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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19-1. 중국과 교류의 새 문을 연 베이징 고궁의 명화들 上
  • 1933      

명청 회화전
1992년 9월 1일 - 11월 30일 서울 호암갤러리


명청회화전 도록 표지


1983년 5월5일 어린이날. 신문기자까지도 하루를 쉬면서 어린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그날 80년대식 머리로는 금방 이해가 안 될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선양에서 상하이로 가던 민간항공기 한 대가 오후 2시쯤 춘천의 미군비행장에 내려앉은 것이다. 밀거래 등 범죄와 어느 정도 연루돼 있던 선양의 불평분자들이 비행기를 납치해 타이완으로 향하다가 기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춘천에 불시착한 것이다. 황급히 신문 기자들이 몰려가고 국내의 관련 관리들이 모여들었으나 당시는 중국이 아니라 중공으로 불린 시대였다. 중공에 대한 정보가 사회나 정부나 태부족이었다. 물론 미수교였던 점도 처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중공이 허를 찌르듯 직접 관리를 파견했다. 이들은 국내 담당자와 머리를 맞대고 사건을 처리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과 중공 사이에 처음으로 외교각서가 체결됐다. 각서에는 해방 이후 정부 문서로는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명이 명시됐다. 물론 중국 쪽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20세기 후반에 새롭게 열린 新한중 관계의 제1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은 한국전쟁 이후 까맣게 잊힌 나라였다. 조선, 고려,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국과의 관계는 단지 역사책 속에만 존재했다. 그 무렵 현대 중공에 관한 책이라고는 ‘8억 인과의 대화’가 거의 유일했다. 이 책은 리영희 당시 한양대 교수가 중공에 정통한 서양 전문가의 글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중공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불리게 되면서 현대 중국에 관심이 높아지고 관련 책도 쏟아지게 됐다. 미국 신문기자였던 에드거 스노가 옌안의 중국공산당을 찾아가 취재해 쓴 『중국의 붉은 별』은 민항기 사건 이후에 번역됐다. 또 님 웨일즈란 필명을 쓴 그의 부인이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조선의 독립운동가 김산에 대해 쓴 『아리랑』도 이 무렵 번역돼 나왔다. 이들 책은 한때 불온서적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지만 이렇게 시작된 1막은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에 중국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제2막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올림픽 성공과 함께 북방정책의 추진 속에 결말에 해당하는 제3막의 한중수교가 1992년 11월에 정식으로 체결됐다.

이로써 중국은 과거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싸운 중공이 아니라 선린우호의 대상인 이웃 나라 중국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역사 속 존재로 여겨졌던 중국이 실체로 다가오게 됐다. 지난 회에 소개한 것처럼 소련이 한국과 수교한 뒤 ‘스키타이 황금전’을 기념으로 서울에 보낸 것처럼 중국에서도 수교를 즈음해 근사한 전시를 서울에 선사했다. 그것은 해방 이후 어느 전문가도 실물을 본 적이 없는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회화 컬렉션이었다. ‘명청(明淸) 회화전’이란 이름으로 서울에 온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품은 명, 청 시대로 한정한 중국회화 걸작 80점이다. 이들 대부분은 그때까지만 해도 책 속의 흑백 도판으로나 겨우 봤던 것들이었다.

그림 소개에 앞서 고궁박물원을 잠깐 살펴보면 고궁박물원이란 이름을 쓰는 박물관은 세계에 세 곳이 있다. 나중에 생긴 서울의 국립고궁박물원을 제외하면 하나는 타이페이에 있고 다른 하나는 베이징에 있다. 이 둘은 모두 청 황실의 컬렉션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왔다. 청나라 건륭제가 정열적으로 수집한 황실 컬렉션은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립된 뒤에도 한동안 자금성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1924년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추방되면서 이듬해 정식으로 국립고궁박물원이 설립됐다. 국립고궁박물원은 자금성과 함께 일반에 공개됐으나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심해지면서 주요 유물은 엄중히 포장된 채 중국 내 여러 지역에 피난, 소개(疏開)됐다. 그런데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패해 타이완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이들 중 중요한 유물 상당수가 함께 바다를 건너 타이완으로 옮겨졌다. 이것이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의 모태가 됐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이후 각지에 남아 있던 피난 유물은 물론 민간에 흩어진 황실 유물들이 차례로 수집돼 다시 자금성에 모였다. 이것이 베이징 국립고궁박물원이 됐다. 타이페이와 베이징 양쪽을 놓고 보면 중요 유물은 타이페이 쪽이 더 많다고 말하며 양적으로 보면 민간의 전해지던 유물들을 적극 수집한 베이징 쪽이 더 많다고 한다. 

서울에 온 ‘명청 회화전’은 9천여 점에 이르는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회화 가운데 80점을 선정한 것으로 말 그대로 일당백의 명품이다. 전시에는 명청 회회사의 흐름을 대표하는 유파와 화가들이 전부 빠짐없이 망라됐다. 유파부터 보면 우선 절파(浙派)에서 시작해 문인 화풍을 크게 유행시킨 오파(吳派) 그리고 문인화 이론을 정립한 동기창 중심의 송강파(松江派)에 청초에 궁정을 중심으로 활동한 사왕오운(四王吳惲)의 정통 화파가 고루 포함됐다. 화가로 봐도 청초에 머리를 깎고 중이 돼 청의 거부감을 나타낸 사승(四僧) 화가에 선교사로 왔다가 청 궁정에서 화가로 활동한 이탈리아의 낭세녕까지 소개됐다. 물론 황실의 절대권력 아래 제작된 행사 기록화도 들어있다.


