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영원한 미: 고려불화 특별전
1993년 12월 11일 - 1994년 2월 13일 서울호암미술관
봉황, 용, 연꽃 이외에도 세 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에 신선, 호랑이, 사자, 낙타, 코끼리 등 온갖 동물이 가득 조각돼 있다. 이들 사이로 폭포와 나무, 불꽃, 물고기 등도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천상(天上)나라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긴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는 이 향로에 대해 연꽃이 만물을 만들어내는 불교의 정토인 연화장(蓮華藏) 세계를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이 향로는 실은 그보다 앞서 12일에 부여 송산리 고분 앞의 주차장 공사현장에서 발굴됐다. 공개가 늦었던 것은 긴급 보존처리와 일반 공개에 앞서 정밀한 조사와 유물을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 미술사를 바꿔 놓은 대발굴과 심상치 않은 인연이 있어 보이는 일이 그보다 이틀 전에 서울에서 일어났다.
1993년 12월10일 저녁, 서울 호암갤러리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자들이 모여 한 특별전의 개막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라희 호암미술관 관장, 민병천 동국대학교 총장, 홍윤식 동국대학교 박물관 관장 그리고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사이로 한국 조계종 총무원장, 일본 정토정 대본산 지온인(知恩院)에서 온 큰 스님들도 나란히 서 있었다. 이날 성대하게 개막한 특별전은 그때까지 한 번도 한국에서 열린 적도 없었고 따라서 본 사람도 거의 없는 고려불화 전시였다.
고려 불화는 잘 알다시피 그동안 한국 미술사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였다. 1973년 이동주 선생이 일본에서 조사한 내용을 한국일보에 소개하면서 최초로 알려졌다. 그리고 1978년 가을에는 일본 나라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서 세계 최초로 ‘고려 불화전’이 열렸다. 하지만 당시의 국내 사정 등을 보면 일본에 건너가 직접 이를 본 사람을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고려 불화가 당당히 한국에서 처음 소개된 것이다. 세계적으로 봐도 일본에 이은 두 번째였다. 전시는 호암미술관과 개관 30주년 기념전을 준비하던 동국대학교 박물관이 공동주최했다. 또 일본 교토의 붓쿄(佛敎) 대학도 공동주최에 참여됐다. 불화 전시였던 만큼 한국 조계종은 적극적으로 나서 전시를 후원했다. 일본에서는 일본 정토종과 정토종의 총본산인 교토 지온인(知恩院)이 후원했다.
전시에는 국내에 있는 고려 불화를 포함해 일본과 프랑스에서 가져온 36점의 불화이 출품됐다. 이 중에는 조선 초기 것으로 고려말 화풍이 그대로 남아있는 불화 5점도 포함됐다. 그 외 나한도와 사경의 변상도가 각각 12점과 27점이 포함돼 전시 규모는 일본의 전시를 훨씬 능가했다.
전시가 개막된 뒤에 많은 사람이 우선 국내에도 고려 불화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에게 고려 불화는 국내에는 없는 명화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전시에 호암미술관 소장의 7점 그리고 호림미술관 소장의 1점이 소개됐다.
한국의 미술관과 컬렉터가 고려 불화에 관심을 가진 것은 서울올림픽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문화는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이때부터 외국의 경매 시장에도 한국미술품이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를 기다린 듯 세계적 경매회사 소더비는 그 무렵 서울에 사무실을 개설했다. 그리고 일본과 해외에서 경매를 의뢰한 한국미술품을 국내 컬렉터에게 한발 앞서 소개했다. 이런 연유로 짧은 시간이지만 여러 점의 고려 불화가 국내에 들어오게 됐다. 그러나 일반 공개는 그때까지 없었다.
한편 일본에서 출품된 고려 불화는 대부분 정토종 사찰과 관련된 것들이다. 공동주최에 포함된 붓쿄 대학 역시 정토종에서 설립한 대학이다. 붓쿄 대학은 실은 이전부터 정토종 산하의 사찰들이 소장한 고려 불화의 조사를 착수하고 있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에는 한국의 동국대학교와 일본 도쿄에 있는 다이쇼(大正) 대학도 함께 참가했다. 다이쇼 대학 또한 정토종과 관련 있는 대학이다. 원래는 여러 종파에서 승려 양성을 위해 설립했다. 1920년대 중반 일본 사회의 급격한 근대화로 여러 갈등이 심화되자 불교의 상생 이념을 사회에 널리 활용하자는 취지에서 정토종, 정토 진종의 지산파와 풍산파가 공동으로 재설립한 대학이다.
