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東垣)선생 수집문화재 특별전
1981.5.26.-7.26일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남도 진주시에는 평소에 남의 정기(精氣)라도 받아서 한번 성공해보겠다는 사람의 발걸음이 줄을 잇는 마을이 있다. 시 중심에서 15km 이상 떨어진 승산마을이다. 이곳에는 한 집 건너서 한국의 ‘내노라’하는 재벌들의 고향 집이 처마를 맞대고 있다. 하나 있는 지수초등학교는 일제 때 지어져 역사가 오래됐을 뿐 아니라 삼성의 이병철, LG의 구인회, 효성의 조홍제 회장이 어린 시절 나란히 이 학교를 다닌 곳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경제계에 진주가 있다면 고미술계에는 그에 필적할만한 곳으로 개성을 꼽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개성은 땅밑에 재벌을 일구어내는 어떤 상서로운 맥이 흐른다고 하기보다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미에 대한 안목과 애착이 탁월하고 또 그 고상한 취지를 서로에게 전해주고 전해 받으면서 형성된 강한 인문적 풍토로 인해 한국 고미술의 성지가 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맨 처음에 인연의 뿌리를 내린 사람은 한국인 최초로 고미술을 연구한 우현 고유섭(又玄 高裕燮 1905-1944)이다. 인천 태생의 그는 서울에서 중, 고등학교를 마치고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미학미술사를 전공했는데 이것이 한국인 최초였다. 그리고 졸업 후에 그는 학교 측에 뽑혀 경성제국대학 미학연구실 조교로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고미술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것 역시 한국인 최초의 필드조사였다. 그후 그는 29살이란 약관의 나이로 1933년 봄 개성상인들이 자비로 건립한 개성박물관의 관장에 부임했다. 개성박물관은 프라이드가 센 개성사람들이 경성에 새로 박물관이 들어서는 보고 고려의 본향(本鄕) 개성에 ‘박물관 하나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발분(發憤), 합심해 세운 박물관이다.
정선, 수성구지(壽城舊址), 지본담채 21.1x27.9cm
이인상, 누각산수(이인상 서화첩), 견본담채 27.0x19.1cm
전기, 매화서옥, 지본담채 29.4x33.2cm
그는 신생 박물관을 이끌며 이곳을 청자의 중심지로 키우면서 한편으로 이화여전과 보성학교 등의 강의를 나갔다. 그리고 한국 돌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탑에 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일은 이때 주변에 있던 똑똑하고 전도유망한 젊은이들에게 각고면려(刻苦勉勵) 연구에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이심전심의 감화를 남긴 것이다. 실로 그로 인해 해방 이후가 되어 개성 출신 진홍섭, 황수영, 최순우 세 사람의 박물관장을 배출했다.(황수영, 최순우 두 사람은 3대와 4대의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했고 나중에 이화여대로 간 진홍섭은 개성과 경주의 분관장을 역임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활동 시기와 엇비슷하게 사회활동을 했던 개성상인들로 하여금 세 사람이나 개인미술관을 설립하도록 했다. 1967년 한국 최초로 개인미술관을 설립한 동원 이홍근(東垣 李洪根) 회장도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흔히 간송미술관은 해방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곳이 정식 미술관으로 등록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1982년에 서울 신림동에 호림박물관을 개관한 윤장섭 성보실업 회장과 1989년에 서울 수송동에 송암미술관을 연 OCI의 이회림 회장이다. 이들 이외에 1979년 서울 용산에 태평양 박물관을 세운 아모레 화장품의 서성환 회장을 꼽는 경우도 있다. 그는 황해도 평산 출생이지만 개성에서 사업의 기초를 닦으며 성공해 범 개성상인 그룹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해방 이후에 개성상인 출신으로 개인미술관을 설립한 사람들이 여럿 생겨났는데 그중에 이홍근 회장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을 미술관을 아예 통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는 전무후무한 일을 남겼다. 그래서 열린 전시가 1981년 5월 말부터 두 달 동안 열린 ‘동원선생 수집문화재 특별전’이다. 전시가 열리기까지의 경위를 좀 더 자세히 소개하면 그는 생전에 개성 출신의 황수영 관장 등을 만나면서 ‘모은 물건은 절대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때가 70년대 초반이었는데 1980년 가을 그가 타계하자 평소 그의 말대로 유족들은 그가 수집한 문화재를 전부 박물관에 기증됐다. 그런데 유족들은 ‘한 점 남기지 않고 사회에 주겠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실천해 특별전 이후에도 유증을 계속해 마침내 1만여 점에 이르는 문화재를 기증하게 됐다.
