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소장문화재전
1985년 12월 27일 -1986년 1월 20일
1985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 저녁. 일찍 해가 져 바람이 한창 쌀쌀하게 느껴지는가운데 세종로 한복판의 세종문화회관 지하 1층 전시실에서 따뜻한 스팀 난방 가운데 성대한 전시 오프닝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이원홍 문화공보부장관, 염보현 서울시장, 박현태 KBS 사장 등이 귀빈이 참가해 「서울시민소장문화재전」의 테이프 커팅을 했다. 이 전시는 박물관 소장품 소개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종문화회관 자체의 기획전시도 아니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컬렉터들이 스스로 발의해 자신들이 비장한 컬렉션을 일반에 공개한다는 취지로 열린 전시다.
출처: 서울사진아카이브 1985.12.
1985년이라면 정부도 그렇지만 서울시도 이듬해 9월에 열릴 제10회 아시안게임이라는 거국적인 행사의 준비가 본격화되고 있던 시기이다. 정부는 아시안게임 뿐만 아니라 두 해 뒤에 열릴 올림픽까지 겨냥해 전쟁 이후 한국이 경제 사회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테마를 고민하게 됐는데 세계에 알릴 한국의 모습에 경제를 간판으로 삼기에는 남들 보기에 다소 우습게 보일 수도 있고 그렇다고 평화를 내걸기도 남북문제에 이렇다할 큰 진전이 없어 전략적 테마는 자연히 문화로 정해지게 됐다(이 해 9월에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제1회 남북 이산가족 상봉회가 열리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풍부한 전통문화가 있고 문화 역량이 있다는 자부심과 달리 그때는 문화인프라가 빈약했고 또 문화생산 능력 역시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관계자들은 실제로 투입이 가능한 문화자산을 찾아내는 데 동분서주했다.
이때 인사동에서 고미술 전문잡지 『문화재』를 간행하고 있던 이원기(李元基) 대표가 자신의 고교동창인 염보현 서울시장을 만난 자리에서 ‘숨어있는 자산이 있다’며 서울 시내 컬렉터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 소장품을 끌어내 전시를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일사천리로 진행된 전시가 영하의 날씨에 오픈한 「서울시민소장문화재전」이었다. 어느 한 지역의 컬렉터들이 소장한 물건들을 일반에 소개하는 원래 공공 미술관, 박물관의 고유 업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무렵 그들의 손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색적인 아이디어로 성사된 전시였지만 사실 그 배경에는 당시 한국 사회는 일제의 1930년대 후반에 못지않은 고미술 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그 얘기를 하면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80년대 들어 한국 사회는 아스팔트 위에 벽돌 조각과 최루탄이 난무한 한국판 슈트룸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시대가 계속됐다. 억압된 정치 욕구 내지는 사회 변화에의 바람이 격동의 시대를 가져온 것처럼 비췄지만 한 편에서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일’도 묵묵히 진행되고 있었다. 80년대는 20세기 한국의 어느 시기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지식과 교양 그리고 더불어 문학적 상상력의 폭발을 보인 10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무렵이 되면 얼렁뚱땅 일본말 책을 베껴서 팔아먹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누구나 눈치챘다. 그와 동시에 해방 후 서구로 유학 갔던 1세대 유학파들이 귀국해 원서를 직접 번역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미술 쪽으로만 보면 헝거리 출신의 미술사가로 영국에서 활동한 아놀드 하우저가 사회 경제사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한 예술사회학의 대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반성완, 백낙청, 염무웅의 공동번역으로 1974년부터 1981년에 걸쳐 출판됐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출신의 미술사가로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건너가 바르부르크 연구소(The Warburg Institute)에 자리를 잡았던 어네스트 곰브리치가 쓴 『The Story of Art』도 최민 번역의 『서양미술사』란 제목으로 1982년에 출판됐다.
