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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22. 때를 잘못 만나 불운했던 서예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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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예 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시대 서적(書蹟)
1980년 10월1일-10월26일




헌걸찬 사람이라도 때를 만나야 영웅이 되는 법이다. 시운이 뒤따르지 않으면 제아무리 뛰어나도 초야에 묻혀 잊히는 게 운명이다. 전시 중에도 그 의미와 무관하게 얄궂은 운명의 장난에 휩쓸려 유야무야(有也無也)되고 만 전시가 있다. 특히 80년대 전시에 그런 불운을 맛본 전시가 더러 있었다. 80년대는 말할 것도 없이 정치적으로 대변화의 소용돌이가 사회를 마구 휘졌던 시대로 몇몇 전시가 여기에 휘말렸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80년대는 새로운 사회변화와 발전이 본격적으로 눈 앞에 펼쳐진 시대이기도 했다. 70년대에 이룩한 경제 발전이 하부토대가 돼 사회 전체가 맹렬한 속도로 현대화되고 있었다.

미술도 이때 큰 발전상을 보였다. 이 시대 들어 소위 저변이 크게 확대됐다. 한국에 본격적인 상업 화랑인 현대화랑이 1980년에 탄생했다. 그리고 훗날 한국 3대 미술관의 하나가 되는 호암미술관도 1982년에 오픈했다. 이 무렵 고미술 애호가, 수집가들의 활동도 전에 없이 활발해 인사동에서는 지금도 ‘그때가 황금시대’라고 회고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물관 활동 역시 역동적이었다. 경복궁으로 옮겨간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직과 예산 등이 조금씩 갖춰지면서 볼만한 전시와 해야 할 전시를 속속 기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불행하게 시대에 휩쓸린 전시도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1980년 10월에 개막한 ‘한국서예’ 특별전이다. 이 전시는 부제-국립중앙박물관소장 조선시대 서적(書蹟)-이 말해주듯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예 작품을 총정리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박물관 소장의 서예 작품은 그때까지만 해도 정리가 다 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 시간을 들여 정리와 보수 그리고 기획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공들인 전시가 ‘한국서예’ 특별전이었다.

그런데 전시는 80년 바로 그해 일어난 대격랑과도 같은 사건들 사이에 파묻히면서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사회 전체는 얼어붙은 듯이 숨을 죽였다. 이후 국보위의 활동, 삼청교육대, 새로운 대통령 선출 등이 잇다른 삼엄한 시대 분위기 속에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아 시쳇말로 ‘찍’소리도 한번 내지 못하고 전시가 끝나고 말았다(이 전시는 나중에 국박 주최의 전시 가운데 1979년 10월 25일에 오픈한 ‘한국 초상화전’과 함께 불운한 전시 1, 2위를 다툰다). 

그렇게 세간의 무관심 속에 약 한 달간 조용히 열리고 막을 내렸으나 이 전시는 한국 서예사에 한 획을 긋는 의미가 충분했다. 당시까지 '서예'하면 으레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떠올릴 정도로 추사 일변도였다. 글씨를 쓰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또 구하는 사람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추사만 찾았다. 추사 전시는 박물관에서도 일찌감치 연 적이 있었다. 휴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56년 12월에 당시 덕수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 100주기(周忌) 추념전’이 열렸다. 12월12일부터 열흘 일정으로 연 전시는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분위기 속에서도 대성황을 이뤄 결국 열흘을 연장해서까지 전시했다.

그러니 ‘한국서예’ 특별전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예 전시로 보면 두 번째 전시가 된다. 이때 조선 초부터 추사를 거쳐 조선 말의 정학교(1832-1914)까지 59건의 작품이 소개됐다. 소개된 서가(書家)는 40명으로 이 가운데는 이름난 명필 외에 성조, 효종, 영조, 정조, 철종 등과 같은 군왕의 글씨와 인목대비의 글씨도 포함됐다. 박물관 소장의 서예 작품은 이왕가박물관 소장과 총독부박물관 수집품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 작품은 옛 표구 그대로여서 상당히 낡았고 또 손상돼 있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적은 예산 때문에 손질, 보존의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런 사정은 최순우 관장도 서문에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 시대 서예와 서적(書蹟)을 진열해보고자 하는 생각은 일찍부터 가져왔으나 원래 옛날 족자나 간첩(簡帖)들이 모두 낡은 것들이어서 진열장에 내놓기에 적당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고 했다.

