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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15. 중앙청 박물관 첫 전시, 역사에서 미술이 된 통신사 기록
  • 1582      

조선시대 통신사 특별전
1986년 8월 22일 ~ 10월 22일


조선시대 통신사 도록 표지


일본전시도록 표지


세상에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서로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라이벌 관계의 나라들이 있다. 유럽 대륙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좁은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면서 중세의 백년 전쟁 이래로 반목을 거듭해왔다. 영국인이 프랑스를 헐뜯고 프랑스 사람이 영국을 얕보는 일은 세계적으로 유명해 조크 집 같은 데에도 단골 소개가 될 정도이다.
아시아로 눈을 돌리면 베트남과 태국이 서로에게 단 하나도 양보하지 않으면서 대립해온 오랜 앙숙이다. 아시아에는 거기에 더해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있다. 한국과 일본은 한국이 일방적으로 당한 근대 역사에서 시작된다. 그러데 근래 들어 가해자가 성을 내는 이상한 상황으로 변질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은 조선을 합방하고 조선 땅을 식민지화해 한국인의 가슴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트라우마와 굴욕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일이 아니라면 구한말까지 일본과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다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왜 임진왜란이 있지 않은가’라는 말을 하겠지만 임진왜란은 식민지 침탈과는 종류가 다른 일회적 사건이었다. 또 그 이후에도 조선의 집단 멘탈리티에는 일본 자체를 얕잡아 보는 우월의식이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군이 함경도까지 파죽지세로 침입해서 조선 왕조의 운명이 딱 거기서 끝날 뻔했다. 이때 명의 대군이 달려와 가까스로 멸망을 모면하고 말 그대로 기사회생하게 됐다. 당시에 입은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로 인해 사회, 경제, 문화의 각 방면에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 이전의 조선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된 것처럼 바뀌었다. 그렇기는 해도 임진왜란 직후에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늘날처럼 모멸감에서 비롯된 복수심이나 자동적인 거부 반응과 같은 것으로 바꾸지는 않았다. 
전란 직후 사명대사 유정은 일본에 건너가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담판하면서 강화(講和)를 맺었다. 그리고 끌려간 조선 백성 5천여 명을 데리고 옴으로서 조선은 다시 일본과 선린 관계를 맺게 됐다. 

엄청난 물적, 정신적 피해에도 불구하고 쉽게 과거와 같은 관계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우선 일본 쪽에 전쟁 주모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의 정권이 몰락한 것이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결정적으로 작용한 동인은 문화적, 사상적으로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자부심에 변함이 없었던 조선이 아량을 보인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후 200여 년에 걸친 선린우호 외교가 재개됐다. 그 외교의 상징이 바로 통신사이다. 조선에서는 이후 12번에 걸쳐 ‘통신사’를 파견했고 일본은 한 번에 3백에서 500여 명에 달하는 ‘조선통신사’ 일행을 성의껏 맞이하며 교역을 넓히고 아울러 자신들에 부족한 대륙 문화를 흡수하고자 했다. 새로운 문화 접촉과 흡수의 기회로 삼았던 일본에서는 우리보다 많은 자료가 쌓여 있었다. 통신사 연구는 일본에서 1960년대 후반 시작됐으며 학계 외에도 재일교포 단체의 학술지 문예지 등이 연구발표의 장이 됐다.        

이러한 축적을 바탕으로 1985년 10월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은 ‘근세 200년의 일한 문화교류’라는 부제를 붙여 ‘조선통신사’ 특별전을 개최했다. 이는 실은 한일국교 정상화 2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기획됐다.


