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고려시대까지 국교였던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취했다. 조선 개국의 선봉에 섰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이라는 저술을 통해 성리학적 입장에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해 숭유억불정책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이 후 성리학자들에 의해 불교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는 지속되었다. 성리학이 국가의 이념으로, 성리학자가 위정자로 활동하고 있었기에, 정책적인 부분에서도 불교사원의 통폐합, 승려의 환속 시행 등으로 실제 반영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시대에 비해 불교의 사세가 위축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사회 전반에 고려시대까지 거의 천 년이 넘게 확산되어 토착화 된 불교를 물리적으로 규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국교이자 왕실, 귀족, 민간까지 폭넓게 자리하고 있었던 종교이자 신앙이었고, 왕실에서는 문종의 아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1055-1101)과 같이 여러 왕자들을 출가시킬 정도로 깊게 간여하고 있었다.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여러 관련 행사나 의물, 불화 등의 형식도 뚜렷하게 갖추려 했다. 종교적 사세는 민간까지 넓었지만, 일정부분 왕실과 상류층에 한정된 문화도 분명 존재했다.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은 전반적인 불교의 사세를 위축시켰지만, 향완을 비롯한 관련 공예품의 조형과 문양의 배치, 표현은 기존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화되기도 했다. 이는 재료 수급과 같은 여러 사회 경제적 요인도 존재하지만, 기존 왕실과 상류층 위주가 아닌 토착신앙과의 결합 등과 같은 민간 사회와 밀접하게 융화되어 변화, 확산된 까닭도 있다. 조선시대 전개된 이러한 융화와 확산은 기존의 규범을 지키면서도, 상황에 따라 이전에 비해 유연하게 재료를 사용하거나 조형을 적용하며 관련 공예품을 제작하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전반적으로는 고려시대보다 사세가 위축되어 재료의 사용이나 조형이 화려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지만, 문양과 조형의 소재 및 표현, 재료의 사용은 한층 다양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고려시대까지 이어온 전통과 규범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적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조선시대 입사기법으로 장식된 향완은 고려에 비해 수는 많지 않지만, 고려에서 전해진 조형과 상징문양을 그대로 갖춘 향완부터 기본 형태와 상징문양을 수용하면서 일부 변화를 준 향완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도1. <지정12년명 용장선사명 향완>, 고려 1352년, 북한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홍무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 조선 1397년, 국립중앙박물관의 형태 비교.
먼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홍무30년 청곡사명 청동은입사향완>(1397)은 고려시대부터 계승된 향완의 형태와 문양의 배치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향완이다. 조선 개국(1392) 후 5년 만에 제작된 향완으로, 현재 전해지는 향완 중 유일하게 조선 왕실에서 발원해 제작한 유물이다. 명문에 따르면 태조가 왕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1356-1396)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한 향완으로, 개국 초 제작된 향완인 만큼 고려의 향완 형식을 온전히 따르고 있다. 조선이 숭유억불정책을 취하긴 했지만 왕실에서도 일정부분 불교를 믿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향완은 이 유물이 유일하지만, 왕실에서 발원한 다양한 불교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조정의 심한 반발에 부딪쳐서인지, 고려시대보다는 불교 관련 공역과 공예품, 불상 등의 왕실 제작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외의 유물들은 사찰에서 조성하거나, 신자들과 함께 조성한 것으로 대부분 명문을 통해 제작사유와 제작시기가 확인된다. 고려시대 향완과 전체적인 형태, 향을 담는 신부와 이를 받치는 대부 구성은 동일하다. 다만 상징문양의 배치와 구성, 재료의 사용, 향완의 세부 형태에 차이가 있어, 고려의 전통과 구성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식으로 변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도2. <만력12년 백장사명 청동은입사향완>, 1584년, 금산사 성보박물관 / <순치10년 동화사명 청동은입사향완>, 1653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신부 문양 장식의 변화 사례를 보면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만력12년 백장사명 청동은입사향완>(1584)의 경우 고려시대 각 면에 범어문을 배치했던 것과 달리, 한 면에 5자의 범어문을 모두 배치했다. 나아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에 소장된 <순치10년 동화사명 청동은입사향완>(1653)은 신부 전체를 범어문이 아닌 사격자문(斜格字文)을 반복적으로 입사 장식한 모습이 확인된다.
도3. 도2 유물 신부 문양 세부
재료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는데, 기존과 마찬가지로 청동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유기(鍮器)를 만드는 유동(鍮銅), 철(鐵)로도 제작된다. 이는 17~18세기 동전주조, 무기제작 등과 맞물려 전개된 조선의 구리, 주석의 수급상황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입사로 장식된 유물은 아니지만 <숭정6년 선암사명 유제향완>(1633)과 같은 유물들은 조선시대 이러한 재료의 변화를 보여준다.(이용진, 「한국 불교향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도4. <기미년 부석사명 철제은입사향완>, 1739년 추정, 동국대학교 박물관
한편,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기미년 부석사명 철제은입사향완>(1739년 추정)은 조형, 재료의 변화를 모두 보여주는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유물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철로 제작된 향완으로, 끼움입사가 아닌 조선 후기 성행하였던 쪼음입사로 문양이 장식된 유물이다. 이전과 다르게 원통형으로 제작된 신부에는 범어문이 배치되어 있지만, 그간 범어문을 감쌌던 당초문은 범어문의 상, 하단에 띠처럼 구성되어 다른 유물과 차이가 있다. 또 받침대에는 투조로 팔괘(八卦)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 문양의 배치 사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도5. 도4의 신부와 대부 문양 세부
이 향완은 전통적으로 계승된 향완의 구성인 신부와 신부를 받치는 대부로 구성을 유지하면서 당시 금속공예에서 많이 사용한 재료인 철과 성행했던 입사의 세부기법인 쪼음입사 기법을 적용했다. 이는 고려에서 계승한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당시의 경향과 상황을 함께 반영해 적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