 자료, 공예, 조각, 회화, 서적·고문서 등 5개 분야에서 총189건 298점이 출품됐다. 또 도쿄의 한국 전시처럼 국보, 보물(일본에서는 중요문화재라고 한다)이 다수 포함돼 국보 17건의 24점에 중요문화재 72건 104점으로 꾸며졌다. 일본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를 한꺼번에 외국 전시에 내보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 문화재의 한국 전시에 자문을 해준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속된 말로 ‘일본이 미쳤나’라는 말을 주고받았을 정도이다. 한국 측에서 원했던 유물 요청을 거의 대부분 들어주었다. 일본이 특별전에 이토록(?) 정성을 쏟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월드컵을 계기로 기획이 됐으나 이 전시가 한국에서 일본미술을 대규모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첫번째 기회였기 때문이다. 과거 한일국교 정상화 10주년을 기념하면서 한일 교류전을 기획했었으나 당시만 해도 한국 내 여론 때문에 상호 전시는 무산되고 도쿄의 한국 전시만 열렸다.
한일 관계에서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고 사회 기류가 바뀐 것은 1998년 가을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도 한일 문제는 어업협정 문제 등으로 삐걱거렸다. 그러나 ‘준비된 대통령’을 자임했던 당시 김대중 전대통령은 선린(善隣) 관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일 두 나라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고 일본으로 날아가 당시 오부치(小淵) 일본 총리를 만나면서 함께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공동선언의 제2조를 보면 ‘한·일 양국이 21세기의 확고한 선린 우호 협력 관계를 구축해 나가기 위해 양국이 과거를 직시하고 상호 이해와 신뢰에 기초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로써 한국과 일본에는 다 함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계기가 마련됐다. 월드컵 공동개최는 그 실천 활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본미술의 서울 전시는 월드컵이 직접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대중, 오부치와 같은 큰 정치가들이 보여준 미래를 향한 비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 처음 일본미술전이 열리게 되자 일본은 정말 많은 정성을 쏟아부었다. 한국 측도 일본미술이 처음 소개되는 만큼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아무도 향방을 점칠 수 없는 대일(對日) 기본정서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시에는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도검(刀劍)류나 갑주(甲冑)류가 포함되는 것을 극구 꺼렸다. 출품작은 한일이 함께 선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관계자는 이를 위해 3번이나 도쿄로 날아가 내용을 조율했다.(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는 초상화 부문에서 송시열이 아닌 왕의 초상을 원했다. 그래서 단 한 점 있는 영조 초상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또 백제의 용봉향로도 보내줄 것을 원했으나 두 점은 결국 보내지지 않았다)
일본에서 열린 ‘한국의 명보전’이 한국 역사 전체를 훑으며 각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을 소개한 것처럼 일본 역시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조몬(繩文)시대부터 고분(古墳)시대를 거쳐 헤이안(平安),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 모모야마(桃山), 에도(江戶)시대까지의 미술 전체를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급 미술이 포함됐다. 이를 위해 도쿄, 교토, 나라 등의 3대 국립박물관 외에 일본 문화청, 궁내청이 협력했다. 그리고 선사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사이타마 현립미술관, 아오모리현 교육위원회과 조선 청화백자에 영향을 받은 아리타 도자기전문미술관인 사가현립규슈도자문화관 등 13개 기관이 유물을 출품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미술 특별전은 한국에 앉아서 일본미술 전체를 한꺼번에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됐다. 또 도록도 충실하게 제작했다. 자세한 도판 해설 외에도 일본 역사 전체에 대한 개관과 시대별 미술의 특징과 상세한 연표 그리고 일본미술에만 보이는 용어까지 130여 건을 추려 해설을 덧붙였다. 그래서 이 도록은 말 그대로 한 권의 일본미술사 책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에는 일본미술을 전공한 연구자가 없었다. 일반이 접할 수 있는 일본미술 관련 서적이라고 해도 몇 권에 불과했다. 1978년 일본 불상연구가 구노 다케시(久野健)가 쓴 책을 진홍섭 교수가 번역한 『일본미술사』(열화당)가 있었고 또 1997년 고고학자 다케후지 마코토(武藤誠)의 『일본 문화사-일본의 미술과 역사』를 강덕희가 번역한 『일본미술사』(지식산업사)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화염형 토기> 조몬중기 BC2500-BC1500년 높이 39.5cm 문화청
<성장남자 하니와> 고분시대 6세기 높이 111.9cm 도쿄국립박물관
이렇게 한국에 온 일본미술은 큰 관심의 대상이 됐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끈 하이라이트를 추려서 소개하면 첫 번째로 꼽을 수밖에 없는 유물이 <화염형 토기>이다. 이는 신석기 시대의 고대일본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동시에 어딘가 현대 일본 공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물씬한 토기이기도 하다. 닭벼슬처럼 보이는 장식은 역사가 길기로 이름난 중국의 고대유물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장식이 무엇을 뜻하며 또 이와 같은 장식을 한 토기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일본 미술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일본 고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유물로 토우가 있다. 속을 비운 인물형상의 토우는 일본에서 하니와(埴輪)라고 부른다. 이는 능묘 가장자리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백의 아흔아홉 정도는 산산 조각난 채 발굴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어떤 의도 아래 조각을 내서 파묻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군마현 요쓰츠카(四塚) 고분에서 나온 이 성장(盛裝)한 <남자형 하니와>는 귀밑에 말려 올라간 머리 문양을 보인다. 이는 한국에서도 친근한 성덕태자상 같은 데서 보이는 고대 머리 장식의 하나로 미즈라(角髮)라고 한다.