사회과학 쪽에도 이 무렵에 수많은 출판사가 생겨났다. 60년대 70년대에는 제목도 들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금서(禁書)로 낙인찍힐 만한 책들이 하늘에서 무언가가 쏟아지듯이 나왔다. 거기에는 해직 기자나 운동권 출신자들처럼 출판과 전혀 무관했던 사람들이 뛰어들어 구태와 결별하고 새로운 기획으로 수요를 발굴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다. 실제로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서울에만 100여 개 가까운 사회과학 전문서점이 있었다.
인문이나 사회과학 쪽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때는 조선의 18세기에 소설 붐에 일었던 것 이상으로 엄청난 소설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인기 작가의 소설은 수십만 부가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도처의 남녀노소 독자들이 책 속에 머리를 파묻고 문학적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예를 들어 1974년에 한국일보의 연재로 시작된 황석영의 『장길산』은 1984년에 끝을 맺었으나 얼마나 인기가 높았던지 일제때 나온 홍명희의 『임꺽정』을 깡그리 잊게 할 정도였다. 『장길산』의 인기도 인기였지만 80년대에 소설 전성시대의 문을 활짝 연 장본인은 『장길산』이 아니라 제5공화국이 들어선 1981년에 나와 단숨에 1백만 부가 팔린 김홍신의 『인간시장』이었다. 이 소설로 한국에서 1백만 부 소설의 시대가 새롭게 열렸는데 곧바로 1백만 부는 가소롭다는 듯이 수백만 부가 예사인 소설들이 여럿 나왔다.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 등이 모두 이 시절 모두 천만 부 넘게 팔린 대하 소설들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사회학에서는 현실사회나 정치에 대한 불만 내지는 폐색감이 다른 쪽으로 분출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경제적인 관점을 들이대면 일제와 전쟁을 거치면서 겪어야 했던 지지리 궁한 가난과 빈곤을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자 잠복해있던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구와 욕망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다시 미술로 돌아가면 80년대는 이런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미술 전집(全集)의 시대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당시는 누구나 이미지에 굶주려 있던 시대였다. 소설은 아무리 읽어도 이미지는 머릿속의 상상뿐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도판 이미지를 큼직하게 그리고 올 컬러로 제작된 미술 전집들이 잇달아 나왔다.(물론 여기에는 외부의 자극도 있었다. 일본 대형출판사의 하나인 쇼가쿠칸(小學館)은 1966년부터 72년까지 전20권에 이르는 『원색 일본의 미술』을 펴냈는데 이것이 대 히트를 해 수십만 질이 팔리면서 일본 출판계에 미술 전집의 출판 붐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에서는 전집 출판에 앞서 우선 특대 사이즈에 그림을 소개한 화보 출판이 먼저 있었다. 1972년 탐구당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김홍도의 ≪풍속화첩≫을 거의 원촌(原寸) 사이즈로 소개한 『단원풍속도첩』을 펴냈다. 이 화첩이 인기를 끌자 이어서 1974년에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혜원전신첩≫ 30폭을 모두 수록한 화첩을 출판했다.
이런 성공을 곁눈질하면서 다른 출판사도 뛰어들어 지식산업사는 1974년에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를 모은 『이조풍속화첩』 상,하 2권을 초대형 사이즈로 펴냈다. 지식산업사는 1983년에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추사 김정희의 걸작만을 모아 자세한 해설과 함께 『추사정화(秋史精華)』를 펴냈다.
이런 사전 정지작업 격의 출판을 바탕으로 시작된 것이 한국미술 전집의 출판이다. 첫 스타트를 끊은 곳은 중앙일보이다. 중앙일보의 계간미술부에서는 1979년부터 학계와 박물관의 전문가들과 손잡고 ≪한국의 미≫ 시리즈를 기획해 1986년까지 전 24권을 펴냈다. 이는 회화뿐 만이 아니라 도자기, 불교미술, 공예, 석조미술 등 한국미술 전반을 모두 다룬 한국 최고의 미술전집이다. 이 기획의 첫 번째 책이 나오자 바로 추종자가 등장했는데 예경 출판사는 이듬해 1980년에 『한국미술오천년』이란 타이틀로 전8권의 전집을 냈다. 이 전집은 앞쪽 4권에서 한국미술을 다뤘고 후반 4권은 근현대 작품을 다뤘다. 그리고 이어서 보다 본격적으로 ≪한국의 미≫ 시리즈처럼 한국미술 전반을 다루자는 기획을 새로 시작해 『국보』란 타이틀로 1986년까지 24권을 펴냈다.