박물관은 앞서 소개한 것처럼 1974년 의학박사 수정 박병래 선생에게 도자기 362점을 기증받은 것을 시작으로 수십 명의 필란트로퍼로부터 많은 기증을 받았다. 그렇지만 단일 건수로 1만 점을 넘게 기증받은 일은 동원 선생의 경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평생 수집해 박물관에 넘겨준 유물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어 서화, 도자기에서 시작해 토기, 와전, 불교공예품, 고고자료 그리고 외국 도자기에까지 걸쳐 있었다.
생전에 이렇게 많은 고미술품을 모으고 또 미술관도 세웠지만 수집 일화는 전하는 것이 별로 없다.(그는 1967년 사직동에 동원미술관을 설립했다. 당시 이 미술관은 비공개미술관이었다) 이는 다분히 개성사람들의 평소 생활 태도나 신조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내실이 중요하게 여기며 겉모습 따위에는 그다지 연연하지 않았다. 또 말을 아끼고 지키는 것도 내림이었다. 그래서 떡국에 칼집을 넣어 조랭이떡국을 끓여 먹으면서 입 밖으로 ‘이씨’라든가 ‘원수’라는 는 말은 일절 올리지 않는 묵묵함을 고집했다. 근검절약은 이와 같은 신조가 밖으로 나온 생활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역시 그랬다. 자신에게는 아끼면서 미술품 구입이나 박물관 일에는 비용과 경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는 해도 그와 접했던 박물관 직원들조차 그의 입을 통해서 수집 일화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
작자미상, 서산대사 초상, 견본채색, 78.5x127.2cm
김홍도, 선인취적, 지본담채, 56.1x31.8cm
그는 개성간이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함북 성진에 있는 동양물산주식회사 취직해 처음으로 장사 일을 배웠다. 그 뒤 개성으로 다시 돌아와 개풍 양조를 일으키는 등 자기 사업을 일궈 벌써 30대에 큰돈을 손에 넣었다. 이때 주변에 일본인들이 고미술을 즐기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본격적으로 수집다운 수집을 시작한 것은 6.25 전쟁 이후의 일이다. 이때 그는 50대에 들어선 이후인데 전쟁을 겪은 사회는 어디나 그렇듯이 기존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계층적 위계도 뒤집혀 뒤죽박죽인 사회 모습을 보이는 게 보통이다. 그런 이유로 전쟁 이전의 옛 수장가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며 노천시장은 물론 고물상에까지 물건이 흘러넘쳤다. 그는 옛 일본인들의 고미술 애호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들이 마구 내버려질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에 아침저녁으로 당주동이고 청계천이고 노천시장과 고물상을 순례하면서 물건을 모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의욕만 앞섰을 뿐 무슨 안목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주변에 또 좋은 어드바이저도 없었다. 그 역시 나중에 깨달았지만 미술시장은 벌써 일제 후반기가 되면 가짜가 무서울 정도로 나돌고 있어 전후에 나온 물건에도 옥석(玉石)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생전에 그를 만났던 당시의 동아일보 정용석 논설위원은 ‘가짜와 진짜를 식별할 능력이 있을 리 없어 좋아 보이는 것이면 사들이다 보니 쓸만한 물건은 열에 하나 찾기도 어려웠다’는 그의 몇 안 되는 육성을 특별전 무렵의 박물관 신문에 남겼다. 거기에는 먹고 싶은 것을 안 먹고 쓰고 싶은 것을 안 쓰고 모은 돈으로 산 물건들이 가짜로 판명된 일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 밑천 생각에 화가 치밀어 참을 수 없어 도자기를 내동댕이쳐서 깨부쉈다고도 했다. 그런 학습의 과정을 거치면서 책도 사보고 주변의 조언도 얻어가면서 자가일성(自家一成)의 경지에 이르게 됐다. 그는 가짜 도자기는 족족 깨부셨지만 서화는 ‘그래도’ 하는 일말의 여지 때문에 따로 포장해 두었는데 이들 역시 나중에 그가 타계한 뒤에 모두 박물관에 일괄 유증됐다.
이렇게 열린 전시는 그가 비록 없었지만 성대하게 열려 개막식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 내외도 참석했다.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순자 여사는 한국 고미술에 관심이 있어 수행비서 한 사람만 데리고 혼자 와서 박물관 학예원의 설명을 일부러 청해 들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들 부부가 개막식에 참석한 것은 전해 12월 말에 동원 선생 유족들이 문화재 헌납서를 청와대에 제정(提呈)한 때문이다. 당초 유족들은 그가 남긴 말 가운데 사회 환원을 박물관 기증으로 받아들여 박물관의 상급 기관인 문화공보부에 헌납 의사를 밝혔다. 당시 민주화운동 탄압이후 새로 등장한 정권으로 인해 사회 전체가 팽팽한 긴장의 분위기 속에 놓인 가운데 수집품 전체의 기증이란 더할 나위 없는 미담(美談)은 곧 청와대에 직보되면서 헌납서를 직접 청와대에서 받게 된 건이다. 이때 전 대통령은 작고한 동원 선생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고 유언을 받든 큰 아들 상룡 씨에게는 석류장을 수여했다.