외견상으로는 이런 구도와 네트워크 아래 전시가 성사됐다. 하지만 이면에는 한국과 일본 양국의 불교계, 불교재단을 모태로 한 대학 그리고 박물관 관계자 사이의 폭넓은 인적 파이프라인이 작동했다. 당시 고려 불화는 국내에 소개될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임진왜란과 약탈이란 단어가 뒤따랐다. 그랬던 만큼 정상적인 루트로는 전시를 개최하기 힘들었다. 지난 회에 소개한 것처럼 한일 국교 수립을 기념한 양국의 국립중앙박물관이 기획한 교류전조차 국내 여론의 눈치를 살피며 차일피일 미뤄야 했다. 하지만 이 전시는 달랐다. 여론을 살펴봐야 하는 국공립 기관과 무관했다. 그런 점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위 책임자도 홀가분하게 나서서 전시 성사를 도왔다. 즉 일본의 관계 당국자를 만나 전시가 끝난 뒤에도 아무런 문제 없이 작품이 반환될 것이라고 충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배경과 측면 작전이 공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면에 나서서 일을 성사시킨 주역은 단연 동국대학교 박물관장인 홍윤식 교수였다. 홍 교수는 조계종에 몸을 담고 있다가 늦게 일본으로 유학가서 교토의 붓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에 그는 폭넓은 인맥을 구축했는데 그중에는 훗날 정토종 고위 스님이 되는 인물들도 많이 포함됐다. 나중에 붓교 대학 재단 이사장과 정토종 종무청창이 역임한 미즈타니 고쇼(水谷幸正) 교수를 비롯해 정토종 대본산인 지온인의 방장스님에 해당하는 문주(門主)에 오른 이토 유신(伊藤唯眞) 교수 그리고 붓교 대학 학장이 된 다카하시 고지(高橋弘次) 교수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모두 정토종 산하의 사찰들을 설득해 한국의 특별전에 소장품을 내주도록 했다. 일본에서 온 18점가운데 국립교토박물관에 소장의 <아미타여래도>와 시가(滋賀)현립 비오코(琵琶湖)문화관 소장의 <지장보살도>를 제외하면 모두 정토종 산하 사찰 소장품이다.
하이라이트 가운데 국내 소장의 고려 불화를 먼저 보면 무엇보다 호암미술관의 <아미타 삼존도>를 꼽을 수 있다. 고려 불화는 그려진 존상과 내용에 따라 대략 5종류로 나뉜다. 우선 극락왕생을 바라는 신앙과 관련이 깊은 불화로 관경 변상도(觀經變相圖)와 아미타 여래도가 있다. 관경 변상도는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아미타 여래도는 임종 때 극락왕생을 바라는 사람 앞에 아미타불이 나타나 손을 잡아주며 극락으로 이끌어주는 모습을 그린 불화다. 독존도를 비록해 삼존도, 구존도 등으로 나뉜다. 그 외에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나한도 등이 있다. 예배용 불화는 아니지만 고려 불화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사경 변상도가 있다. 이는 불경을 베낀 사경(寫經)의 첫 부분에 경전 내용을 한 폭의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아미타 삼존도>에는 협시보살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함께 그렸다. 관음보살 뒤쪽에 서 있는 아미타 여래는 아래쪽 왕생하고자 하는 자에게 손을 내민 모습이다. 당당한 모습에 더해 고려 불화 감상의 백미인 화려한 금박 가사를 걸치고 있다. 금박 문양은 상상의 꽃인 보상화(寶相華)를 그렸다.
