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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21. 조선의 옛 서정을 처음 화폭에 담은 大畫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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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특별전
1995년 12월19일-1996년 2월25일





미술하는 사람들이 가끔 술자리에서 하는 말이 있다. 조선 최고의 화가를 꼽는다면 누구를 꼽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어 다르겠으나 크게는 겸재파와 단원파로 나뉜다. 겸재를 지지하는 사람이나 단원을 지지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정연하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진경산수를 창안해 낸 장본인이다.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6 이후)은 또 조선 사회를 상상이 아닌 이미지로 그려볼 수 있게 해준 풍속화의 거장이다. 진경산수도 그렇지만 조선의 풍속화도 한국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내용임은 분명하다.

그 외에 자질구레한 비교도 그렇다.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도 백중이다. 예를 들어 1971년 간송미술관이 개관하면서 개관 기념전을 열었을 때 순서만 겸재가 앞섰을 뿐 나란히 소개됐다. 특별전 제1부에 겸재 전시가 열렸고 단원은 제3부였다. 또 연구서를 보아도 비슷한 분량의 단행본이 간행돼 있다. 그래서 결국에 이는 취향 문제로 맡기고 다시 술잔을 드는 경우가 많은데 단 하나 단원이 겸재보다 앞선 것이 있다. 그것은 단원 김홍도의 대규모 전시가 겸재에 앞서 열렸다는 점이다.

1995년 12월 13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이 오픈했다.(이는 하늘의 때(天時)를 단원이 먼저 손에 넣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겸재의 탄생 250주년은 1926년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 전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눈길을 끌었던 일은 주최자다. 흔히 한국의 고미술, 특히 회화는 세 발 솥이 서 있는 정립(鼎立)에 비유돼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호암미술관이 컬렉션의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각의 장점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왕가 미술관과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이어 과거부터 내려온 명품이 많았다. 그러나 회화는 도자기에 비해 조금 밀린다는 말을 듣는다. 일제 강점기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어 서화를 수집한 간송미술관이지만 해방 이후에 컬렉션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후발의 호암미술관은 막대한 자금력을 배경으로 작품을 수집했으나 출발이 늦은 만큼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세력 균형의 주체들이 흔쾌히 손을 잡고 협력해 함께 단원 김홍도전을 공동 개최한 것이다. 3곳의 공동주최는 이 전시가 처음이었고 이후로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말할 것도 없이 이 전시에는 세 곳의 박물관, 미술관이 자랑하는 명품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또 3곳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함께 기획한 이유로 세상에 숨겨진 미공개 걸작들도 대거 출품됐다. 이 전시에는 8폭 병풍은 물론 몇 점에서 수십 점까지 들어있는 화첩 등을 포함해 90건이 출품됐다. 작품 하나하나로 세면 284점이나 된다. 이 가운데 세상에 그 존재가 처음 알려진 명품도 12건이 나왔다. 전시 출품작에는 국보도 1점, 보물도 2점도 들어있다. 그래서 전시는 개막도 하기 전부터 ‘안복을 누릴 절호의 기회’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기대가 높았다. 막이 열린 뒤에는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말을 들었다. 

개막식에는 3곳 박물관, 미술관 공동주최였던 만큼 3곳 대표가 모두 참석했다. 다만 호암에서는 한용외 삼성문화재단 총괄전무가 대신 참석했다.(이 전시는 삼성문화재단이 비용을 후원했다) 그러나 도록에는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 홍라희 호암미술관장, 전영우 간송미술관장 세 사람의 공동 인사말이 실렸다. 이 글에서 단원은 ‘진경산수화, 풍속화, 남종화는 물론이고 도석인물, 고사 인물, 영모 화조, 사군자, 초상화, 기록화 등 각 부분을 비롯하여 심지어 불화, 판화에 이르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공히 명작을 남긴 대가’라고 소개됐다. 

