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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16. 옛 그림 마지막 세대들의 박물관 입성 -한국근대회화백년
  • 1966      

한국근대회화백년 (1850-1950)
국립중앙박물관 1987년10월20일-12월6일


한국 현대정치학에는 팔칠 체제라는 말이 있다. 일반에게는 생소한 감이 있지만 사전을 보면 ‘1987년을 기점으로 한 민주화 이후의 한국 사회의 정치변동과 특질을 통칭하는 개념’이라고 돼 있다. 이 해설을 보면 팔칠 체제라는 것이 온 국민이 모두 동참하다시피 한 1987년의 민주화 운동 이후에 전개된 사회의 거대한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그해 초여름에 벌어진 민주화 운동은 거창했다. 1월에 박종철 군이 고문치사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정권 아래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에게조차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 쪽에서 구체제를 존속시킨다는 호헌(護憲) 선언을 하자 모두는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다’라는 마음을 먹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한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죽으면서 모두의 생각이 행동으로 바뀌면서 민주화의 불씨가 댕겨졌다. 

6월10일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 국민, 온 계층이 몰려나온 데모가 계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호헌 철폐’ ‘민주 쟁취’로 집약된 사회 변화를 끌어냈다.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이 이뤄졌고 또 사회 각 부분에 민주적 가치가 착실히 존중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해방 이전과 해방 이후, 전쟁 이전과 전쟁 이후처럼 87년 이전과 87년 이후라는 말도 가능하게 됐는데 이는 비단 사회, 경제, 정치 분야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70년대 말 탄생한 민중미술이 수면 위로 정식으로 떠오른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사회 비판적인 테마나 반정부적인 주제를 그렸다고 숨어다니거나 도망치지 않고 떳떳하게 전시장에서 그림을 내걸 수 있게 됐다. 각종 미술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긴 것도 민주화 이후에 생겨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가 미술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발휘하고 있을 때 옛 그림 쪽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는 무언가 행동을 해 보이자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자는 변화였다. 이른바 인식의 변화 내지는 확장을 촉구한 것인데 국립중앙박물관은 격정의 파도가 한차례 지나간 뒤인 10월 20일 ‘한국근대회화백년’ 특별전을 개막했다. 이 전시에는 타이틀 옆에 괄호를 붙이고 1850-1950을 보충으로 더했다. 즉 한국미술이 현대미술로 이어지는 교량적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구한말에서 일제와 해방 직후까지의 무대에서 활동했던 전통 기법의 화가와 그들이 그렸던 그림들을 다시 재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1850년에서 1950년 사이의 100년은 한국 전체의 역사로 보아도 더할 나위 없이 불운했고 불행했던 시기였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영정조 시대에 쌓은 탄탄한 국가재정이 적자로 돌아서기 시작한다. 정조 말에는 1000만 석에 이르는 비축 재정(가뭄이나 흉년에 농민에게 저리로 융자해주는 환곡의 밑천)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잦은 자연재해, 전근대적 행정체계의 폐해 그리고 탐관오리의 발호로 인해 계속 줄어들어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절반도 남지 않았고 그것 조차 허위기재가 상당수 있었다. 이렇게 국력이 쇠약, 피폐해지는 것과 동시에 밖으로부터 동양 진출을 노리는 열강의 침입이 시작됐다. 그 와중에서 사회 지도자, 지도 계급은 현명한 대응을 하는 데 완전히 실패해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됐다. 그후 36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를 거치고 자력이라고 말할 수 없는 해방을 맞이했으나 불행은 계속돼 곧 전쟁이 시작됐다. 

미술 쪽에는 이런 불행 위에 미술만의 또 다른 혼란이 있었다. 자발적으로 전통과 근대의 교체를 이룩하지 못한 사이에 미술(당시는 서화라고 불렀다)을 둘러싼 환경이 크게 변한 것이다. 보통 교육의 확대, 인쇄술의 발달, 잡지의 증가 등와 같은 근대적 사회 환경의 변화 속에 서양 근대 미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돼 강한 라이벌로 등장했고 또 그림을 보고 즐기는 감상자층도 전과 다른 신진 관리, 신흥 부르조아로 바뀌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전통 회화는 당대의 미적 감성을 따라잡는 새로운 미학을 창조해내는 데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기 그림은 전통의 조선시대 회화는 물론 근대 이후의 한국회화 쪽 모두에서 반쯤 잊혀진 시기로 치부됐다. ‘한국근대회화백년전’은 이런 선입견이 있는 시기의 그림을 다시 꺼내 추려 봄으로써 격동의 시기 속에 어떤 고민과 어떤 새로운 모색에 대한 시도가 있었는가를 재확인하기 위한 기획이었다.