수월관음도는 고려 불화 가운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장르다. 특히 1991년부터 소더비의 뉴욕 경매에서 176만 달러에 낙찰돼 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 호암미술관의 <수월관음도>는 그중에서도 치밀하게 묘사된 문양과 화려한 가사에 고려 불화 특유의 우아함이 잘 드러난 일품이다. 호암미술관은 이 특별전에 4점의 관음보살상을 출품했다. 호림미술관의 출품작은 <지장시왕도>이다. 지장보살이 10명의 시왕을 거느린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왕은 말할 것도 없이 지옥의 심판관이다. 그림 속의 시왕은 모두 고려 귀족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어 고려 귀족 사회의 한 단면을 엿보는 듯한 느낌도 준다.
<관경서분 변상도> 고려 비단에 채색 150.5x113.2cm 일본 사이후쿠지(西福寺)
<관경서분 변상도> 부분
일본에서 온 16점의 불화 가운데 가장 많은 감탄을 자아낸 그림은 사이후쿠지(西福寺) 절 소장의 <관경서분 변상도>이다. 이는 『관무량수경』 변상도의 하나로 경전의 서품 내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림에는 마치 고려의 궁중 생활을 묘사한 풍속화처럼 사실적인 궁중 장면이 묘사돼 있다. 『관무량수경』은 마가다 왕국의 왕비의 청을 받아 부처께서 극락정토에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서품에는 어째서 그런 청을 하게 됐는지가 밝혀져 있다. 마가다국 태자는 어려서 자신을 버린 사림이 부왕임을 알고 왕을 쫓아내 감옥에 가두었다. 왕비는 자신의 몸에 꿀과 밀가루를 바르고 찾아가 왕의 목숨을 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왕비마저 죽게 됐다. 이때 신하들의 만류로 간신히 죽음을 면한 왕비는 비통에 젖어 이승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줄 것을 부처에게 청했다. 영취산에 머물던 부처께서 이를 듣고 많은 성중을 데리고 나타나 극락정토를 설법한다는 내용이다. 정변의 배경이 왕궁인 때문에 그려져 있는 건물은 모두 고려 궁전의 전각인 것처럼 호화롭다. 또 왕비와 시녀 그리고 신하들의 복장 역시 궁중 예법에 맞게 화려하다. 현재 전하는 고려 불화 가운데 서품 내용을 그린 것은 2점만 전한다. 그중 하나가 서울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설충 이O필 <관경변상도> 1323년 비단에 채색 224.2x139.1cm 일본 지온인(知恩院)
<관경변상도> 부분
『관무량수경』에는 서품에 이어 극락세계의 모습을 오래도록 간절히 생각하면 그 바람이 이루어진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를 그린 것이 <관경 변상도>이다. 극락세계의 16가지 모습을 연상한다고 해 <관경십육관 변상도>라고도 한다. 일본 지온인(知恩院) 절 소장의 <관경변상도>는 연상의 대상인 해와 물, 땅, 보배누각, 보배 연못, 전각 속의 부처님 등이 화면 위쪽에서 차례로 그려져 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 삼존불을 연상하는 장면 또한 고려의 화려한 궁전 모습처럼 나타나 있다.
<아미타 여래도> 고려 비단에 채색 106.0x49.0cm 일본 젠린지(禪林寺)
<아미타 삼존도> 고려 비단에 채색 110.0x51.0cm 호암미술관 국보 218호
<수월관음도> 고려 비단에 채색 119.2x59.8cm 호암미술관 보물 926호
<지장보살도> 고려 비단에 채색 111.0x43.5cm 일본 젠도지(善導寺)
<지장시왕도> 고려 비단에 채색 111.3x60.5cm 호림미술관 보물 1048호
이자실 필 <관음32응신도> 1550년 비단에 채색 225.0x135.0cm 일본 지온인(知恩院)
특별전에 소개된 조선 불화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단연 이자실이 그린 <관음32응신도>이다. 이 불화는 홍윤식 교수가 1983년 일본 지온인 절에서 처음 발굴해 국내에 소개한 인연이 있다. 관음보살은 중생 고통의 구제하기 위해 33가지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이 불화에는 그 가운데 22응신이 그려져 있다. 제석, 장군, 거사, 동남, 동녀, 아수라, 용, 장자 등의 여러 모습으로 변신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모습은 산과 계곡을 칸막이처럼 사용해 나눠 그렸다. 이들 산과 계곡에서 조선 전기의 산수화 기법을 연구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인종의 비인 공의(恭懿) 왕대비가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린 것이다. 명문에 전남 도갑사 금당에 봉안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실력 있는 화사 이자실을 불러 그렸다고도 했다. 이자실에 대해서는 노비 출신의 도화서 화원 이상좌라는 설이 있다.
