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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18. 교과서 속 스키타이 문화 최초 국내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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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황금-소련 국립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1991년 10월8일 - 11월17일


도록 표지 

 
흔히 ‘한국미술사’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미술사뿐만 아니라 고고학 내용도 들어있다. 먼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미적 목적을 생각하고 돌도끼를 깨고 토기를 굽지는 않았을 테지만 거기에도 수천 년 뒤에 발현(?)될 어떤 미적 요소의 단서가 있다고 보고 미술사라고 하면 어느 나라든 보통은 구석기, 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한국 미술사도 멀리는 100만 년 전 그리고 가깝게는 30만 년 전부터 시작한다. 100만 년 전은 북한 학설을 따른 것이다. 북한에서는 1966년 평양시 상원군에 있는 검은 모루 동굴에서 마제석기와 동물 화석을 발견하면서 이들을 1백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 유적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는 연천 전곡리의 구석기 유적이 가장 오래됐다. 여기서 발견된 구석기시대 손도끼와 찌르개가 30만 년 전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청동기시대가 도래한다. 이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한국 미술사 책에서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는 알타이, 스키타이, 오르도스, 몽골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라고 적고 있다. 이들 지역은 지금은 구글 검색을 하면 금방 알 수 있으나 그 이전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지역이었다.
  오르도스는 황하가 내몽골 자치주 쪽으로 크게 만곡한 안쪽에 있는 지역으로 반半 사막이나 다름없는 황토 고원지대이다. 그 위쪽이 몽골이다. 몽골 위쪽이 알타이산맥이 넓게 펼쳐져 있는 알타이 지역에 해당한다. 알타이산맥 서쪽으로 펼쳐져 있는 초원지대는 오늘날 카자흐스탄에 해당하는데 그 끝에 우랄산맥이 있다. 우랄산맥의 서쪽이 스키타이가 시작되는 곳이다. 스키타이는 주로 흑해 북쪽의 초원지대가 중심이지만 동쪽은 우랄산맥에서 시작되고 서쪽은 몰도바를 지나 루마니아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다. 이 지역에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까지 번성했던 유목 민족의 청동기와 철기 문화를 흔히 스키타이 문화라고 한다.

한국 미술사의 제1장의 서술은 그것이 우랄산맥과 알타이산맥을 넘고 또 몽골과 오르도스를 거쳐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우랄 알타이라는 말은 한글과 관련해 들어본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스키타이는 그보다 훨씬 서쪽이어서 대학 교양과목 같은 데서 ‘한국 미술사’ 강의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딘가의 멀고 아득한 곳을 가리키는 로맨틱한 말처럼도 들린다. 그런데 그렇게 먼 곳에서 발생한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특별전이 1991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다. 이해 10월 8일에 오픈한 ‘스키타이 황금’ 특별전에는 스키타이 문화를 중심으로 한국과 관련이 깊은 알타이 문화 유물까지 203점이 소개됐다. 이들은 모두 소련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국립에르미타주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반공과 냉전 시대라면 꿈도 못 꾸었을 곳에서 온 것들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초원을 이동하며 살았던 민족들의 문화답게 대부분 소형 장신구, 장식품들이다. 하지만 역사시대 훨씬 이전의 고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해 그다지 미술에 관심이 없는 보통 사람의 눈에도 감탄을 자아내게 할 정도이다. 소개 유물 중에는 특히 한국 고대문화와 관련이 깊은 것들도 많아 한층 흥미를 자아냈다. 예를 틀어 한국 샤먼 문화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알타이 지역에서 출토된 문신이 새겨진 사람 피부에서부터 순록 같은 동물의 가죽과 청동기, 펠트 섬유, 나무 등으로 만든 장식용 제기, 의장 도구, 생활 용구 등은 어딘가 낯익게 여겨지는 것들이다. 당시 국립에르미타주박물관의 비탈리 수슬로프 관장은 인사말에서 ‘유럽 몇 개국에서 선보였던 것보다 양적으로 훨씬 많은 유물을 선보였으며 그중에는 해외에 처음 소개하는 것들도 다수 포함됐다’고 서울 전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수슬로프 관장은 18.19세기 프랑스 미술을 전문으로 했으며 그가 맡은 에르미타주는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3백만 점의 소장품을 자랑한다. 그중 제정 러시아 시절 귀족들과 상층 부르주아들이 수집한 것을 러시아 혁명 이후 국유화하면서 물려받은 인상파 컬렉션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 외 에르미타주가 자랑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 문명 이전의 스키타이 문화 관련 유적과 중앙아시아 북쪽의 알타이의 출토품 등 60만 점의 컬렉션이다.