이렇게 해서 80년대에는 올 컬러로 된 전집 출판을 통해 한국미술이 회화 뿐만 아니라 생소했던 공예 분야에 이르기까지 일반에게 널리 소개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됐다(당시 전집물 판매는 서점이 아니라 전문 판매회사가 별도로 있어 여기에 소속된 서적 세일즈 맨이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판매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과 많은 인력과 자본이 필요한 전집 제작은 단순히 조건만 갖췄다고 해서 쉽게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우선 해당 방면의 아카데믹한 지식이 축적돼야 했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중요 작품의 선정 기준이 마련돼야 하는데 여기에는 시대의 미적 가치에 대한 어떤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야 했다. 또 그 위에 소장처에 대한 정보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야 비로소 가능했다. 그래서 전집 출판은 한 시대, 한 사회가 지닌 미술문화 역량이 종합적으로 동원돼 이루어지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에서 70년대 초에 일본미술의 전집 출판이 계기가 돼 일본미술 붐이 일어났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전집 보급과 함께 한국미술 전반에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전시장을 찾는 발걸음도 늘었고 또 시장도 활발해졌다. 시장에는 말할 것도 없이 딜러 이외에 수집가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전집에 많은 개인 컬렉터들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사회에서는 컬렉터를 보는 시각이나 인식이 개선되기도 했다. 가난한 시대에는 미술품 컬렉터라고 하면 일제 식민지통치 시절의 일본인 컬렉터를 먼저 떠올리면서 문화재의 약탈자, 수탈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안팎으로 달라진 환경과 인식을 배경으로 컬렉터들이 전면에 나서서 기획한 전시가 「서울시민소장문화재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 이 전시는 서울특별시와 KBS 한국방송공사가 주최하고 주관은 한국방송사업단이 맡았다. 그래서 초대의 글에서 염보현 시장이 실렸는데 그는 ‘이번 전시회는 특히 86 아시아 경기대회와 88 올림픽을 앞두고 뿌리 깊은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을 세계만방에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리라 믿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일부러 넣었다.
명목적인 취지야 어떻든 이 전시는 개인 소장가들의 숨겨진 비장품이 일거에 공개됐다는 점에서 사회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소개 작품은 회화, 서예, 불교미술, 민화 그리고 청자, 백자, 분청사기까지 모두 182점이나 됐다. 주관처가 미술전문 기관이 아니고 또 출품 개인 소장자들 간에 기(氣) 싸움이 벌어질 우려도 충분히 있어 애초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를 모아 별도의 추진위원을 구성해 선정에 공정을 기했다. 그래도 미심쩍었는지 이들은 선정 기준을 아예 도록에 명문화했다. ‘미술사적 가치, 미적 창의력을 우선 삼았고 비슷한 것들이 있는 경우 격조, 보존 상태, 전시 효과 등을 감안했다’고 못을 박았다. 이렇게 선정 기준을 공표할 수 있었던 데는 추진위원에 마치 미술전집 제작을 하듯 학계, 언론출판계, 소장자 등이 고루 망라됐기 때문이다.
잠시 이들을 소개하면 고병복 박우회(朴友會) 회장, 김종규 삼성출판사사장, 맹인재 한국민속촌 사장, 문명대 동국대 교수, 손보기 연세대 교수, 안휘준 서울대 교수, 허영환 성신여대 교수, 이강칠 문화재 전문위원, 이종석 중앙일보 계간미술 주간, 이원기 잡지 문화재사 대표,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 관장, 컬렉터 신효충 씨 등이다.