이 전시에는 경주 불국사가 김대성에 중건된 직후인 754,5년 무렵에 사경된 『대방광불화엄경』의 <변상도 잔편>도 특별히 소개됐다. 오랜 세월로 인해 많은 훼손이 있으나 일정한 굵기의 선으로 대담하게 그린 보살 모습은 잊혀진 통일신라 시대의 필치를 가늠하게 하는 일급 자료이다.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부분) 통일신라 754-755년 감지금은니 24.0x9.3cm 호암미술관 국보 196호
<묘법연화경 권2 변상도> 1422년 감지금니 29.2x57.4cm 동국대학교 박물관 보물 390호
<묘법연화경 권2 변상도>는 공동주최한 동국대학고 박물관 소장품이다. 세종(재위 1418-1450)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422년에 제작됐으나 보존 상태는 완벽에 가깝다. 변상도의 내용은 불타는 집(火宅)과 세 수레에 관한 비유(三車)를 그렸다. 세종 시대의 그림으로는 현재 <몽유도원도>밖에 전하지 않는다.
이 전시는 고려를 중심으로 통일신라 시대와 조선 전기의 자료 몇 점이 포함됐으나 고려 불화는 모두 처음 소개된 것들이었다. 그런 만큼 다양한 부대행사를 함께 마련해 처음 소개되는 고려 불화를 일반에 널리 알리고자 했다. 한일 전문가들의 학술세미나가 열렸고 불교회화 전반을 소개하는 회화강좌도 개최됐다. 또 서울 시내의 중고교에서 미술과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초청해 작품 설명회도 개최했다. 이와 같은 행사와 함께 전시는 성공리에 막을 내려 전시기간 동안 6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다.
이 전시를 계기로 호암미술관이 일본의 불교계 그리고 박물관들과 교류가 깊어진 일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아울러 국제적 전시의 성공적인 개최로 미술관의 위상도 한층 높아졌다. 그리고 이런 신뢰와 명성을 바탕으로 호암미술관은 다양한 후속 전시를 개최했다. 특히 고려 불화전이 계기가 돼 열린 1995년 여름의 ‘대고려국보전-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 전은 사회 전반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고려는 분단이라는 사정 때문에 그동안 전반적으로 인식이 낮았다. 이 전시는 불화를 포함한 회화, 불교 공예, 도자기 등 각 방면의 고려 미술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소개돼 큰 관심을 끌었다. 이때도 일본의 6개 사찰과 10개 미술관, 기관 등에서 고려 불화를 비롯한 고려 사경, 고려 나전, 고려청자 등 20여 점을 빌려주었다.
고려 불화 특별전과 대고려 국보전에는 호암미술관이 속한 삼성문화재단의 이건희 이사장이 이례적으로 인사말을 도록에 남겼다. 그는 ‘일반인들에게 고려 불화의 높은 예술적 경지를 직접 감상하는 기회가 되고 학자들에게는 심도 있는 연구를 가속할 기회가 될 것’이라는 평범한 인사말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려 불화를 가리키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칭했다.
그 무렵 이건희 회장에 관해 한 마디 더하면 당시 그의 머릿속에는 ‘세계에서 최고’라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고려 불화전이 기획되고 있던 1993년 6월 이건희 회장은 그룹내 주요 임원들을 유럽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소위 ‘부인과 자식만 빼도 다 바꾸어 다시 시작하자’는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일하려거든 그만두는 게 낫고 세계 일류기업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그의 말은 ‘세계 최고’라는 목표가 없고서는 할 수 없었던 말일 것이다. 고려 불화 전시와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연결시키는 일은 무리이다. 하지만 둘 모두에 ‘세계 최고’가 공통어였던 점만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