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서예가의 개성이나 특징을 말해주는 작품보다 간찰이나 시고(詩稿) 같은 소품이 많은 점도 걸렸다. 그렇기는 해도 ‘조선 시대 지식인들의 생각과 서풍 그리고 그로 연유되는 서예사적 계보를 다소간 살필 기회를 제공하고 또 여러 부분의 사료로서의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전시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1년 넘게 박물관을 오가며 기획을 총괄 지휘한 사람은 한학자이자 서예가이며 동시에 금석학 전문가인 임창순(任昌淳) 선생이었다. 그는 당시 문화재위원으로 한편에서는 한문학자 양성을 위해 인사동에 태동고전연구소를 열고 있었다. 한국서예사 정리는 그가 일찍부터 염두에 둔 테마 중 하나였다. 1973년에 이미 동화출판공사에서 펴낸 ≪한국미술전집≫의 『서예』 편을 집필했다. 또 이 무렵 일본 도쿄의 곤도(近藤) 출판사가 한국미술시리즈를 기획하면서 6번째 책으로 예정하던 『한국의 서예』 편의 집필을 의뢰받고 있었다(이 책은 전시가 끝난 다음 해인 1981년 10월에 간행됐다).

이렇게 준비된 전시는 평온한 시대라면 조선시대 서예의 첫 종합전이란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아 마땅했을 전시였다. 그런데 시절이 시절이었던 만큼 전시가 열렸는지 말았는지조차 모른 채 끝이 나고 말았다. 이렇게 비운의 전시가 됐지만 소개 작품의 상당수는 볼 만한 것들이었다. 이후 1984년에 나온 《한국의 미》시리즈 제6권『서예』(중앙일보)나 1986년에 간행된 《한국문화재대계 국보》 시리즈 제23, 24권의 『서예, 전적』(예경출판사)에 다수가 수록됐다.


아쉽게 끝난 전시의 하이라이트를 소개하면 우선 표지의 추사 글씨를 빼놓을 수 없다. 추사 글씨는 구한말과 일제 때에도 유명했으나 이왕가박물관과 총독부박물관의 컬렉션에는 이렇다 할 추사 걸작은 없는 편이다. 그중에서 추사를 대표하는 것이 <해서 묵소거사 자찬(黙笑居士自讚)>이다. ‘당연히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고 웃어야 할 때 웃어야 한다’는 뜻의 묵소거사라는 호를 스스로 짓고 그 뜻을 설명한 글이다. 추사 해서의 백미이다. 참고로 도록의 제목은 홍양호(1786-1857) 행서와 윤순(1680-1741)의 행서에서 글자를 따와 맞춘 것이다. 그런데 홍양호 행서는 출품작에 들어있지 않아 당초에 있었으나 도중에 빠진 듯하다.


양사언 <초서서간> 1566, 40x55.2cm 


중기를 대표하는 글씨는 초서 명필로 유명한 봉래 양사언(1517-1584)의 간찰이다. 이는 50살에 쓴 것으로 수신인은 알 수 없다. ‘초서 글씨를 써서 보내는데 병후에 쓴 것이라 볼만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하면서 보내신 먹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 괴이하다’는 내용을 적었다. 작은 간찰이지만 유려한 필체와 대소 글자의 균형이 분명하다.