인사말 그대로 전시는 단원의 각 분야를 빠짐없이 소개했다. 어느 전시나 마찬가지겠지만 전시의 첫 번째 덕목은 관련 작품을 ‘좍’ 소개해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단원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풍속화의 대가라고 하지만 그는 동시에 화조화의 명수였다. 진경산수도 겸재 이후 최고로 꼽으며 또 서정적이면서도 조선 정취가 물씬한 산수화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가 도석인물을 그리면 당시 중국 그림을 많이 본 사람조차도 중국의 명수(名手)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다는 말을 했을 정도다.  

그런 단원의 진면목이 한꺼번에 소개된 전시이므로 개막일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단원은 국민화가처럼 친근한 존재였다. 교과서만 아니다. 민속주점이나 전통 요리를 내는 식당 같은 데에도 단원의 <씨름>이 크게 걸려 있곤 했다. 그림 자체가 낯이 익고 친근한 데다 그 속에 만일 조선 후기의 정서(情緖)를 찾아보라면 이랬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담겨 있다. 또 어떻게 보면 옛 고향의 정경을 그린 것 같은 푸근함도 있다. 특히 그와 같은 느낌은 풍속을 그린 부분에서 두드러졌다. 그러나 그가 가진 고도의 예술성은 주의 깊게만 보면 다른 장르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청심대淸心臺> ≪금강사군첩≫ 1788년(44세) 견본담채, 30.4x43.7cm, 개인 


산수화 하이라이트부터 소개하면 이 전시를 통해 그 존재가 처음 알려진 ≪금강사군첩≫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단원은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에 파견돼 그곳 명승을 그림으로 그려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었다. 개인 소장의 ≪금강사군첩≫은 그에 부합하는 그림으로 이때 처음 공개돼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기록의 70폭과 달리 전하는 것은 60폭뿐이었다. 이들은 5개의 화첩에 각각 12폭씩 들어 있었다. 금강산의 <청심대(淸心臺)>를 그린 필법은 중년에 그가 자주 쓰던 호방한 필치와 거리가 멀다. 왕명에 의한 제작이었던 만큼 정성을 다해 꼼꼼하게 그렸다. 그런 가운데도 바위를 나타내고 물결을 그리는 데는 단원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명경대> ≪관동팔경도≫ 견본수묵, 91.4x41.0cm, 간송미술관 


그가 금강산 일대를 여행한 것은 44살 때이다. 이때 꼼꼼하게 진경을 그린 경험이 있어 이후 여러 번 금강산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명경대(明鏡臺)>는 ≪관동팔경도≫ 병풍에 들어있는 한 폭이다. 그는 금강산에 갈 때 스승인 강세황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도화서 선배 김응환 등과 동행했다. 그림 아래쪽에 보이는 갓 쓴 사람들을 이들 일행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단원의 진경산수화는 겸재가 중심이 되는 사물을 강조한 것과는 다르다. 먹보다 필이 중심이다. <명경대>에는 소부벽준에 이어 작은 하엽준과 작은 피마준이 반복돼 있다. 어딘가 복잡한 듯하면서도 맑은 것은 그 때문이다.


<조어산수도> ≪병진년 화첩≫ 1796년(52세), 지본담채, 26.7x31.6cm, 호암미술관, 보물 782호 


그가 52살에 그린 ≪병진년 화첩≫(1796년)은 산수, 풍속, 화조 등 20점으로 된 화첩이다. 이 화첩은 단원 화풍의 진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손꼽히며 일찍이 보물로 지정됐다. 산수에는 조선 시대가 아니라도 한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시골 어디서나 흔히 있을 법한 정경이 묘사돼 있다. <조어산수도(釣魚山水圖)>도 그중 하나다. 중국 산수화에는 낚시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평범한 산모퉁이에 주저앉아 낚싯대를 드리운 한가로운 정경을 그린 것은 없다. 단원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이 그림에서 보는 것같은 조선의 정서에 있다.