구한말에서 근대까지의 100년 사이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실은 박물관 내에서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실천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 역사가 이왕가박물관과 총독부박물관에서 시작된다. 이들 박물관이 출범했을 때 ‘한국근대회화 백년전’에 나온 그림들은 그 당시에 엄연한 ‘컨템포러리’, 즉 현대 회화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현대미술은 어디서나 박물관의 수집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해방을 맞이해 우리 손으로 박물관을 재건됐을 때 박물관 안에는 구한말에서 20세기 전반기에 걸친 그림의 소장품이 매우 빈약했다. 거기에 초창기 박물관에는 유물구입 예산이 없었다. 예산이 정식으로 편성된 것은 70년대 후반 들어서다. 이때조차도 우선순위는 작품 수가 적은 조선 전기와 중기 그리고 박물관에 꼭 있어야 할 18세기 주요 화가의 작품들이 먼저였다.

이렇게 해서 박물관에서는 해볼 만한 전시이자 해야 하는 기획이라는 생각만 있을 뿐 실행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2천여 점 가까운 이홍근 선생의 서화 유증품이 들어왔고 그 속에 상당수 근대 그림이 포함돼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이 ‘한국근대회화백년’ 기획의 출발점이 됐다. 그렇기는 해도 개인의 수집품에는 개인의 취향이 담겨 있어 종합적인 전시로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전시에 필요한 그림들에 대해 어느 전시보다 다량으로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에서는 이를 위해 미술계 사정에 밝은 다수의 외부 인사를 자문위원으로 초빙했다. 이때 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이면서 미술사가로 활동하던 이동주 교수,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경성 관장, 서울대학교의 안휘준 교수 그리고 미술전문지 계간미술의 이종석 주간과 미술기자를 거쳐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내고 있던 이구열 소장의 5명으로 외부 자문위원단이 꾸려졌다. 

당시 학예관들은 박물관 내부자료와 이들의 정보와 소개를 실마리로 최루탄이 난무하는 서울 시내를 헤집고 다니면서 일일이 개인 미술관과 소장자들을 만나서 사진을 찍고 자료를 챙겼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와 사진은 외부 자문위원들과 박물관장, 학예실장, 미술부장이 나란히 앉은 가운데 머리를 맞대고 검토하면서 40여 명 화가와 이들의 그림 100점을 출품작으로 선정했다. 그리고 전시의 대상 기간을 1850년부터 1950년 사이의 활동으로 못박았다. 출생년도는 조금 넉넉하게 잡아 1800년 출생에서 하한은 1900년까지로 했다. 그래서 출품 화가는 1809년생으로 추사의 제자이며 장승업과 나란히 구한말 수묵 화단을 양분하다시피 했던 허련(許鍊 1809-1877)이 제일 앞쪽에 오게 됐다. 이어 그와 동갑이면서 19세기 전반기 묵죽화의 대가인 신위의 아들이자 화훼 그림에 탁월한 솜씨를 보인 신명연(申命衍 1809-?)이 뽑혔다. 그 뒤로 나비의 남계우(南啓宇 1811-1888), 묵란의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뒤를 이었다.