작자미상 <정사선(正使船)>(누선단도(樓船團圖) 6곡병풍4척 부분) 지본채색 각 59x263.6cm 일본개인


작자미상 <통신사 교토행렬도>(교토 춘추풍경도 병풍 좌척) 지본채색 155x362.0cm 일본개인 


모두가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한반도에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났으나 주변 국가와의 친교와 교역이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나라였다. 그래서 1965년의 국교 정상화 이후에 10년이 되자 먼저 국교정상화 기념행사로 특별전을 열었고 또 20년이 되면서 20주년 기념전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의 10주년 특별전에는 공교롭게도 준비 단계에서 김대중 씨 납치사건이 터지면서 스케줄이 뒤엉켜 부득불 한 해 연기해 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당시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의 전폭적인 소개로 힘입어 개최한 「한국미술5천년」은 앞서(7회 연재분) 소개한 것처럼 대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다시 20년의 기념 주년이 돌아오자 한일 사이에 공통되는 것을 찾다가 통신사를 테마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도쿄국립박물관은 일본 내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담당자를 서울에 파견해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자료의 출품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도쿄 전시의 폐막 이후 서울에서의 전시가 어떻겠는가’를 타진해왔다. 국교가 정상화되긴 했으나 한국 내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 대중문화는 수입금지 대상이었다. 비록 통신사라는 역사를 다룬 내용이기는 해도 기모노 차림 등 일본 전통문화가 다수 담겨 있는 시각물을 그대로 소개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루야마 오신(円山應震) <비와호도(琵琶湖圖)> 1824년 견본채색 57.6x146.6cm 비와호문화관


하나부사 잇초(英一葉) 1711년 <마상휘호도> 지본채색 91.4x280cm 일본개인


작자미상 <통신사행렬도> 지본채색 69.7x91.2cm 고베시립박물관 

이때 아이디어를 내 추진 쪽으로 선회시킨 사람이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 1929-2012) 교수였다. 그는 최순우 관장과 가까웠는데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에서는 통신사를 조공사(朝貢使)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일본이 식민지 통치를 하면서 계속해서 조선 문화를 깎아내리는 일을 했고 통신사라는 말도 그중 하나라고 했다. ‘통신사’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 수백 번 넘게 등장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가급적 ‘조공사라는 말을 바꿔 쓰면서 논문에도 쓰고 교과서에서도 썼다고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이참에 일본 학계와 미술계에 통신사라는 용어를 정착하는 기회를 삼아 조공사라는 말이 쑥 들어가게 하자’고 한 것이다. 이렇게 결정한 뒤 국내에서는 도쿄 전시를 적극 후원을 했다. 그리고 전시가 끝난 뒤에는 한국에 가져와서 전시한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그런데 정작 1985년 10월부터 두 달 동안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은 10년 전의 「한국미술5천년전」의 열기와 달리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당시 대여 유물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에 출장 간 박물관 직원들은 모두 ‘어! 이상한데’라는 말을 했고 그 분위기를 돌아와 전했다. 당초 일본은 통신사 특별전을 통해 한일간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다시 한번 어필하고자 했으나 의도와는 달리 전쟁 전에 조공사로 교육을 받았던 일본의 기성세대들이 과거와 다르다면서 외면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열린 한일국교 정상화 20주년 특별전은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로 끝내고 말았으나 이듬해 8월 서울서 열린 이 전시는 전무후무하다고 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월22일부터 10월22일까지 두 달간 열린 전시에 첫째 달에 24만여 명이, 둘째 달에는 28만여 명이 다녀갔다. 이렇게 성공을 거둔 것은, 조선 시대에 일본의 거듭된 요청으로 문화를 전해주기 위해 일본에 간 통신사의 전모를 소개하는 전시라는 매력적인 테마였기도 하지만 최순우-이진희 콤비가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라고 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청 이전 덕분이기도 했다.