<부채모양 뚜껑 있는 오리베 접시> 모모야마시대 17세기 29.7x24.8x11.3cm 교토국립박물관
일본의 도자기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전시에는 조선도공 이삼평(李參平 ?-1655)이 찾아낸 백토로 제작한 에도시대의 이마리(伊万里) 청화백자가 몇 점 소개됐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일본 전통도자기의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작이 <부채모양 뚜껑 있는 오리베(織部) 접시>이다. 오리베는 다성(茶聖) 센노 리큐(千利休)의 제자이면서 다기에서 변형의 미를 추구했던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를 가리킨다. 리큐 자체도 조선 사기 그릇의 평범한 맛에 이끌려 새로운 다기 세계를 열었는데 오리베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껏 변형의 미를 추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오리베 도자기는 일본의 전통적인 도기산지인 미노(美濃) 가마에서 제작했다. 부채꼴 모습의 도기에 보이는 초록색 유약-동녹유(銅綠釉)라고 한다-은 오리베 야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원형, 사각형이 아니라 이렇게 변형된 도자기를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 쓰고 즐기는 것은 일본 도자기에만 보이는 취향이기도 하다.
<귀인수레 문양 마키에 연상> 에도시대 17세기 22.4x20.9x4.5cm 중요문화재 도쿄국립박물관
일본의 공예 가운데 고려의 상감청자처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일본 기법으로 손꼽히는 것이 마키에(蒔繪) 기법이다. 이는 칠로 용기에 문양을 그린 뒤 굳기 전에 금가루나 은가루를 뿌려 장식을 더한 것을 말한다. 마키에 기법을 쓴 칠기는 처음에 남자용으로는 벼루 상자, 그리고 여자용으로는 화장대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기법은 에도시대 들어 네덜란드 등 유럽에까지 전해져 프랑스의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도 이 기법을 써서 만든 서견대와 화장합을 컬렉션했다.
<다이코쿠텐 목조입상> 가마쿠라시대 13-14세기 높이 69.5cm 나라국립박물관
일본은 목조각 전통이 뿌리 깊은 나라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나라(奈良) 시대에 만들어진 목조 불상이 수도 없이 전한다. 에도시대에는 서민 신앙의 대상까지 목조각으로 만들어 모셨다. <목조 다이코쿠텐(大黑天) 입상>은 그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다이코쿠텐의 지물인 작은 망치는 보이지 않지만 자루를 짊어진 채 달려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사실적인 묘사는 근대 조각의 하나를 보는 듯하다. 다이코쿠텐은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신이다. 에도 시대에 들어서 칠복신의 하나로 주로 서민들의 부엌이나 식당에 놓여 음식신이나 재물신으로 모셔졌다.
<노가면 목조 고오모테> 무로마치시대 15세기 길이 21.2cm 도쿄국립박물관
일본 전통예능 가운데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노(能)다. 노는 가면을 쓴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하는 가면극의 일종으로 무로마치(室町 1336-1573)부터 성행했다. <노(能)가면 목조 고오모테(小面)>는 서구에도 널리 알려진 여성 가면의 대표 격이다. 아래 볼이 불룩한 시모부쿠레 얼굴(下膨れ顔)은 일본 여인의 전통적인 모습이다. 여기에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오하구로(お齒黑, 이가 검은)와 눈썹을 밀고 이마 위쪽에 검게 눈썹을 새로 그린 히키마유(引尾)의 전통 화장술이 장식돼 있다.