묘법연화경 권7 변상도, 고려 14세0기 감지금니 9x26cm
이런 원칙 아래 소개한 작품 중에서 특히 회화 쪽에는 놀라운 것들이 다수 포함됐다. 우선 고려 사경이 몇 점 들어 있었고 조선 중기의 불화도 있었다. 그외에 전시한 지 몇 년 뒤에 보물로 지정되는 것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우선 고려 말기에 제작된 <묘법연화경 변상도>도 하이라이트의 하나였다. 이는 법화경 권7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유복한 보살이 권속들을 이끌고 부처님 앞에 참배하는 모습이 한 면 가득히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중에 보살의 현실 생활을 묘사한 것과 같은 풍속 장면도 일부 들어있어 눈길을 끌었다. 이는 나중에 보물로 지정됐다.
작자미상 <하관계회도> 1542년 지본수묵 142x63cm
작자미상 <평사낙안> 17세기 견본담채 105x70.5cm
또 중기의 그림도 다수 소개돼 관심을 끌었는데 소상팔경 8폭 중 하나인 <평사낙안>도 고졸한 산악과 나무 묘사 그리고 건물을 배치한 구성으로 관심의 대상이 됐다. 윤두서와 그 후손들의 그림도 다소 소개됐으나 역시 일반의 관심은 겸재 정선 그림에 쏠렸다. 예닐곱 점이 소개된 가운데 <세검정> <홍지문> <압구정>은 한 화첩에 실린 것을 모두 소개한 것이다. 겸재 특유의 필치가 보이는 이들 실경산수도는 기존에 알려진 세검정 그림이나 압구정 그림과는 약간 달리 구도를 보이며 정교한 필치가 탁월한 걸작이다.
정선 <홍지문> 18세기전반 견본담채 29.5x37cm
정선 <압구정> 18세기전반 견본담채 29.5x37cm
정험 <군산이우도> 1593년 지본담채 25x36cm
김홍도 <검선녀도> 18세기후반 지본담채 34.4x57cm
이방운 <무이정사도> 18세기후반 지본담채 29x46cm
김정희 <묵난도> 19세기전반 지본수묵 22.5x85cm
그리고 임진왜란 때 금강 하류의 군산포로 피난 간 문인 조영이 친구 김주와 함께 망중한의 한때 보내며 그린 <군산이우도>는 중기에 그려진 사실적 아회도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그림이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많이 소개되지 않은 민화에서는 달마가 양자강을 건널 때의 모습이라는 화제가 있는 <달마도>가 출품됐다.
작자미상 <평양성도> 18세기 지본담채 63x129cm
작자미상 <달마도> 18세기 지본채색 71.5x40.5cm
도자기는 서화 이상으로 컬렉터가 많은 장르이지만 전시가 회화에 중점을 두어서인지 그리 많이는 소개되지 않았다. 그중 칠보문양을 넣은 청화백자 주전자, 백자 용문투각필통 등은 많은 눈길을 끌었다.
허목 <전서 > 지본수묵 31x46cm
청화백자 칠보문 주전자 19세기 높이 16cm
<서울시민소장문화재전>은 국가적 대사업을 앞두고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전통 정신이 만들어낸 이색 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미술 붐이라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그 애호의 범위를 일반에게까지 한층 넓힌 기회였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제1회 <서울시민소장문화재전>에 소장품을 공개한 개인 컬렉터를 소개하면 이원기, 김중업, 박재옥, 이영호, 김문기, 박영순, 김창수, 김정숙, 신효충, 김연형, 조영하, 조재진, 백순기, 신기섭, 이병하, 유겸노, 서정철, 김교식, 전병석, 이인기, 송종근, 이순형, 권옥연, 이병하, 김종규, 이정순, 고병복, 남궁련, 김호창, 이정순, 임송의, 유덕화, 이만철, 유상옥, 심상숙, 김옥영, 김기수, 송옥영, 허동화, 정하건, 조규희, 박영무, 이기웅, 한기상, 김광천, 박수천, 이언년 씨 등이 소장품을 출품했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