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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23. 천하 명필 한석봉의 뒤늦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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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 한호: 한국서예사 특별전 17
예술의전당 서예관 1997.6.5.-6.22일



조선은 뼛속까지 신분제 사회였다.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 최대의 성공인 나라에서 양반이 아닌 사람들은 신분 하나로 재능, 심성 나아가 교양과도 무관하게 심하게 평가절하됐다. 성종 때 그림 잘 그린 화가 석경은 재주를 아낀 왕이 그를 정3품 당상관으로 직위를 올려주자 하자 사대부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반발하면서 결국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런 사례는 조선 시대 내내 비일비재했다. 조선 3대 명필의 한 사람인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도 ‘글씨 재주 하나를 믿고 까분다’는 얘기를 숱하게 들었던 사람이다.

그래도 이들이 후대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든든한 후원자가 있기 때문이다. 석경에게 성종이 있다면 석봉에게는 선조(재위 1567-1608)가 있었다. 선조는 정치적 감각과 대국을 판단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지만 문예 방면에서는 뛰어난 군주였다. 그는 방계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왕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학문에 매달렸고 그와 같이 노력하는 중에 사대부들의 전유물인 시서화(詩書畵)에 스스로 일가를 이룰 정도가 됐다. 선조는 역대 조선의 어느 군왕보다 시를 잘 지었다. 또 글씨도 잘 썼으며 그림도 뛰어났다. 자기 내부에 이런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솜씨를 판단하는 눈매도 날카로웠다. 그는 화가 중에는 이징(李徵 1581-1674경)을 총애했다. 이징은 임진왜란을 전후해 중요한 그림을 도맡아 그리면서 국수(國手)라고 불린 솜씨였다. 글씨에서 선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서가(書家)가 한석봉이다.

석봉이 괜히 총애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조선 전기의 명필 안평대군 이용과 후기를 대표하는 추사 김정희와 나란히 조선 3대 서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글씨는 18세기 들어 개성적인 글씨가 선보이기 전까지 거의 100년 넘게 시대를 풍미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조선의 글씨’ 하면 누구나 한석봉을 먼저 떠올렸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 시절 습자(習字) 시간에는 당연히 한석봉 천자문을 펼쳐 놓고 글씨를 베껴 썼다. 교과서에도 한밤중에 불을 꺼 놓고 어머니와 떡 썰기 대결을 벌인 일화가 실려 있었다(이 일화에 대해 근래 들어 신빙성을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전문가 사회에서는 생전에도 그랬지만 죽어서도 일개 사자관(寫字官)에 불과하다는 식의 폄하가 계속됐다. 그와 같은 사정과 관련이 있으라고는 절대 볼 수 없지만 어쨌든 조선시대 3대 서가의 한 사람인 한석봉의 글씨 세계를 보여주는 전시가 뒤늦게 1997년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렸다(굳이 추사와 비교하자면 추사의 첫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1956년, 전쟁의 포연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열렸다). 

‘석봉 한호’ 특별전은 이해 6월 5일 우면산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개막됐다. 이는 서예관이 개관 이래 지속적으로 소개해 온 ‘한국서예사’ 정리를 위한 17번째 특별전이었다. 전시에는 해서, 행서, 초서 그리고 고문서와 액서(額書) 및 현판으로 나눠 62건이 소개됐다. 전시 출품작의 감수는 임창순 선생과 최완수 선생이 맡았다. 두 선생은 그 무렵 한국 서예에 관해 저술이 있는 유일한 분들이었다. 임창순 선생은 1981년 도쿄의 곤도(近藤) 출판사에서 『한국의 서예』를 냈고 최완수 선생은 그보다 앞서 1978년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시리즈로 낸 교양국사총서의 하나로 『그림과 글씨』를 펴내면서 고신라에서 고려까지의 서예를 개관했다.

한석봉 글씨는 말로만 유명했지 그의 세계가 일반인들 앞에 정식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의 서예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해서이다. 임창순 선생은 그의 해서에 대해 ‘하도 많이 써서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했다. 그는 선조의 조정에서 공식 문서를 거의 도맡아 썼다. 특히 임진왜란이 터진 이후에는 명에 보내는 빈번한 외교 문서는 물론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수들에 보내는 공문서의 대부분을 그가 썼다. 많이 써서 통한 듯 여길 수도 있으나 그는 원래 해서에 특기가 있었다. 그의 해서는 당의 안진경체를 기본으로 삼았다(신라, 고려 역시 해서의 기본은 안진경 체에 두었다).
 