서울에 온 ‘스키타이 황금전’은 이들 가운데 백미(白眉)라고 할 것들을 추린 것이다. 이들은 서울에 앞서 독일(1984), 오스트리아(1988), 벨기에(1991)에 먼저 순회 전시됐다. 그러나 서울 전시는 한국 청동기 문화의 뿌리가 스키타이와 알타이에까지 이어진 것을 고려해 수슬로프 관장의 말처럼 스키타이의 동물 의장의 장식품과 알타이 문화 유물을 한층 충실히 보강됐다.
  이렇게 서울전에 신경을 쓴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에도 관련이 있다. 한국과 소련은 전시의 한 해 앞인 1990년 10월에 역사적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소련은 구한말부터 ‘소련에 속지 말라’는 노래를 불렀을 정도로 비호감 나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때 소련이 북한을 대대적으로 지원했고 자국 공군기까지 참전시킨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냉전 시대에도 많은 사고가 있었다. 1978년에는 영공을 잘못 들어간 파리발 대한항공 여객기에 소련 전투기가 사격을 가해 2명의 승객이 사망하고 항공기는 무르만스크에 강제착륙 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1983년에는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또 다른 대한항공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을 맞고 그대로 추락해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도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새로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가 관료적이고 비효율적인 체제에 대한 개혁을 시도하면서 안으로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하고 밖으로는 서방과의 공존을 모색한 것이다. 이로써 세계정세는 급변하게 됐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 체제가 해체되는 역사가 펼쳐졌다. 이때 노태우 정부는 과감하게 북방정책을 펼치면서 공산권 국가들과 적극 국교 수립에 나섰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도 일본과 미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하면 얼마든지 돕겠다고 했다. 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에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다수의 공산권 국가들이 참가해 북방정책의 추진에 더없이 좋은 배경이 됐다. 실제로 이 해 가을 공산권 국가인 헝가리와 처음 국교를 수립했다. 소련과의 수교는 바로 두 번째로 공산국가와의 수교였다.

국립에르미타주박물관의 ‘스키타이 황금 특별전’은 한소 수교 1주년을 기념해 소련이 마련한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배경이 있기는 해도 이 전시는 한국에 처음 스키타이 문화의 정수를 소개했다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또한 더 중요한 의미로서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국인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세계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평을 한껏 넓혔다고도 할 수 있다. 냉전 시대의 반공 정책으로 인해 한반도는 엄연히 대륙과 이어져 있음에도 대륙과는 격리된 채 섬나라처럼 생각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스키타이의 작은 금 세공품들을 대하면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대륙 깊숙한 고향의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관람객들이 스키타이의 황금 유물을 보면서 수천 년의 시공을 일거에 건너뛰어 고대의 스탭 문화에 쉽게 매료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달리 일종의 사전 교육 같은 TV 프로그램이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다. 1981년 일본의 NHK는 중화인민공화국의 CCTV와 공동으로 과거 장안에서 로마까지 사막과 초원을 가로질러 동서가 교역한 내용을 특별기획 다큐멘타리 ‘실크로드’를 제작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중국을 이끌던 덩샤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개방된 이미지의 중국을 소개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후원한 것이기도 했다. 석양을 배경으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캐러밴 행렬로 시작되는 ‘실크로드’ 시리즈는 세계적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그리고 국내에도 알음알음으로 알려지면서 KBS는 1984년에 이 시리즈를 수입해 방영함하여 국내에서도 크게 실크로드 붐이 일었다.

이런 배경 위에 실크로드의 끝에 해당하며 중국의 한과 로마제국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스키타이의 문화를 보여주는 ‘스키타이 황금’전은 대단한 화제를 모았다. ‘스키타이 황금전’에 나온 하이라이트 몇몇을 소개하면 우선 스키타이 무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조각으로 장식한 황금 빗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키에프 위쪽 드네프르 강가에 있는 솔로하 무덤에서 출토됐다. 말을 탄 채 창을 겨누는 용사와 그 뒤를 따르는 단검과 방패 무장의 용사가 말에서 굴러떨어진 방패의 적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19세기의 대리석 조각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이다. 이 장식품은 세계적으로도 스키타이를 대표하는 유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키타이 용사 장식 빗> 기원전 5세기말-4세기초, 金 높이12.6cm, 드네프르 솔로하 무덤 