말할 것도 없이 중앙청은 1926년에 완공돼 총독부 청사로 쓰였고 광복 이후에는 잠시 미 군정청이 되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세종로 일대에 정부청사가 완공될 때까지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사용됐다. 그러던 곳에 한국문화의 정수를 지키고 소개하는 핵심기관이라고 할 국립중앙박물관이 들어서고 또 그곳에서 과거 일본에 한 수 가르쳐주던 시절의 영광을 그대로 재현한 전시를 통해 보여주었으니 간혹 그 속에 기모노와 일본 전통 가옥이 보이더라도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자존심을 드높인 테마에 신의 한 수 같은 장소가 겹쳐지면서 이 전시는 공전의 대 히트를 기록했다. 거기다가 수 미터에 이르는 대형 행렬도가 몇 건이나 되는 등 전시에 나온 총 75건 유물 가운데 국내 소장품은 7점에 불과해 그야말로 남의 손으로 코를 풀고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다른 사람이 챙긴 격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에 나온 것은 국내에서는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것들이 많았다.


가노 마스노부(狩野益信) <통신사 환대도> 1655년 지본채색 166.7x501.6cm 교토 센뉴지(泉涌寺) 절 


작자미상 <시회도> 1764년 지본목판 26.8x18.8cm 도쿄국립박물관 


작자미상 <마상재도> 지본채색 52.0x81.4cm 일본 개인 

보통 통신사는 적게는 3백여 명에서 많게는 5백여 명에 이르는 일행이 약 반년에 걸쳐 서울, 부산, 쓰시마 섬, 잇키 섬, 후쿠오카, 오카야마, 히메지, 오사카, 교토를 거쳐 에도까지 다녀오는 일정을 치른다. 이들은 막부 지시로 새롭게 정비된 길을 따라 여행하는 데 연도에는 온갖 사람들이 나와 일행을 구경했다. 또 밤이 되면 묵고 있는 숙소에 지방 명사들이 찾아와 시회를 열고 그림을 청해 이들 일행은 가는 곳마다 문화선전대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통신사 경로와 무관한 지방의 다이묘들은 이런 행렬과 행사가 궁금해 화가들을 시켜 행렬을 그려오라고 하고 또 시문을 받아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막부에서도 소속의 어용화사에게 사신단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으며 또 조선 사신의 공연으로 유명한 마상재를 끊임없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이들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많고 인기가 높았는지 일부 소재는 정교한 채색 목판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전시에는 사신단이 오사카에서 교토까지 특별 제작된 배를 타고 이동하는 주행도, 교토에서 비와 호를 끼고 일본 내륙 지방으로 여행하는 장면, 그리고 교토의 유명한 사계 풍속도 속에 통신사 일행을 끼워 넣어 그림의 가치를 높인 병풍들이 소개됐다. 또 통신사 일행을 따라 붙어 말을 타고 가는 사람에까지 휘호를 청하는 장면을 그린 에도시대 풍속화도 나왔다.
통신사 일행 중에는 도화서 화원도 포함돼 이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그림들도 그렸는데 이때 처음 이들이 일본에 남기고 온 그림들이 국내에 소개됐다. 김광국과 한시각이 그린 선종 인물도와 이성린, 함제건, 김유성, 최북(그는 정식 수행화원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참가했다) 등이 그린 산수화는 이때 처음 알려졌다. 이렇게 해서 조선통신사 전시는 국내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의도한 대로 조공사라는 말을 쑥 들어가고 ‘통신사’라는 역사용어가 정식으로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전 정선 <동래부사접왜사도> (좌척) 지본채색 81.9x460.9cm 국립중앙박물관 


 김유성 <산수도> 1764년 지본담채 118.5x48.3cm 일본개인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 <조태억 초상> 1711년 지본채색 97.7x47.1cm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성공을 거둔 ‘조선시대 통신사’전은 과거 총독부건물로 옮긴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개관 기념전의 하나로 개최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전시 개막일인 8월21일 오후 당시의 전두환, 이순자 대통령 부부가 참석해 개막 테이프를 끊었는데 이들은 통신사 특별전도 관심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더 보고 싶어 했던 것이 안견의 <몽유도원도>였다.<몽유도원도>는 이날 개관기념전으로 나란히 열린 ‘조선초기 서화전’에 나온 하이라이트였다. 그런데 개막전이기는 해도 개막 직전까지 전시 성사가 불투명했던 이유로 당시에도 거의 홍보가 되지 않았던 불운한 전시이기도 하다.