<타도낙취> <과교경객> ≪행려풍속도≫ 1778년(34세)  견본담채, 각 90.9x42.7cm, 국립중앙박물관


단원의 풍속화는 ≪풍속화첩≫이 유명하나 어딘가 밑그림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그래서 전문가 사이에서는 실제 생활상을 대상으로 한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 8폭 병풍(1778)을 더 높게 쳐준다. 34살 때 그린 이 병풍에는 타작 마당, 주막, 행상, 사또 행차 등의 장면이 담겨 있다. <과교경객(過橋驚客)>은 그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힌다. ‘과교경객’은 다리를 건너다 놀랐다는 뜻이다. 그림은 귀인 일행이 구종을 앞세운 채 나귀를 타고 섭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그렸다. 그런데 다리 밑 물새가 나귀 발걸음에 놀라 ‘푸드득’ 하고 날아오르자 이번에는 나귀가 깜짝 놀랐다. 놀란 나귀가 몸을 ‘홱’ 재치니 타고 있던 나그네의 몸이 기우뚱했고 앞서가던 구종은 금방 몸을 돌려 나귀 고삐를 바짝 채고 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을 한 장면에 담아 그리는 솜씨는 절묘한데 이것이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았던 단원 풍속화의 비밀이다. 


<마상청앵도> 지본담채, 117.2x52.0cm, 간송미술관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는 단원의 3대 걸작에 드는 명품이다. 이 역시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장면을 캐치했다. 길가는 나그네가 버드나무에 앉은 꾀꼬리 한 쌍이 지저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순간을 그렸다. 여기에는 또 구도의 대가인 단원의 모습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버드나무는 여느 화가와 달리 그림 한쪽으로 꽉 밀어 조금만 보이게 그렸다. 가운데 비어있는 공간에 그린 시골길은 삐뚜룸하게 사선으로 잡았다. 위쪽은 텅 비웠는데 이게 무성시(無聲詩)의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여백의 구도이다.


<호귀응렵도> 지본담채, 28.0x34.2cm,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의 <호귀응렵도(豪貴鷹獵圖)>는 그가 연풍 현감으로 있으면서 풍류 생활을 즐긴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는 현감시절 암행어사의 탄핵을 받은 적이 있다. 근무 태만이 이유였는데 그 사유에 사냥이 거론되기도 했다. 구륵법으로 줄기를 그리고 짙은 먹선으로 짧게 가지를 그리는 것은 단원식 나무 그리는 법의 특징이다.


<만고청산도> <춘수부함도> ≪주부자시의도≫ 1800년(56세), 견본담채, 각 125.0x40.5cm, 개인


단원 평생의 최대 패트런은 정조였다. 그는 젊은 시절 초상화를 그린 단원 솜씨에 매료돼 30년 동안 가까이 두고 그림 일을 시켰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주문한 그림이 ≪주부자 시의도≫다. 이 그림 역시 이 전시에서 세상에 처음 알려진 미공개작이다. 1800년 정월에 단원이 이 를 그려 바치자 정조가 ‘(단원이) 주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라고 칭찬한 내용이 그의 『홍재전서』에 나온다. 그림은 주자의 시를 가지고 그린 시의도(詩意圖)이다. 시의 뜻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18세기 들어 크게 유행했고 그중에 단원이 가장 솜씨가 뛰어났다. <만고청산도(萬古靑山圖)> 위쪽에는 주자의 ‘뜬구름에 만사를 맡겨 한가롭게 책을 펴니 만고의 청산은 다만 그저 푸르르네(浮雲一任閒書卷 萬古靑山只麽靑)’의 시구가 적혀있다. 또 <춘수부함도(春水浮艦圖)>는 ‘어젯밤 강가에 봄물이 불더니만 싸움배 거함조차 터럭 인양 가볍게 뜨네(昨夜江邊春水生 艨衝巨艦一毛輕)’라는 시구의 뜻이 분명하도록 그려져 있다.


<군선도> 부분. 1776년(32세), 지본담채, 132.8x575.8cm, 호암미술관, 국보 139호 



<염불서승도> 저본담채, 20.8x28.7cm, 간송미술관 


풍속만큼 당시에 인기 높았던 그림은 신선도이다. 신선 그림의 대표급은 단연 <군선도(群仙圖)>(1776)이다. 이는 32살 때 그렸다. 11명의 신선과 8명의 동자가 마치 ‘쓱쓱’ 붓질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빠르고 힘차게 그려져 있다. 단원이 활동하던 18세기 후반에는 중국에서 신선 화보가 다수 전해졌다. 단원도 그와 같은 책에서 힌트를 얻기는 했으나 표현과 묘사는 전부 독자적이다. <염불서승도(念佛西昇圖)>은 불화로 분류할 수 없는 정도의 탁월한 한 폭의 감상화다. 연꽃으로 화생(化生)한 구름 위에 올라앉은 스님은 뒷모습만 보인다. 뒷모습의 인물을 이렇게 대담하게 그린 화가는 단원이 처음이었다.