한호 <초서 두보시> 감지금니 서첩 26.1x33.2cm


양사언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 석봉 한호(1543-1605) 글씨는 여러 점 소개됐다. 석봉이 쓴 해서 석봉체는 조정의 공식 서체로 자리 잡았으나 출품작은 초서로 쓴 두보 시이다. 내용은 두보가 한때 당나라 궁중의 양감이 보여준 장욱의 초서를 보고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다고 하니 초성의 비결을 얻기 힘들게 됐도다’라고 읊은 시(殿中楊監見示張旭草書圖)를 초서로 따라 쓴 것이다. 해서가 아니라도 반듯한 필치가 석봉의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석봉의 글씨는 대자(大字)보다는 소자가 낫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허목 <행서 백운계기> 서첩 40.4x45.3cm 


임진왜란 이후 등장하는 개성파 서예가를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가 허목(1595-1682)이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전서체(顫書體)로 유명하다. <행서 백운계기(白雲溪記)>도 붓이 흔들리는 모습이 신기(神氣)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행을 즐긴 허목가 여러 편 지은 명승기 가운데 하나가 「백운계기」이다. 백운 계곡은 경기도 영평에 있는 계곡으로 안동 김씨의 세거지 부근에 있다. 글은 ‘백로주를 보고 저녁에 백운 계곡에 이르렀는데 영평의 치소 서쪽으로 5리에 있다’로 시작한다. 허목 글씨 중에서도 예서 기가 분명히 보이는 개성적인 행서이다.


송준길 <해서 사물잠> 서첩 51.9x60cm 


병자호란 이후 활동한 문인관료 동춘당 송준길(1606-1741)의 글씨는 이후 노론 서체를 원형을 이루기도 했다. 전시에는 <해서 사물잠(四勿箴)>이 나왔다. 이는 『논어』 「안연」 장에 보이는 것처럼 안연이 공자에게 인에 묻자 공자께서 극기복례가 인이라고 말한 바로 다음에 군자가 해서는 안 될 행동 4가지를 일러주는 대목이 내용이다. 약간의 행서 기미가 담긴 해서로 썼다.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굵고 두툼한 획의 운필은 그의 특징이다. 


윤순 <행서 칠언절구> 견본 서축 124.7x54.8cm 


임창순 선생은 후기 들어 개성적인 글씨가 등장한다며 그 대표로 백하 윤순(1680-1741)을 꼽았다. <행서 칠언시>는 대폭에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당당한 작품이다. 내용은 주자가 양정수라는 사람이 이소에 대해 물어와 가볍게 답했다는 시(「戱答楊廷秀問訊離騷」)를 행서로 썼다. 첫 구절은 ‘옛날에 읽던 이소가 밤에 뱃전을 두드리는데 강과 호수가 땅에 가득 차니 물이 하늘에 떠있다(昔誦離騷夜扣舷 江湖滿地水浮天)’이다.

조선 서예의 비극에 대해 임창순 선생은 ‘중국 글씨를 배우면서 진적 내지는 진적에 가까운 탁본을 가지고 배우지 못한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중기 이후에 중국에서 첩본(帖本)이 많이 들어왔으나 대개는 왕희지 맛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것들로 여러 번 모사를 거친 것이나 가짜들인데 이를 보고 배운 때문에 글씨를 망쳤다‘고 했다. 원교 이광사(1705-1777)는 당대의 명필로 크게 이름이 났으나 추사는 ‘어느 왕희지를 보고 썼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일축한 적이 있다. 소개 작품은 그 때문에 오히려 조선 글씨 맛이 물씬한 <행서 오언시>이다. 시는 남송시인 육유의 「산록(山麓)」으로 ‘풀이 우거진 산길에 나무꾼을 따라가다가(草合路如線 偶隨樵子行)’로 시작한다.     


이광사 <행서 오언절구> 105.4x56.3cm 


18세기가 되면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져 진적의 전래가 다소 많아진다. 그래서 글씨의 격도 따라서 올라갔는데 그를 대표하는 서예가가 표암 강세황(1713-1791)이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건륭제에게 글씨를 보였을 때 ‘북송의 미불보다는 못 하지만 명의 동기창보다는 낫다’는 말을 들었다. <행서 시고>는 중기의 요절문인 최전(1567-1588)이 남긴 시 「봄날(春日)」를 쓴 것이다. 첫 행은 ‘강물 불어 수양버들 일렁이고 살구꽃 눈처럼 소리 없이 지네(楊柳依依江水生 杏花如雪落無聲)’이다.