박물관 수뇌진은 총독부건물로의 이전 기념전으로 통신사 전시를 일찌감치 결정했으나 어딘가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았다. 즉 테마는 더할 나위 적절하다고 하지만 개관기념전에 일본의 기획을 통째로 들여온다는 것에 생래적으로 거부감이 인 것이다. 그래서 조선통신사 전시가 조선 후기에 일본과 관련된 전시라면 제2의 특별전은 조선 전기를 대상으로 해 서화에 초점을 맞추돼 하이라이트로 일본에 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가져와 국내에 처음 소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연초부터 <몽유도원도>를 소장하고 있는 일본 텐리시의 텐리(天理)대학 도서관에 출품요청서를 보내고 또 일본 내의 박물관 인연을 총동원해 주변의 정지작업을 펼쳤다.

세종 시대의 대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는 중국에 가져다 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이곽파(李郭派, 이성은 이성과 곽희를 줄인 말로 이들은 산수화 기법이 정점에 도달한 북송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의 걸작으로 전쟁 이전에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다.(이 무렵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이 실려있다) 근래 연구에 따르면 <몽유도원도>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규수 일대의 수장가 집안에 전해지다 전후 혼란기에 미술시장에 나와 텐리 대학에 들어간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이런 요청에 대해 텐리대학 측은 7월이 들어서까지도 가타부타의 일체의 답변이 없었다. 박물관에서는 이전작업에 쫓기는 한편 최대의 하이라이트가 빠진 전시는 의미가 없다는 판단 아래 부득불 특별기획전은 ‘조선시대 통신사’ 전시 하나만으로 만족하자고 내부 의견을 정리했다. 그런데 7월 말 갑자기 텐리 대학에서 연락을 해오며 <몽유도원도>를 출품 대여해 줄테니 와서 인수해 가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는 이전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였다. 총독부 건물로 이전함으로서 경복궁 시절 때보다 전시실 면적이 크게 늘면서 상설 전시해야 할 작품은 3배 이상 늘어났다. 그래서 온 학예관이 달라붙어도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인수 출장을 포기하는 대신 도쿄의 한국대사관에 SOS를 쳐서 대사관 문정관이 텐리시로 내려가 그곳의 고문서 담당실장과 함께 김포공항으로 <몽유도원도>를 운송해왔다.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견본담채 37.8x106.5cm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안견 <추림촌거> 견본담채 31.5x22.0cm 간송미술관

그래서 겨우 8월21일 개막식과 22일의 일반 공개날짜에 맞출 수 있었다. 전시에는 당초 짜놓은 계획대로 간송미술관의 또 다른 안견 작품인 <추림촌거>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안견 그림으로 전하는 소품 산수화들 그 외에 이경윤 그림으로 전하는 것들과 성균관 대학교에 소장된 초기 서예작품을 수록한 서첩 『근묵(槿墨)』 등으로 전시를 무사히 꾸몄다.
하지만 이 전시는 통신사 전시보다 주목을 받지 못했고 또 이전작업으로 어수선한 나머지 박물관으로서는 부끄럽게도 전시 도록을 제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통신사 전시를 보러온 관람객 가운데 눈 밝은 일부 애호가들은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고국 나들이를 한 조선 전기의 大명작 <몽유도원도>를 실견하는 안복을 누렸다.

이렇게 이전개관한 총독부건물의 국립중앙박물관은 개관 1년 만에 2백만 명이 다녀가는 핫스팟이 됐다. 이는 1986년 여름 이후에 고미술 애호가가 급증한 때문이 아니라 다분히 조선과 조선 민중을 36년 동안 통치한 총독부 건물의 내부를 한번 보고자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세종로 한복판의 총독부건물로 이전하고 나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직원들은 어깨에 한층 힘이 들어갔다. 그것은 역대 어느 박물관 시절보다 시민들에게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또 심리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박물관이 된 때문이기도 했다. (y)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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