작자미상 <조수희화>(단편) 헤이안시대 12세기 지본수묵 30.8x83.3cm 도쿄국립박물관
<조수희화(鳥獸戱畵)>는 고려 후기에 해당하는 헤이안 시대의 그림이다. 사람 모습을 한 개구리, 원숭이, 토끼 등이 즐겁게 노는 장면을 그린 특이한 모습이 담겨져 있다. 현재 4건이 알려져 있으나 그림 속의 놀이나 사람 모습의 동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이 그림의 존재로 인해 일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만화의 원형이 이미 12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자랑하고 있다.
가노 히데노리(狩野秀賴) <다카오 관풍도> 모모야마시대 16세기 지본채색 149.0x364.0cm 국보 도쿄국립박물관
채색화는 가라에(唐畵)라고 불린 수묵화와 달리 일본 전통그림의 한 갈래이다. 남녀 두 그룹이 서로 나뉘어 단풍 구경을 하는 모습을 그린 <다카오 관풍도(高雄觀楓圖)>는 한 폭만 전하는 병풍그림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역이었던 모모야마(桃山 1568-1600) 시대를 대표하는 채색화로 유명하다. 두 그룹으로 나뉘어 음식과 가무를 즐기는 사람들의 사실적인 묘사와 주변 산과 강의 장식적인 표현은 모모야마 시대 채색화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오른쪽에 구름 속에 보이는 탑이 있는 절이 교토에서 단풍으로 유명한 다카오 산의 신고지(神護寺) 절이다. 왼쪽에 도리(鳥居)를 지나 눈 덮인 산길을 가는 사람들이 보이는 곳은 다카오 산 맞은편에 있는 아타고 산(愛宕山)의 아타고 진자를 그렸다.
작자미상 <낙중낙외도> 에도시대 17세기 지본채색 124.0x272.8cm 국립역사민속박물관
활기찬 도시 풍경을 파노라마로 그리는 일은 이미 중국의 북송 시대부터 시작됐다. 당시 화가 장택단이 수도 개봉 시내를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일본에서도 모모야마 시대에 들면 수도 교토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파노라마식으로 그린 이른바 <낙중낙외도(洛中洛外圖)> 병풍이 크게 유행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 병풍을 충성을 맹세한 무장에게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전하는 것만 70여 점에 이르는 가운데 지바현 사구라 시에 있는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품은 에도시대 초기 것으로 유명하다. 금분을 쓴 구름-이는 구모도리(雲取り)라고 한다-으로 적당히 내용을 구분하면서 교토를 가로지는 가모가와(鴨川) 강과 니조 성(二条城) 앞의 대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이 병풍은 2016년 가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연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전에도 다시 빌려와 국내에 소개됐다).
이토 자쿠추 <석등롱도> 에도시대 18세기 지본수묵 각159.1x360.8cm 교토국립박물관
에도시대 수묵화로 눈길을 끈 그림은 교토의 이색화가 이토 자쿠추(伊藤若冲 1716-1800)가 그린 <석등롱도(石燈籠圖)>이다. 그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 강세황(1713-1791)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시대 일본에서는 문인화 풍의 남화(南畫)가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그림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강한 채색화 그리고 콘트라스트가 강한 수묵 필치로 그린 동식물 그림 등을 많이 그렸다. <석등롱도> 역시 그 하나이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석등과 돌난간을 묘사하면서 인상파 화가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을 연상시키는 기법을 쓴 점이다. 점묘 수묵화라고 할 그의 이런 독특한 묘사법은 이후 에도에서도 두 번 다시 그려지지 않았다.
<일본서기> 22, 24권 헤이안시대 9-10세기 28.0x1093.0cm 국보 교토국립박물관
전시에는 일본의 오랜 문예 전통을 보여주는 전적도 다수 포함됐다. 그중에는 일본 시가를 상징하는 <만요슈(万葉集)> 외에 일본 최초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도 일부 포함됐다. 서울에 소개된 <일본서기>는 22권의 스이코 천황기(推古天皇紀)와 24권의 고교쿠 천황기(皇極天皇紀)이다. 두 사람 모두 신라의 선덕여왕처럼 여제(女帝)였다.
