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 회화전
1992년 9월 1일 - 11월 30일 서울 호암갤러리
청초에 황실의 주목을 받으며 이후 정통 화파로 자리 잡은 사왕오운(왕시민, 왕감, 왕휘, 왕원기, 오력, 운수평)의 그림도 모두 소개됐다. 가장 연장자이자 영수인 왕시민(王時敏 1592-1680)이 그린 <방예산수도(仿倪山水圖)>는 스승인 동기창이 ‘필법 위주의 그림이라면 반드시 예찬을 따라야 한다’는 말대로 예찬의 성긴 필치와 중간을 비우고 상하를 채운 구도 등을 자기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왕시민 <방예산수도> 1627년 지본수묵 87.2x35.4cm
왕휘 <만목기봉도> 1710년 견본담채 182.0x107.0cm
왕시민의 가르침을 받은 왕휘(王翬 1632-1717)의 <만목기봉도(万木奇峰圖)>는 동원과 거연에서 시작된 문인 화풍을 자기식으로 재해석한 그림이다. 담묵으로 길게 그은 피마준은 동원에서 시작돼 황공망에게 이어지면서 문인화의 기본 준법으로 정착했다. 여기에는 산꼭대기에 작은 자갈처럼 보이는 거연 특유의 반두(礬頭) 묘사도 곁들여져 있다.
석도 <황촌독수> <석색운근>(산수화 책) 17세기 지본담채 23.7x17.0cm
홍인 <방예산수도> 1661년 지본수묵 133.0x63.0cm
청초 사승 화가 가운데 홍인(弘仁 1610-1663)은 예찬에 경도돼 예찬 분위기가 물씬 그림을 많은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방예산수도(仿倪山水圖)>는 예찬 특유의 갈필과 절대준이 한층 맑게 구사돼 있다. 청 정통화가들이 많이 제작한 방작(仿作)을 거부하며 실제 경치와 조화를 강조한 석도(石濤 11642-1707)는 8면으로 된 산수화 책이 소개됐다. 붓을 똑바로 세워 농묵을 묻혀 그린 산수는 맑고 청아한 분위기 속에 실경을 그린 듯한 느낌을 준다.
원강 <봉래선도도> 1768년 견본설색 160.4x96.8cm
청 중기 들어 산수화에 관심이 급격히 쇠퇴하는 가운데 산을 이상화된 신선 세계로 미화한 특이한 산수화가 궁정을 중심으로 등장했다. 원강, 원휘 부자는 그 대표적인 화가이다. 서울 전시에 두 사람 그림이 모두 소개됐고 원강(袁江 17세기말-18세기초)의 <봉래선경도(蓬萊仙境圖)>는 진시황이 불로장생약을 찾아 선남선녀를 보냈다는 봉래산을 그린 것이다. 이는 신선 산수를 대표하는 그림으로 미술사 책마다 소개돼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강희 말년에서 건륭제 때까지 궁정화가로 활동하며 황제의 총애를 받은 낭세녕(郞世寧 1688-1766)은 중국에 서양식 음영법, 원근법을 전해준 서양화가도 유명하다. 이탈리아 출신의 그의 본명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이다. 그는 사실적인 동물 그림과 인물화를 주로 그렸으며 배경의 수목과 산은 때때로 중국인 화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교원목마도(郊原牧馬圖)>는 궁중 목장에서 방목하는 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낭세녕 <교원목마도> 17세기 견본채색 50.6x166.0cm
청 중기는 경제 중심이 양주로 바뀌며 각지의 화가들이 몰려들며 도시민의 미감을 따르는 개성 있는 화파가 생겨났다. 이들을 양주팔괴로 부르는데 그중 묵죽으로 이름난 정섭(靜攝 1693 -1765)은 추사 김정희가 중국 지인을 통해 그의 그림을 구해달라고 청할 정도로 국내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던 화가이다. 전시에는 나온 <난죽석도(蘭竹石圖)>는 음우 장형이란 사람의 사람됨됨이가 굳기는 대나무같이 맑기는 난과 같으며 또 견고하기가 바위 같기에 그의 청에 따라 이를 준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더 좋은 그림으로 바꿔주겠다는 말도 그림에 적었다. 이는 당시 그림 수요가 많아 양주팔괴는 미리 그림을 그려놓고 요청에 응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강희제 남순도(康熙帝南巡圖)>는 청 궁정회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일종의 행사기록도다. 강희제는 재위 중 6번이나 강남을 순행했다. 1689년에 있었던 두 번째 남순 행사를 3년에 걸쳐 정교하게 그린 것이 <강희제 남순도>이다. 당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왕휘가 황명에 따라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각 지방에 화가들을 파견해 실제 경치를 그려오게 한 뒤에 궁정 화가를 지휘해 이를 전체 12권으로 완성했다. 청 황실을 대표하는 궁정 행사도인 <남순도>는 1869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북경 원명원을 약탈하면서 일부가 유출돼 베이징에는 5권밖에 없다. 전시에는 그중 제1권이 소개됐다.