<춘작보희도>≪병진년 화첩≫ 1796년(52세), 지본담채, 26.7x31.6cm, 호암미술관 



<백로횡답>≪병진년 화첩≫ 1796년(52세), 지본담채, 26.7x31.6cm, 호암미술관 


18세기는 화조화의 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화가가 이를 그렸고 또 수요도 많았다. 단원 화조화도 인기가 높았다. 인기의 비결은 역시 화폭 전체에 흘러넘치는 시정(詩情)이었다. <춘작보희(春鵲報喜)>는 대나무 가지와 붉은 매화나무 그리고 까치가 모두 중앙에 몰려 있는 중앙집중 구도를 보인다. 이 역시 그가 자주 구사한 구도법이다. 단원의 화조는 시골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데서 더욱 시적 정취가 뛰어나다. <백로횡답(白鷺橫畓)>은 이른 여름 푸르게 펼쳐져 있는 무논과 백로가 주인공이다. 아무도 없는 들판의 정적을 깨고 백로 한 쌍이 날아가고 있다. 무논의 또 다른 한 마리는 자세히 보면 물고기 한 마리를 입에 물고 있다. 디테일을 빨리 ‘척척’ 그리는 것도 그만의 특기이다. 이 그림 역시 조선적 서정의 세계가 가장 잘 드러난 명품 중 하나다.

‘단원 김홍도전’은 이렇게 3곳 박물관, 미술관의 명품이 한데 모여 큰 인기를 끌었다. 두 달 조금 넘은 전시 기간에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았다. 무엇보다 국박, 간송, 호암의 단원 명품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발걸음을 재촉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애초에 기획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했으나 이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다만 전시를 주관한 실무간사는 세 곳 모두와 인연이 있는 인물이 들어있어 눈길을 끌었다. 호암미술관을 대표해 실무간사 역할을 한 오주석 씨는 원래 영자신문사 기자를 하다 호암미술관에 들어갔다. 그후 2년 남짓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박물관에 6년을 보낸 뒤 자유 연구가가 되기 위해 박물관을 그만두었다. 간송미술관은 호암 시절부터 드나들며 인연을 쌓았다. 이런 인연으로 3곳 모두와 잘 통했다.(전시 때 그는 호암미술관 객원연구원 자격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공동주최 결정에 관여할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이 부분이 알려지지 않은 아쉬움은 단원 이외에 세 곳이 힘을 합쳐야 열 수 있는 전시가 더 있기 때문이다. 겸재나 현재는 물론이고 회호가 아니라 서예이기도 하지만 추사 전시도 세곳의 협력이 없으면 대특별전은 불가능하다.

어쨌든 최초로 열린 합동 전시로 단원의 인기는 한층 높아졌다. 또 연구도 깊어지게 됐다. 전시에 즈음해 박물관 신문에 단원 김홍도에 관한 특별기고를 연재한 오주석 씨는 연구를 심화시켜 1998년 단원의 첫 연구서인 『단원 김홍도-조선적인, 너무나 조선적인 화가』(열화당)을 펴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에 국내에서 김홍도 연구로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진준현 씨가 『단원 김홍도 연구』를 출간했다.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단원 전시는 이후 화가의 생년이나 몰년을 기념해 특별전을 여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기도 했다. 2009년에 간송미술관에서 ‘겸재 서거 250주년 기념 특별 겸재화파전’을 열었다. 그 후로 2012년 국립전주박물관의 ‘호생관 최북 탄생 300주년 특별전’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의 ‘강세황 탄생 300주년 기념전’이 열렸고 2014년에는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공재 윤두서 서거 300주년 특별전’ 등이 계속해서 열렸다.(*)




이원복, 윤철규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9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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