대진 <동천문도도> 15세기 견본채색 211.0x83.0cm
 


임량 <설경쌍치도> 15세기 견본담채 131.5x58.0cm 


미술사를 장식하는 화보급 대표작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면 우선 절강성 항주(杭州)에서 활동하다 명 초에 궁정에 불려 올라가 화명을 떨친 대진(戴進, 1388-1462)의 <동천문도도(洞天問道圖)>를 꼽을 수 있다. 절파 시조인 대진은 강한 부벽준과 뿌리가 노출된 나무 밑동 산의 일부만 그린 구도 등 남송 원체화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난다. 내용은 삼황오제 가운데 첫 번째 황제인 헌원 황제가 백성을 이롭게 할 도를 묻기 위해 공동산에 은둔해 사는 고사 광성자를 찾아갔다는 전설을 그린 것이다. 산길을 가는 곤룡포의 인물이 헌원 황제이다. 명초의 궁정에서는 산수화보다 인물화나 화조화가 더 많이 그려졌다. 당시를 대표하는 화조 화가인 임량(林良 15세기)의 <설경쌍치도(雪景雙雉圖)>는 수묵의 과감한 필치에 산수화에서 보일 듯한 바위 준법(皴法, 주름을 넣는 묵법)을 마음껏 사용한 특징이 여실히 엿보이는 그림이다. 그의 화조화는 조선 후기에 큰 영향을 미쳐 당시의 심사정에게도 임량 수법을 따라 그린 그림이 있다.

오파는 명 중기에 소주를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 화가를 가리키는 말로 소주 옛 지명인 오(吳)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심주(沈周, 1427-1509)는 오파를 창시한 시조에 해당한다. 그의 <경강송별도(京江送別圖)>는 당시 소주출신 문인들이 관직을 위해 북경으로 떠나갈 때 전별로서 그려준 것이다. 소주 문인화에는 이상의 산수를 그린 것 외에도 이처럼 문인의 품위 있는 생활 감정을 담은 그림도 많은 것이 특징이다. 심주 그림은 다른 오파 화가들과 마찬가지고 고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서 그는 굵은 필 선으로 먹을 진하게 구사해 맑고 투명한 세계를 그린 원나라 오진에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여준다.    



심주 <경강송별도> 1491년 지본담채 28.0x159.0cm 


문징명 <난정수계도> 16세기 지본채색 24.2x60.1cm 


심주 제자로 이후에 오파의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한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난정수계도(蘭亭修禊圖)>는 오파 문인가 채색과 수묵의 융합을 시도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문징명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채색 산수화의 전통을 되살린 원의 조맹부 화풍에 심취했다. <난정수계도>는 동진의 명필 왕희지가 삼월 삼짓날 명사들을 초청해 굽이쳐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던 우아하고 격조 높은 시회를 새삼 기리면서 그린 그림이다.


당인 <왕촉궁기도> 16세기 견본채색 124.7x63.8cm 


문징명과 같은 해에 태어난 당인(唐寅, 1470-1524)은 문징명과 같은 명문 출신은 아니지만 실력 하나로 이름을 떨친 문인 화가다. 그에게는 지방 향시에서 1등으로 급제했으나 북경 회시 때 부정사건에 연루되면서 과거 응시자격이 박탈당한 불행을 겪었다. 그림은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보낸 뒤에 생계를 위해 배운 것이다. 그는 문인적 정서와 심회만을 고집하지 않고 직업 화가 영역인 정밀묘사와 화려한 채색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왕촉궁기도(王蜀宮妓圖)>는 특히 미인도에 솜씨를 보인 그의 대표작이다. 왕촉은 오대십국 시절 성도를 다스린 왕씨의 전촉국(前蜀國)을 가리킨다. 전촉 두 번째 왕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치를 일삼으며 여색에 빠져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는데 당인 그림에는 그에 대한 교훈적 의미도 담겨 있다.


구영 <옥동선원도> 16세기 견본채색  169.0x65.5cm 



동기창 <사산유경도> 1626년 지본수묵 98.4x47.2cm 


오늘날 상하이에 해당하는 송강 출신의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문인화론을 정립한 화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활동과 이론으로 인해 중국 그림은 이후 문인화 일색으로 통일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기에서 그는 대상의 직접적인 사생보다 옛 명인들의 필치를 정밀하게 연구 모방한 필치로서 자연에 담고자 하는 심회나 뜻을 더욱 분명히 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그렇게 되면 그림은 점차 추상화되어 갔다고 할 수 있는데 만년에 그린 <사산유경도(佘山游境圖)>는 그런 사실을 재확인해 주는 그림이다. 이는 1626년 봄에 그가 배를 타고 송강에 있는 사산을 지나면서 느낀 감흥을 그린 것이다. 그림 속에는 실제 경치가 아니라 그가 사숙한 황공망과 예찬의 맑고
깨끗한 기분만이 전해지고 있다. 


정운붕 <옥천자다도> 1612년 지본채색 138.0x64.0cm


동기창과 비슷한 시기에 소주에서 활동하며 그와 교류했던 인물화가가 정운붕(丁雲鵬, 1547 -1628이후)이다. 그는 대대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불교에 귀의한 까닭에 불교 소재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리고 인물을 잘 그려 당시 크게 번성하던 목판화 밑그림을 다수 제작했다. <옥천자다도(玉川煮茶圖)>는 당나라의 은둔 문인이자 다선으로 불린 노동(盧仝)의 고사를 그린 것이다. 옥천은 노동의 호다. 명대 중기 이후부터 문인들 사이에 끽다(喫茶) 습관이 크게 유행하면서 문인 차의 시조인 노동과 육우에 관심이 높았다. 인물의 심한 변형 묘사는 명말에 ‘평범한 것보다 새롭고 기이한 것은 숭상’하는 이른바 염상희신(厭常喜新)의 풍조가 반영된 것이다. (계속)



이원복, 윤철규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0 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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