<환형 표범 버클> 기원전 5-4세기, 금 길이 10.9cm, 사키 문화 


  둥글게 몸체를 만 표범으로 버클를 형상화한 <환형 표범 버클>은 한반도의 맹수형 버클의 조상으로 이는 18세기 러시아를 지배한 표트르 대제의 컬렉션에 들어있던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18세기 들어 우크라이나 지방과 북코카사스 지방에서 처음 발굴됐다.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대 유물에 많은 사람이 열광했고 그중의 한 사람이었던 표트르 대제는 이들을 자신의 컬렉션으로 삼았다. 당시는 고고학 발굴이 전 유럽에 유행하면서 각국 군주들은 자신의 성에 호기심의 방, 이른바 쿤스트카머(kustkammar)를 만들고 그곳에 진귀하고 이색적인 물건들을 수집해 놓았다. 이 버클은 우랄산맥 근처 사키 문화의 유물로 여겨지나 출토지는 미상인 채로 전한다. 표트르 대제의 컬렉션이 1859년 에르미타주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유명한 <말을 공격하는 사자 형상의 허리띠 장식(帶金具)>(표지 그림)와 함께 이 <환형 표범 버클>도 함께 이관됐다. 또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하는 전사들을 조각한 띠 장식(帶金具) 역시 피트르 대제 컬렉션으로 널리 알려진 유물이다.


<나무 아래 휴식 문양의 띠 장식> 기원전 5-4세기, 金 길이 12.5cm, 사키문화 


<황소 상> 기원전 40-30세기, 은 높이 8cm, 북코카사스 마이코프 무덤 


스키타이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4천년 말에서 3천년 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소개된 <황소 상>이다. 고대에는 눈에 보이는 사물을 2차원의 그림으로 그리기보다 3차원 그대로 조각으로 만드는 데 더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이는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힘있게 굽은 뿔, 건장한 체격, 튼튼한 다리 등 사실적인 묘사가 수천 년 뒤의 관람객을 감탄하게 한다. <황소 상>에는 몸통에 구멍이 나 있어 장대 위에 달았던 특별한 용도의 장식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전형적인 스키타이의 동물 의장(意匠)이 발휘된 장식품으로 <사슴 형상의 방패 장식>이 있다.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장식품은 다리를 구부리고 앉은 사슴이 긴 뿔을 갈기처럼 드리우고 있다. 여기에는 대상의 특징적인 이미지 위에 부분적으로 정교한 기술을 발휘해 전체적으로 사실적인 인상을 강하게 하는 스키타이 장식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슴문양 방패장식판> 기원전 7세기 후반, 금 길이 31.7cm 북코카사스 코스트롬스키야 무덤 


<동물투쟁문 헌주배> 기원전 5세기말-4세기초, 金 지름 21.3cm, 드네프르 솔로하 무덤


말을 타고 이동하는 스키타이족은 빠른 기동력으로 주변 세력을 쉽게 제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용하기도 했다. 스키타이 문화의 중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5-4세기에는 그리스 출신의 장인들이 스키타이족 상층부의 주문에 응해 세공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동물들의 싸움 장면을 가득 새긴 <동물투쟁문 헌주배(獻酒盃)>이다. 우즈베키스탄 드네푸르 강 하구의 자포리자 유적에서 나온 이 황금 잔에는 사자가 암사슴과 말을 공격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압출 장식돼 있다. 스키타이 전설에는 ‘왕에게는 신성한 황금 접시가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잔의 가장자리에는 그리스어로 ‘그리스 장인 헤르몬이 스키타이 왕 안티스테네이에게 축제를 기념해 이를 바친다’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하다.