신명연 <강남무진의> 지본담채 21.0x32.5cm 개인 소장 


김수철 <화훼> 지본담채 112.3x42.4cm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중후반은 여항문학이 발달하면서 화원, 중인화가들의 활동 폭도 넓어졌는데 이를 대표하는 화가로 매화를 잘 그린 전기(田琦 1825-1852)와 화원 유숙(劉淑 1827-1873) 그리고 유재소(劉在韶 1829-1911) 등이 선정됐다. 그 뒤로도 홍세섭(洪世燮 1832-1884), 장승업(張承業 1843-1897), 채용신(蔡龍臣 1848-1941), 지운영(池雲英 1852-1935), 김응원(金應元1855-1921),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있고 이어서 장승업의 제자인 조석진(趙錫晉 1853-1920)과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소개됐다. 그리고 활동 시기가 일제 식민지 때가 되는 김규진(金圭鎭 1868-1933), 김용진(金容鎭 1882-1968), 이도영(李道榮 1884-1933), 고희동(高羲東 1886-1965) 등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조석진과 안중식을 좌장으로 모시고 김응원 등과 함께 서화미술회와 서화협회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이들의 서화협회에서 수학한 화가들이 이른바 6대가 화가이다. 이들 가운데 일본에서 법학 공부를 하다 그림을 그리게 된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이 가장 연장이고 그 다음이 어진화사였던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이다. 그 뒤로는 이상범(李象範 1897-1972), 변관식(卞寬植 1899-1976),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용우(李用雨 1902-1952)로 끝을 맺는다. 

근대 회화의 마지막 세대를 6대가라고 부른 것은 1971년의 일이다. 당시 서울 신문회관에서 1940년에 열린 조선미술관 창립 10주년 기념전에 참가했던 화가 중에 당시 생존해있던 6명을 초대해 ‘동양화가 여섯분 전람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동양화 6대가라는 말로 굳어졌다.


허련 <홍백매도 10곡 병풍, 지본담채 100.5x398.0cm 권옥연소장 


‘한국근대회화백년전’은 다른 말로 하면 이들 40여 명들의 대표작을 추린 전시라고 할 수 있다. 하이라이트를 살펴보면 우선 한양과 전라남북도를 오가며 묵모란의 대가로 이름 높은 허련의 경우 말년에 대폭의 홍백매 병풍을 그린 것이 있다. 이는 서양화가 권옥연 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출품했다. 위당 정인보의 제발이 있는 이하응의 <묵난도>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 명작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중국에 끌려갔을 때 여가를 틈타 묵난도 2폭을 그렸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이 북경 시장에 이 그림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사가지고 와서 대원군에게 보였다. 대원군은 그림 옆쪽에 ‘이는 내가 그려서 남을 준 것인데 일 년도 안 된 사이에 만 리를 돌아다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잃어버린 진주를 찾을 것 같이 신기하다’는 제발을 남겼다.


이하응 <묵란> 1881년 지본수묵 92.3x27.5cm 개인 소장
 


유숙 <내원(內院)> 지본담채 27.3x33.8cm 개인 소장
 


유재소 <산수> 지본담채 21.2x12.6cm 국립중앙박물관(동원 선생기증)


중인 화가이자 시회에 멤버이기도 한 유숙은 세필화가 특기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세검정> 이상의 필력을 보인 <내원(內院)>은 이때 처음 공개됐다. 요절한 중인 화가 전기와 둘도 없이 친했던 유재소는 20대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겸인으로 일했던 이색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는 맑고 담백한 분위기의 산수화에도 뛰어났는데 동원 선생 유증품에 홀로 한가한 기분을 담는다는 뜻을 적은 <산수>가 있어 출품됐다.


몽인 정학교는 구한말 중급 지방관을 지내다 은퇴 후에 본격적으로 서화가로 나선 사람이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한 장승업을 대신해 그의 그림에 화제를 도맡다시피 했는데 자신은 돌 그림이 전문이다. 전시에는 이주성 씨가 소장하고 있는 꼼꼼하고 정교한 필치로 소나무와 바위를 그린 <송무석수(松茂石壽)>가 공개됐다. 


정학교 <송무석수(松茂石壽)> 1907년 견본담채 이주성 소장 

     
홍세섭 <유압도><야압도>  견본수묵 각 119.7x47.8cm 국립중앙박물관 

    
구한말의 문신이자 그림을 잘 그린 문인화가 홍세섭은 수묵으로 그린 화조화가 특기였다. 물살을 헤치고 헤엄치는 오리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이 그린 <유압도>는 이 시대에 등장한 신감각주의 화풍의 대표격인데 전시에 8폭이 전부 소개됐다.
그리고 구한말을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인 장승업은 ‘신이 내린 손’을 가진 화가로서 한번 본 것은 10년 뒤에도 꼭 같이 그릴만큼 천재적 기억력을 가졌다. 그가 그린 중국 화풍의 그림은 북경 사신들이 사온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필치를 가미해 한국식으로 바꿔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산수, 인물, 동물, 화조를 8곡 병풍에 가득 그린 것은 과거 최남선이 애장했던 것으로 전하는 명품이다. 
장승업의 제자인 안중식은 구한말 유명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방에 초청받아 우거화가(artist-in-residence)의 자격으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영광풍경> 10폭 병풍은 전남 영광의 부호 조인영 형제가 그를 초청했을 때 40일간 머물면서 그린 그림이다. 영광 읍내의 모습이 자세히 담겨 있어 구한말의 찾아보기 드문 실경산수화로 손꼽힌다.