강세황 <행서 칠언절구> 33.2x43.6cm   


정조 <행서 증철옹부백도임지행> 1799년 용문 견지 202.5x88cm 



정조는 정이 살가운 군왕이다. 그는 신하에게 좋고 싫다는 감정을 그대로 노출한 편지를 써서 보냈는가 하면 지방에 부임하는 신하에게 이별의 정을 담아 전별시를 자주 써주었다. 대작 <행서 증철옹부백 부임지행(增鐵甕府伯赴任之行)>는 철옹 부사로 떠나는 신하 서형수에게 써준 것이다. 중국에서 수입한 용문양 비단에 제왕다운 씩씩한 행서를 썼다. 시 위쪽은 편지로 변경 땅에 필요할지 모르는 약 4가지와 부채 30자루를 보낸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신위 <행서 료화시> 초화문 견지 67.4x145.8cm 


후기의 명필 자하 신위(1769-1847)는 강세황 만년의 제자이다. 그는 생애 수천 편의 시를 남겼을 정도로 타고난 시인이다. 그림은 대나무를 잘 쳤으며 글씨는 당대에 구하는 사람이 줄을 설 정도로 이름났다. 그래서 그는 조선을 통털어 열 손가락 밖에 안되는 시서화 삼절에 당당히 들어가는 문인 서가이다. 초화문을 찍은 중국제 비단에 여뀌꽃(蓼花)을 읊은 자작시를 행서로 썼다. 이 시는 그의 문집 『경수당전고』에도 실려있는 정원의 가을꽃을 읊은 14수(園中秋花十四詠)중 한 수이다.


김정희 <예서 임한경명> 서첩 26.7x33.8cm


추사 글씨 <예서 임한경명(臨漢鏡銘)>은 후한의 청동거울에 새겨진 글씨(銘)을 베껴 쓴 것이다. 젊은 시절 추사는 옹방강 글씨를 따랐다. 그러나 금석학 연구가 거듭되면서 한나라 예서가 본래의 뿌리임을 깨닫게 된다. <예서 임한경명>은 그와 같은 연구 과정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이후 추사는 제주 유배를 거치면서 졸(拙)과 기(奇)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個性)가 한데 어우러진 추사체를 완성한다.

이 전시가 참으로 아쉬운 점은 당시만 해도 서실(書室)을 다니며 서예를 배우는 서예가 지망생이 일백만오십만은 된다고 호언장담하던 때에 열렸다는 사실이다. 과열 양상을 보이기는 했으나 이때는 국전(國展)의 서예 입상자가 발표되면 서단 전체가 들썩들썩했다. 역사의 가정은 우스운 일이지만 이때 조선 시대의 글씨를 엄선해 보여준 이 전시가 제대로 서단에 소개돼 좋은 반응을 얻었더라면 후속 전시가 반드시 기획됐을 것이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선서예사 정리에서 할 수 있는 일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 이후 서예 전시는 박물관에서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1988년에 예술의 전당에 서예박물관이 오픈된 뒤로는 한국의 서예를 정리하는 작업은 박물관을 떠나 서예관이 도맡아 하게 됐다. 실제로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은 개관 이래 매년 봄가을로 굵직한 전시를 기획했다. 예를 들어 ‘한국서예 백년전’ ‘고려말 조선초의 서예전’ ‘조선중기 서예전’ ‘한국후기 서예전’ ‘한국금석문대전’ 등과 같은 서예 흐름을 정리해 보여주는가 하면 서예가 개인의 재평가를 위해 ‘자하 신위전’ ‘석재 서병오전’ ‘추사 김정희 명품전’ ‘원교 이광사전’ 등을 잇달아 개최했다.

이렇게 1980년 가을에 열린 ‘한국서예’ 특별전은 꼭 필요하고 나아가 볼만한 전시였음에도 불행으로 끝나고 박물관에도 많은 아쉬움을 남긴 전시가 됐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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