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작품에 매료되는 것을 넘어서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부조리하며 고독한지 깨닫게 한다. 아무리 기술적으로 뛰어나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우며 경제적으로 부가가치가 높다하더라도 나의 존재라 문제와 만나면 하나의 계기 그 이상 그이하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이런 관점에서 작품이란 시간 속에 곧 망각될 사건과도 같은 것이다. 하물며 비물질성인 이미지를 생각해보라. 그것이 얼마나 의미론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계량화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인지를. 이런 점에서 조성훈 작가가 일관되게 반복적으로 ‘공허함’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I like window-shopping, 캔버스에 유채, 콩테, 60.6×50cm, 2014
왜 공허함이 느껴질까? 공허를 느끼는 장소는 어디인가? 두뇌나 심장과 같은 장기인가? 마음, 정신, 의식, 영혼 어디인가? 빈 여백이 많다고 공허한 것은 아니다.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공허의 원인은 같을 수 없다. 사람마다 공허의 실체가 다르다. 실상과 허상의 관계 속에서 솟는 공허함이다. 작가는 이 ‘공허감’의 문제에 몰입해 자각 자신의 일상과 세속적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엿본다. 다차원의 세계가 중첩된 특별한 공간이 있다. 마치 에셔(Escher, Maurits Cornelius)의 에칭처럼 꼬리가 머리가 되고 다시 머리가 꼬리가 되며 날개가 되고 다리가 되고 입이 항문이 되고 항문이 입이 된다. 포유류가 파충류가 되고 새가 물고기가 된다. 계단을 걸어 오르면 아래로 내려가거나 내려가면 올라간다. 큰 광장처럼 사방팔방으로 연결된. 이 세계는 수많은 신비로 가득하다. 사람은 짐승이 되기도 하고 신이 되기도 하며 돌이나 공기 같은 무생물이 될 수도 있다.
I was more worried about the croc than the people, 캔버스에 유채, 130.3×193.9cm, 2017
작가는 쉼 없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 기록은 한편의 영화를 구성하는 찰나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찰나의 순간이 모이며 세계가 되고 일생이 된다. 앞뒤를 잘라버리고 뒤죽박죽 미쳐버린 이야기와 사건들이 두서없이 혼종 된다. 꿈과 상상 속에 펼쳐지는 사건과 사물과 이미지들의 이종교배 되어 버린다. 이미지만이 아니다. 가치와 윤리와 미적 감수성 또한 기이한 결합과 분절을 반복한다. 배설하듯 또는 일기나 고해성사처럼 매일매일 반복해서 기록하는 작은 드로잉들은 마치 작가의 심리를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들은 미래가 없는 우울한 단상처럼 다가온다. 수 백 장의 드로잉은 현실의 대상이건 상상 속 대상이건 예외 없이 우울하고 부조리한 이미지들이다.
They all think, It is very beautiful, 캔버스에 유채, 130.3×162.2cm, 2014
그림 속 형상들은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지만 메시지는 분명치 않다. 구체적인 인물과 상황이 그려지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지 모호하다. 구체적 이미지와 모호한 의미 또는 뉘앙스가 그의 작품 전면에 반복된다. 최초의 만물이 소통하던 신의 언어를 상실한 바벨탑의 해체의 순간과 다르지 않다. 신의 시간에서 보면 바벨탑의 사건은 불과 몇 초전에 벌어진 사건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인간의 메시지란 매번 틀리거나 모호할 뿐이다. 만일 인간이 신의 언어를 마주한다면 죽어버리거나 미쳐버릴 것이다. 마치 영화 인디애나존스 속에서 고도로 발달된 우주인의 지식을 머리에 구겨 넣은 악당처럼 말이다. 우리가 다룰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의미란 실재(Reality)의 아주 작은 단편일 뿐이다. 실상과 허상이 엉켜있는 이미지만이 인간에게 허락된다. 작가가 말하는 ‘공허함’이란 실상이란 허상의 엉킴이며 그러한 엉킴의 무한연쇄일 뿐이다. 무의미가 중첩되고 반복되며 무의미들이 마치 사물처럼 접속하고 절단된다. 공허의 순간은 그 연결되고 분리되는 결절점에서 등장한다.
Happy April Fools' Day. Anybody have any good pranks, 리넨에 유채,194×259cm, 2019
작가의 대표작은 한 소년이 죽은 소의 젖을 짜고 있고 다른 한 소년은 우울한 표정의 소녀를 위로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날카로운 나무막대가 위를 향해 꽂혀 있는데 마치 샤먼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수, 솟대를 떠올린다. 또는 무중력의 우주공간에 올린 우주선 같기도 하다. 실제 그림에는 장난감 같은 작은 비행접시가 그려져 있다. 다른 작품은 공룡의 가면을 쓴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인과관계를 읽을 수 없는 별개의 사건과 이미지가 한 씬(시퀀스)으로 연출되어 있다.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얼굴을 가리고 등장한다. 결코 자신의 본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가의 인물들은 영화 ‘조커’가 비극적 운명을 웃는 얼굴로 살아야 하는 인물의 영웅적 신화를 만든 것처럼 신화화된다. 사적인 작가의 세계에서 솟는 공허란 인간의 비극적 운명, 냉혹한 시장논리, 질병과 전쟁, 착취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은 영화 속 현실보다 더 지독하다. 해석되고 매개된, 심지어 특정한 방향과 가치를 향해 조작된 이미지와 스토리들, 캐릭터들, 사건들, 세계관들의 그의 작품의 전면과 후면에 복잡하게 얽혀든다.
Casting, 종이에 수채, 70×50cm, 2019
불감드로잉, 캔버스에 유채, 38.8×54cm, 2016
우리의 일상이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걸쳐 있기에 언제나 매개된 현실이고 재구성되고 번역된 현실이다. 현실은 마치 중국 전통기예인 변검(变脸)의 마스터가 수많은 가면을 순식간에 갈아치우며 변신하는 얼굴(페르소나)처럼. 어떤 얼굴이 진짜 얼굴인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 너무 많이 또 너무 자주 가면을 갈아 쓰는 변검의 마스터 또한 자기 자신의 얼굴이 가면인지 아닌지 혼돈에 빠진다. 너무 많은 얼굴은 얼굴이 없는 것과 같다. 너무 많은 이미지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양육한 이미지를 이제는 아무리 쥐어짜도 나오는 것은 생명을 양육하는 젖이 아닌 우리 존재의 무게, 공기나 유령 같은 텅 빈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