장승업 <엽상제시(葉上題詩)> <세마> 견본담채 개인 소장 


안중식 <영광풍경> 1915년 견본담채 170.0x473.0cm 호암미술관  


김규진 <폭포> 1814년 견본담채 127.0x71.0cm 개인 소장  

일제 강점기가 되면 서양화 기법이 전래 됐을 뿐만 아니라 일본화는 물론 서양화를 그리는 다수의 일본 화가들이 조선에 나와서 활동했다. 당시 새로운 기법과 발상이 이런 환경을 통해 근대 수묵화가들에게도 전해졌는데 그 대표적 사례를 김규진이 그린 <폭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그는 청과 일본에 직접 건너가 새로운 문물을 배운 뒤 경성에 가장 먼저 사진관을 차리고 또 그림을 전시, 판매하는 화랑도 차린 이색 인물이다. <폭포>는 수묵의 발묵 기법을 과감하게 구사해 현대적 감각이 물씬한 그림이다.  
근대화단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화가들 가운데 김은호는 채색 인물화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그린 여성 얼굴은 다른 미인도와 달리 조선 여인의 독특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전시에 나온 미인도 가운데 <연당 미인>에 보이는 머리를 곱게 빗고 비녀를 꼽은 동그란 얼굴의 여인은 일설에 따르면 그의 부인을 모델로 했다고 전한다.
청전 이상범은 변관식과 함께 근대 회화의 나아갈 길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고민한 화가로 손꼽힌다. 그가 측필을 구사해 그린 얕은 언덕의 농촌 풍경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있을 법한 고향의 이미지라고도 말한다. 전시에는 해방 직후 고전적 준법인 절대준을 마음껏 구사해 설악산의 바위 봉우리를 그린 <설악산>이 출품돼 눈길을 끌었다.


허백련 <물오리> 1941년 지본담채 122.0x131.0cm 호암미술관 


김은호 <연당미인> 1921년 견본채색 144.0x51.5cm 개인 소장 


이상범 <설악산> 1946년 지본수묵 130.0x218.0cm 개인 소장


이렇게 소개된 전시는 가까이 보고 있지만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지나쳤던 근대 회화의 세계를 종합적으로 재정리했다는 점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당초 이 전시는 중앙청 이전 1주년 기념전으로 준비됐으나 시국 사정 등으로 인해 조금 연기돼 열렸다. 그동안 시정에서 ‘볼 것이 없다’고 폄하하던 것과는 달리 전통의 재해석, 개성의 발휘, 근대로의 모색 등 다양한 시도가 있었던 다이나믹한 세계였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예상 밖으로 관람객이 몰려왔다. 그래서 박물관은 11월15일에 폐막하려던 것을 3주간 연장해 12월6일까지 전시했다.
그리고 전시가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큰 관심을 끄는 가운데 박물관 밖의 사회에서는 민주화 운동의 결실이 하나둘 정리되면서 12월16일에는 제13대 대통령을 직선제로 뽑는 선거가 실시됐다. 이때 노태우 씨가 36.6%의 득표율로 새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참고로 전시에 작품을 출품해준 기관, 대학, 사립미술관을 소개하면 국립현대미술관, 창덕궁, 간송미술관, 호암미술관, 서강대학교 박물관 등이다. 개인은 공창호, 권옥연, 김귀년, 김낙준, 김성렬, 김성환, 김태성, 박명자, 박주환, 박한수, 박호준, 손창근, 신기한, 신수진, 신효영, 안병근, 오일룡, 유원준, 이병주, 이선렬, 이원기, 이주성, 이헌, 임영철, 장숙환, 전제옥, 최규식, 최순석, 최영나, 한광호 씨 등이 작품을 출품해 주었다.(y)   

   






이원복, 윤철규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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