글씨 얘기에 앞서 그의 사람 됨됨이를 소개하면 그는 도화서의 화원처럼 글씨만 쓰던 사자관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이는 큰 잘못이다. 그는 어엿한 문관 출신이다. 개성의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기는 했어도 그는 떡장수를 하는 어머니의 엄한 훈도 아래 학업에 열중한 과거시험 지망생이었다. 그리고 15살 이전에 벌써 생원 시험에 장원 급제했다. 당시 생원시에 급제하면 성균관에 들어가 합숙하면서 공부를 하며 대과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가 15살 때 성균관 전체의 생원을 대표하는 일이 생겼다. 조선에는 왕이 성균관에 행차하면 생원들은 도열해 있다가 왕을 맞이하면서 가끔 직언도 했다. 그런데 당시 행사 주관자가 현장 직소를 못 하게 막자 생원 대표가 된 한석봉이 상소를 올린 것이다. 성균관 생원 합숙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은 말할 것도 없이 대과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거치는 코스였다. 그런 곳에서 대표 역할을 한 것만 보아도 그의 인격적 그릇과 아울러 문인적 자질이 얼마나 출중한지 짐작해볼 수 있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25살에 진사에 급제했다. 하지만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벼슬은 중위직을 전전하면서 종5품의 현령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했다. 글씨는 떡 썰기 일화가 말해주듯 어려서부터 각고의 노력으로 젊은 시절에 이미 이름이 났다.


<해서 천자문> 1583년 목판본(1694년 重刊本) 43x28.5cm   


전시에는 한석봉의 대표작을 중심으로 그의 인생과 관련이 깊은 글씨들이 다수 나왔다. 예를 들면 <해서 천자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쓴 것이다. 1583년에 그는 활인서 부사과로 있었는데 선조가 친히 불러 명해 천자문을 쓰게 했다. 그리고 이는 목판본으로 간행돼 전국에 뿌려졌는데 이는 석봉 글씨에 대한 선조의 신임이 얼마나 각별했나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일이었다. 이 목판본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중간(重刊)되면서 조선 후기까지 대표적인 습자 교본으로 쓰였다.


<해서 박민헌 찬, 서경덕 신도비 명> 1585년 탁본 28.5x16.2cm 


한석봉 또 다른 해서 대표작은 1585년에 세워진 서경덕 신도비이다. 서경덕은 개성을 대표하는 문인이다. 동향의 한석봉에게 각별한 인물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글은 서경덕 문인으로 나중에 전라도 관찰사까지 역임한 박민헌이 지었다. 비석과 묘지명 등에 글씨를 써달라는 주문은 임진왜란 직전의 10여 년간 물밀 듯이 들어왔다. 간혹 그는 자신을 낮추어 ‘비명 글씨를 부탁하셨으나 저같이 천하고 못난 사람이 어찌 솜씨를 드러내겠습니까’하고 거절하기도 했다. 대개 대가집에서 글씨를 부탁하면서 보낸 예물은 하찮은 경우도 많아 꿩 두세 마리일 때도 있었다.  

글씨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진사 급제한 때부터이다. 그리고 30살 무렵이 되면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석봉을 배석시켜 조선의 글씨가 중국에 못지 않다는 것을 은근히 보이게 했다. 1572년에 중국 사신으로 온 등계달(鄧季達)은 석봉 글씨에 감탄하면서 중국에 가지고 가 왕세정(王世貞), 도륭(屠隆) 등에 보였다. 이로 인해 중국에까지 그의 글씨가 유명해졌다. 조선의 서가 중에서 중국에 필명을 날린 사람은 극히 드물다. 전기에는 강희안 글씨를 보고 중국인들이 서로 얻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후기의 사례로는 추사가 중국에서 돌아온 뒤 글씨가 점점 무르익자 중국 문인들이 그의 솜씨를 신품이라고 인정한 적이 있다.

석봉 글씨를 본 왕세정은 명 후반을 대표하는 문인 관료이다. 관직은 병부상서까지 올랐으나 시로서는 명성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 특히 성당시대의 시가 모범이 되야 한다는 고문사파(古文辭派)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조선에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선조는 그가 석봉 글씨를 보고 평한 말이 몹시 궁금했다. 나중에 명에 갔다온 사신이 왕세정이 석봉 글씨를 보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치는 듯한 형세가 있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선조는 ‘그럴 리가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왕세정의 인물 됨됨이는 조선의 도학적 견지에 비추면 좀 속된 데가 있었던 듯하다. 선조는 그런 인물은 글씨를 잘못 볼 수 있다고 하면서 한호는 현판 같은 큰 글씨를 잘 쓰지만 ‘달려가고’ ‘돌을 치는’ 것 같은 초서나 예서는 잘못 쓴다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었다(이런 판단은 최근 연구에 의하면 반대이다. 석봉은 해서를 잘 쓴 위에 대자 보다는 작은 글씨에 묘미가 있다는 게 중평이다).  