작자미상 <강희남순도>(제1권) 견본채색 67.6x1555.0cm
이처럼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걸작이 대거 한국에 소개된 것은 그 배경에 말할 것도 없이 한중수교라는 정치적 사건이 있다. 그러면 중국과의 수교하기 이전에 타이완의 중화민국과의 문화교류는 어땠는가. 국민당 정부의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건너가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을 한동안 타이중의 천연동굴 속에 보관했다. 대륙 수복의 꿈을 꾸면서 포장을 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면서 1965년에 타이페이 교외에 별도의 박물관을 짓고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을 개관했다. 타이페이 유물은 90년 초까지만 해도 일체 외국에 대여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한중 수교 이전에 한중화민국 수교시절에도 이들 유물이 한국에 온 적은 없다. 다만 한중예술가협회가 나서서 타이완에 있는 고서화를 소개한 전시는 한두번 있었다. 최초는 1997년 11월로 중앙일보와 한중예술가연합회가 공동으로 ‘중국역대서화특별전’을 서울 덕수궁 현대미술관에 열었다. 이때 기사를 보면 당, 송, 원, 명, 청의 그림 79점과 글씨 27점이 출품됐다고 전한다. 아쉽게도 이 특별전은 도록도 전하지 않는다. 두 번째 전시 역시 한중예술가연합회가 경향신문과 손잡고 주최한 것으로 타이페이 시내의 국립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옛 그림 1백여 점과 탁본 160점 그리고 현대화가 그림 100여 점 등을 가져와 전시했다. 이렇게 해서 타이완의 고궁박물원과 한국과의 인연은 한번도 맺어지지 않고 한중 수교와 함께 끝나고 말았다.
요녕성박물관 전시도록 표지
어쨌든 베이징 고궁박물원 명풍의 서울 소개는 새로운 중국과의 본격적인 문화교류라는 새 장을 연 이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내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도 불구하고 이후 중국의 명품을 서울에서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베이징 전시 이후 괄목할만한 것으로 2000년 10월에 예술의전당미술관에서 열린 ‘중국 요녕성박물관 소장 명청 회화’전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요녕성 박물관이 있는 심양은 청대 제2의 수도격인 배도(陪都)이다. 또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을 나오면서 빼내온 문물들이 요녕성박물관에 다시 모였다고 하는 곳이다. 이 전시에도 대진, 심주, 문징명, 당인, 동기창, 정운붕, 왕시민, 왕감, 왕휘, 왕원기, 오력, 운수평, 석도 등의 그림이 소개됐다.
중국 문화의 재접속이란 큰 의미를 지닌 ‘명청 회화전’이지만 전시주최가 호암미술관과 베이징 고궁박물원이었던 까닭에 소련과의 수교 때와 달리 상호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후 한국을 소개하는 특별전은 중국에서 그후 따로 열리지 않았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