일본미술명품전은 전시 기간에 ‘혹시 예상치 못하는 사건이라도 일어나면’ 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그것은 한갓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대성공을 거뒀다. 미술 관련의 전문가 외에도 호기심 많은 미술 애호가 그리고 일본문화에 관심을 가진 호사가 등이 몰려오면서 전시는 무려 44만 2,707명이라는 놀라운 입장객 수를 기록했다.
이런 성공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오부치 수상을 만나면서 선제적으로 실시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라는 카드도 큰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1998년 가을 들어 김대중 정부는 그동안 금지됐던 일본대중문화를 과감하게 개방했다. 당시만 해도 부산 같은 데서는 TV에서 일본 TV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었다. 또 불법 비디오테이프, DVD 등으로 일본 영화, 만화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볼 수 있었다. 그런 표리 불일치를 김대중 전대통령은 우선 만화와 국제영화제 수상 영화를 해금하면서 기정사실화했다. 이후 일본대중문화는 단계적으로 개방의 범위를 넓혀 ‘왜색’ 운운하는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이런 환경 아래에서 일본 문화재의 첫 소개 특별전은 아무런 문제 없이 무사히 막을 내렸다. 이때의 성공은 양국 간의 미술전 교류가 본격화 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시가현립박물관과 공동으로 ‘일본 비와코 지역의 불교미술’전을 개최했으며 또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도 고베시립박물관과 공동으로 ‘근대일본이 본 서양’이란 특별전을 개최했다.
월드컵과 함께 열린 ‘일본미술명보’전의 후기를 조금 더 곁들이면 이후 두 나라 국민 사이의 선린우호 정신은 그 이듬해 본격적인 모습으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2003년 4월 일본 NHK는 <후유노소나타(冬のソナタ)>를 위성TV로 방송했다. <후유노소나타>는 월드컵 직전에 서울서 방영돼 큰 인기를 끈 드라마 <겨울연가>의 일본 제목이다. NHK는 위성TV에서의 방영이었음에도 높은 시청률이 나오고 인기를 끌자 12월에 이를 다시 방송됐다. 그런데 오히려 재방송으로 인기가 더 오르고 시청자들로부터 종합 TV에서의 방영 요청이 계속돼 결국 2004년 4월에 NHK 종합TV에서 방영하기에 이르렀다.(이 방송도 인기가 높아 그해 가을에 다시 한번 방송됐다) 이렇게 해서 일본 내에서 거대한 ‘후유소나’ 붐이 일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 매료된 수많은 일본의 오바상 팬들이 한국을 찾아오면서 일본인 관광객 시대가 새롭게 열렸다.
월드컵 공동개최인지 한일 문화재교류 특별전 때문인지(일본에서의 이쪽의 공적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리고 <후유소나>의 덕분으로 그 무렵 한국과 일본은 바다 위에서 몇 센티미터, 몇 미터씩 서로의 쪽으로 다가가는 듯했다. 김대중 전대통령과 오부치 전수상이 시작한 밧줄 끌어당기기에 많은 사람이 동참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새로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넓혀 가고 있었다. 요즘 들어 한일관계가 다시 후퇴하는 모습을 보면 김대중 전대통령과 오부치 전수상 같은 대정치가가 다시 등장해주길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요즘 사정을 보면 아마도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 듯한데 그렇다면 적어도 <겨울 연가> 속편이라도 하루 빨리 제작돼 옛 친선 무드가 되살아나기를 바라고 싶은 심정이다.
마지막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얘기로 이 글을 정리하면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전시를 위해 상설전시실, 고고자료실, 서적고문서실, 공예실, 회화실 등 5개 전시실을 모두 비워 특별전 공간으로 내주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중앙청 건물을 철거하고 공무원 사회교육관으로 쓰던 건물을 임시 국립중앙박물관이 협소했던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미술 명보전’이 열릴 무렵은 용산 새 박물관의 신축 작업이 본궤도에 올라 있었다. 그래서 박물관 쪽에서도 본격적인 이전 계획이 수립하고 준비를 해야만 했던 때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전시는 경복궁 내 사회복지관 건물 시대의 마지막 특별전이 됐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은 특별전 없이 상설전 교체 등으로 업무를 줄이면서 이전 준비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2006년 10월28일 용산 박물관이 정식 준공되면서 새로운 용산 시대를 맞이했다.(*)
* 이번 회에 소개한 용산 이전시대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열린 마지막 전시를 끝으로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들의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 가져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