<초서 천자문> 1597년 목판본(1861년 중간본) 25.5x18cm  


한석봉이 이런 선조 앞에서 직접 휘호를 한 적도 있었다. 등계달이 한석봉의 글씨를 중국에 가지고 간 다음다음 해로 이때 왕은 한석봉을 불러 안동 도산서원의 현판을 쓰게 했다. 대자를 쓴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석봉을 불러다 글씨를 쓰게 한 뒤에 귤과 유자, 귀한 생선 등을 하사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물론 그가 좋아하는 술도 잊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벼루도 하사했다. 그는 이때 크게 감격해 시를 지어 남겼다. <해서 자작시 구룡연>은 이때 지은 시를 훗날 한가할 때 정서한 것이다.


<해서 자작시 구룡연> 1602년 묵지금니 각 19.5x12.3cm 


한석봉은 글씨만 잘 쓴 것이 아니라 시도 잘 지었다. <해서 자작시 구룡연>에 발문을 쓴 최립은 ‘사람들은 석봉이 글씨에 능하다는 것은 알지만 시가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는 ‘평생 이백을 입에 달고 살아 말하는 사이에 술술 시가 흘러나왔다’고 했다. <초서 이백 시>는 그가 좋아했던 이백 시를 쓴 사례이다. 그는 이백 말고도 당시(唐詩)를 즐겨 읊고 즐겨 썼다. 선조 시대는 시단의 큰 변화가 있었다. 고지식하고 철학적으로 보이는 송시의 시대가 저물고 상큼하면서도 어딘가 인간사 희노애락이 깊은 정이 넘치는 당시의 시대가 열리던 때였다. <행서 당 유우석 시>는 그가 읊던 당시 한 수를 적은 것이다.           


<초서 이백 시 백운가송유십육귀산> 1598년 지본묵서 34.7x22.3cm 

  


<행서 당 유우석 시> 지본묵서 29.4x13cm


<행서 구양수 찬 추성부> 목판본 34.5x20cm 


그는 글씨로 명에 가는 사신 일행을 두 번 수행했다. 첫 번째인 1581년에 갔을 때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외가로 팔촌 되는 개성 출신의 문장가 최립도 동행했다. 또 나중에 의병장으로 싸우다 전사한 고경명도 함께 갔다. 고경명은 이때 그의 인품과 글씨에 감탄하며 시를 한 편 지어주었다. <행서 고경명 시>가 그것이다. 이 역시 그가 62살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에 정서한 대표작 서첩 속에 들어있다. 이 시를 보면 한석봉이 젊어서 왕희지의 환아경(換鵝經)을 썼다고 했다. 실제로 한석봉은 젊어서부터 왕희지를 정조준하고 그의 유려하면서도 기품있는 글씨를 자신의 지향점으로 삼고자 했다.


<행서 고경명시> 1604년 묵지금니 20.4x12.2cm 


그는 글씨가 아니라 진사 급제한 이력으로 중앙의 여러 관직의 전전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왕에게 불려가 글씨를 썼다. 그런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한석봉은 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를 의주까지 따라갔다. 꼭 이로 인한 일은 아니지만 57살에 가평군수에 제수됐다. 가평군수로 있을 때 그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의 탄핵은 처음이 아니라 선조의 명으로 천자문을 쓰고 총애를 받을 때도 탄핵이 있었다. 첫 번째 탄핵 내용은 ‘한호는 마음씨가 과격하고 어리석어 행동과 처사가 서리(胥吏)같이 하므로 사직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안 천하다는 것을 서리에 빗대어 탄핵한 것인데 선조는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가평군수 때에는 더욱 심한 말로 탄핵을 당했다. ‘한호는 위인이 용렬하고 어두워 지리만 차지하고 있으면서 직무는 살피지 않고 간사한 아전의 말만 들어 고을 사무가 모두 아전 속에 맡겨져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도 선조는 ‘그냥 두어라’하고 물리쳤다.

한호의 사람 됨됨이는 사헌부의 탄핵대로라면 몹쓸 사람이지만 실은 그 정반대였다. 몇 달을 걸쳐 중국을 함께 여행한 고경명은 활을 쏘면 버드나무 가지 사이의 잎을 맞힐 정도라고 했다. 평소 도를 좋아해 세속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며 남이 뭐라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헐뜯는 사람은 더욱 약이 올라 험담을 더 하게 마련인데 가평에 이어 흡곡 현령으로 있을 때 세 번째 탄핵의 대상이 됐다. 이때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공신녹권을 발행하면서 글씨 잘 쓰는 한석봉을 불러올려 쓰게 했다. 이때도 사헌부에서는 ‘흡곡 현령 한호는 필예에 소소한 재능이 있다고 하여 과분하게 임용되었으니 각근하게 봉공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교서를 쓰면서 싫어하는 기색이 있고 고의로 오자를 써서 물자를 낭비하기까지 하였으니 지극히 놀라울 뿐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라고 탄핵했다.