<그리핀 문양의 원통형 장식> 기원전 4세기말-3세기초, 金 철반석, 높이 19.3cm, 북코카사스 베슬레네프 무덤 


<그리핀이 있는 장대 장식물(竿頭飾)> 기원전 5세기, 나무 가죽, 길이 23cm, 알타이 파지리크 무덤 


  또 그리스 양식을 현저하게 보여주는 장신구로 <그리핀 문양의 원통형 장식>이 있다. 그리핀은 보통 독수리 머리와 날개에 사자의 몸통을 한 상상의 동물을 말하는데 여기에서는 사자의 머리로 형상돼 있다. 그리핀은 서아시아 고대문양에서부터 등장해 그리스에서도 널리 쓰여 동전에도 그리핀 문양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 역시 그리스 장인들이 솜씨가 반영된 것으로 중간에 붉은색 석류석이 장식돼 있다. 이런 보석 장식은 앞서 소개한 것처럼 경주 황남대총에서 나온 금팔찌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 청동기와의 인연을 몇 가지 더 소개하면 알타이산맥 위쪽에 있는 그라스노야르스크에서 출토된 청동검에는 상상의 동물 그리핀이 머리를 맞대고 있는 장식이 들어있다. 이와 관련해 삼성미술관리움에 있는 대구 비산동 출토의 세형동검을 떠올릴 수 있다. 이 동검에도 머리 부분에 그리핀은 아니지만 정교한 물새가 장식돼 있다. 또 카자흐스탄 남부의 두즈다크 시르-다리아 유적에서 나온 팔찌는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보석이 박힌 금 팔찌는 매우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대구 비산동 출토 <백조 장식 세형동검> 길이 12.5cm, 국보 137-1호 삼성미술관리움
  


단검, 기원전 5-4세기, 철 길이, 각 29.9cm, 29.8cm 알타이 크라스노야르스크 부근 출토 
 


황남대총 출토 <금제누금 감옥 팔찌> 지름 7.2cm, 보물 623호 국립경주박물관
 


<터키석 장식 팔찌> 기원전 3세기, 지름 7.5cm, 두즈다크 시르-다리아 유적 출토 


  그리핀 문양은 알타이 문화에서도 등장하는데 알타이를 대표하는 파지리크 유적에서도 유사한 장식물이 출토됐다. <그리핀이 있는 장대 장식물(竿頭飾)>은 독수리 머리를 한 그리핀이 사슴머리를 물고 있는 조각이다. 그리핀 머리 위쪽으로 가죽으로 만든 그리핀이 마치 닭 벼슬처럼 반복되고 있다. 이 장식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무령왕릉의 목제 봉황 머리와 어딘가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 장식물이 나온 파지리크 무덤에는 한국 개다리소반의 원형처럼도 보이는 호랑이 형상의 <상다리>가 출토돼 눈길을 끌었다. 그 외에도 북코카사스 코반 무덤에서 나온 <전투용 도끼>에 새겨져 있는 사슴 문양은 어딘가 낯익다. 


<상다리> 기원전 5세기, 나무 높이 37.5cm, 알타이 파지리크 무덤


<전투용 도끼> 기원전 9-7세기, 청동 길이 17.9cm, 북코카사스 코반 무덤 


<옥좌 팔걸이장식> 기원전 7세기후반, 金 백옥, 길이 19.2cm, 북코카사스 켈레르메스 무덤 


이 전시는 한소 국교 1주년 기념전이기는 해도 조선일보가 박물관과 공동주최하고 이를 삼성미술문화재단 후원했다. 그래서 일반전시와 달리 비교적 비싼 입장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0만 명 넘는 관람객이 다녀갈 정도로 호응도가 높았다. 스키타이 황금전 이전에도 박물관에서 연 외국 문물전이 있기는 했다. 1982년에 ‘잉카의 황금 문화전’이 열렸으나 이는 페루의 광산협회가 요청해 열린 전시였다. 1983년에 열린 ‘로마백경(百景) 판화전’ 역시 순회전으로 열린 소규모 전시에 불과했다. 올림픽에 맞춰 1988년에 ‘고대 스포츠의 예술과 과학: 에트루리아, 로마에서 르네상스까지’가 열렸지만 이 역시 박물관이 관여한 전시는 아니었다.
  그래서 ‘스키타이 황금전’은 각국을 대표하는 국립박물관이 정식으로 각서를 교환하고 연 첫 번째 특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상호주의에 따르면 당연히 다음 해 정도에 에르미타주에서 한국미술전이 열려야 했으나 소련의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이상하게 돼 버렸다. 11월17일 전시가 끝나고 소개 유물이 귀국할 무렵 소련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91년 들어 소련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며 각 소비에트 연방의 각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해 12월26일 소비에트 연방이 정식 해체되고 러시아가 독립국가연합(CIS)의 한 나라로 새로 탄생했다. 그래서 에르미타주박물관의 한국 전시는 허공에 뜨면서 무기한 연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국립중앙박물관의 러시아전시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0년 6월에야 열리게 됐다. 이때 ‘소나무 숲에 부는 바람’이란 타이틀 아래 한국미술 350여 점이 비로소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참고로 재임 중에 한국을 각별히 좋아했던 러시아의 초대 예친 대통령은 스키타이 황금전 이후 1년만인 1992년 11월 서울을 방문했으며 이때 그는 한국에 KAL기 격추에 대해 공식 사과를 했다.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4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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