<문흥군 유사원 선무공신 교서> 1604년 견본묵서 38.5x20.4cm 


실록을 보면 이때 역시 선조는 그를 비호했다. 선조는 ‘한호가 글씨를 쓰기를 싫어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고의로 오자까지 썼다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간다. 혼자 하는 일도 아니고 여럿이 하므로 두어 장 정도 쓰는 일일 텐데 싫어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말하면서 ‘아마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말았다. <행서 유사원 선무공신 교서>는 임진왜란 전후에 그가 많이 썼던 교서의 하나로 이른바 사자관 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글씨다.


<행서 광한전백옥루 상량문> 1605년 목판본 28.6x19.8cm 


한석봉은 현령임에도 불구하고 불려 올라가 글씨를 쓰고 또 글씨 쓰는 일로 탄핵을 당하게 되자 벼슬에 정이 떨어지게 됐다. 이때 사헌부의 탄핵이 상당히 심했던 듯 파직을 당했다. 이때가 62살 때였는데 그는 미련없이 벼슬 길을 버리고 고향인 개성으로 낙향했다. 그 무렵 인근의 요산 군수로 허균(許筠 1569-1618)이 부임해 왔다. 허균은 한석봉이 30살 때 명나라 사신을 처음 접대하는 자리에 종사관으로 함께 일했던 허봉의 동생이다. 허균은 둘째 형과 가까웠던 한석봉을 여러 번 청한 끝에 초청해 함께 시와 글씨를 논했다. 그리고 누이 허날설헌이 지은 <행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1606년에 조선에 온 주지번(朱之蕃)이 중국에 가져가 그의 이름이 다시 중국에 유명해지는 계기가 됐다. 이때 주지번에 준 허날설헌의 시는 중국에서 시집으로 간행되기도 했다.


<옥산서원 무변루> 편액 


허균을 만나고 돌아온 한석봉은 복중의 여행이 무리였는지 몇 달 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음을 들은 허균은 친하게 지낸 화가 나옹 이정(懶翁 李楨 1578-1607)에게 ‘석봉과 헤어진 지 겨우 몇십 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부음을 들으니 가슴이 떨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견딜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중국에 다시 한석봉 글씨를 소개한 주지번은 ‘석봉의 글씨는 왕희지, 안진경과 서로 갑을을 다툴 것’이라고 했다. 한석봉은 조선 후기 내내 사자관체라고 폄하되는 경향이 있으나 대륙의 문인 눈에는 그가 평생 원한 왕희지의 세계에 어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간 서가로 비춰졌던 것이다.

한석봉 서예전은 예술의 전당 서예관의 개관 이래 가장 많은 관람객을 모은 전시 중 하나가 됐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한석봉의 세계를 깊이 있게 파고든 연구자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있던 이완우 씨가 행적을 중심으로 ‘석봉유사(石峯遺事)’를 도록에 기고했다. 그는 이후 1998년에 국내 연구자로 처음으로 한석봉의 세계를 가지고 서예 부문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국내의 서예 박사 1호이기도 하다(이 글도 「석봉유사」에서 많은 참고를 했음을 밝혀둔다).

참고로 덧붙이면 예술의 전당 서예관은 당초 예술의 전당 건립계획에는 들어있지 않은 시설이었다. 1987년 전후해 서예계의 원로 일중 김충현 선생은 제5공화국의 대통령으로 휘호를 할 기회가 많았던 전두환 씨의 요청을 받아 서예를 개인 지도하고 있었다. 그 무렵 예술의 전당이 세계적인 문화공연 공간이 될 것이라고 대대적인 선전과 함께 공사가 한창 진행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대통령에게 ‘전 세계가 놀랄만한 문화시설을 짓는 것은 좋지만 민족문화를 소개하는 전시관이 하나쯤 있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색적인 건의를 했다. ‘만일 서예관을 짓는다면 서예관은 전 세계의 어디에도 없으니 짓자마자 세계적인 곳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교육관으로 70% 공정을 마친 건물이 급거 용도 변경되면서 1988년 2월15일에 역사적인 서예관이 탄생하게 됐다. 서예관은 이후 서울서예박물관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용도 변경해서 궁색하게 쓰던 건물은 2016년 3월 대대적인 리뉴얼 공사를 마치고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리고 한국의 서예사를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와 함께 한국의 유명 서가들의 세계를 소개하는 특별전도 지속해서 열었다. 석봉 한호 이외에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소개한 전시로 석재 서병오 전(1989), 영운 김용진 전(1990), 자하 신위 전(1991), 추사 김정희 명작전(1992), 원교 이광사 전(1994), 표암 강세황 전(2003), 소암 현중화 전(2007), 창암 이삼만 전(2010), 다산 정약용 전(2012), 최치원 전(2014), 초의선사 전(2016) 등을 열었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3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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