강세황 <영통동구(靈通洞口)> ≪송도기행첩≫ 제7면, 종이에 수묵담채, 39.2x29.5cm, 동원 2191
정수영 <금강전도> ≪해산첩海山帖≫ 제3면, 1799년, 종이에 수묵담채, 37.2x61.9cm, 동원 2192
당시에 제출된 헌납서에는 도자기 1467점, 서화 1309점, 불상 및 공예품 123점 등 2899점이 수록돼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 2월부터 4월까지 두달 동안 실사를 통해 기증 유물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리스트에 누락된 물건들이 추가되면서 실제 기증된 것은 4941점에 이르게 됐다.
그리고 특별전은 이 가운데 대표작 500여점이 추려 소개됐다. 이들 중에는 일본과 유럽, 미국 등지에서 열린 ‘한국미술 2천년전’ ‘한국미술5천년전’에 단골로 출품된 낯익은 작품들도 다수 들어 있었다. 서화와 도자기만 예를 들어보면 강세황이 1753년 무렵 개성을 여행하고 그린 《송도기행첩》이나 19세기 중엽의 중인화가 전기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구한말 안중식의 <도원행주도(桃原行舟圖)> 등은 단골 출품작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도자기에서도 <청자 죽순형 주전자>나 조선 전기에 상감으로 연당초 문양을 넣은 <백자 상감연당초문 대접>은 그 대표격이다.
청자 죽순형 주전자, 12세기 높이, 22.1cm
백자 상감연당초문 발, 15세기, 지름 17.5cm, 국보 175호
백자 청화투각운용문 필통 19세기 높이 13.5cm
그 외에도 특별전에는 정선, 김홍도, 이인상, 정수영, 이방운 등 18, 19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이 골고루 소개됐다. 또 당시만 해도 아무도 주목을 하지 않았던 궁중행사도인 16세기 <기영회도>도 포함됐다. 도자기 쪽에는 소품의 문방구 가운데 이채를 띠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는 특별히 이들을 아꼈다. 한때 성북동 동원미술관에 도둑이 들어 이들을 도난당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일일이 도난 자료를 만들어 직접 경찰서를 찾아가 형사들과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며 수사를 지켜봐 결국 인사동에서 장물로 거래하려던 물건들 전부를 되찾기도 했다.
동원 선생의 유족은 물건의 기증 이외에도 박물관의 연구기금도 상속된 주식도 상당수 쾌척했다. 이는 즉 물건을 기증한 만큼 박물관 학예관들이 기증된 문화재를 가지고 마음 놓고 학술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정부 예산을 집행하는 공공기관은 일반 기증을 받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사단법인 한국고고미술연구소를 설립해 이곳에서 후원금을 받아 박물관의 연구활동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때 만들어진 동원학술기금은 1981년 가을부터 연구비를 지원했는데 첫해 대상자로 당시 경주박물관 학예실장인 강우방씨와 그 무렵 독일 유학 중이었던 학예관 권영필가 이를 받았다. 그리고 기금을 통해 매년 박물관 주최의 연구발표회도 개최했는데 이는 1997년부터 동원학술전국대회로 바뀌어 지금도 열리고 있다. 또 박물관 기요(紀要) 성격의 「미술자료」와 달리 보다 대상을 넓혀 자유로운 테마를 다룰 수 있는 학술지 「고고미술」을 발간해 이를 후원했다.
동원선생 유증유물은 1981년 특별전 이후 박물관에서 마련한 130평 규모의 특별전시실에 상설 전시됐다. 이 상설 전시실은 용산으로 이전한 이후에도 계속돼 현재 박물관 2층 기증실에 동원 기증유물 코너가 별도로 큼직하게 마련돼있다.
기증품은 여러 차례 유족 후원금에 의해 도록이 제작됐는데 이 지원은 1981년 열린 특별전 도록 제작때부터 시작돼 2003년에 서화편, 도자편 두 권으로 편집된 『동원이홍근 수집명품선』 도록과 2014년에 4권으로 거의 전 기증품을 수록한 도록을 편집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유족들 역시 이와 같은 후원금 이외에도 당초 기증때 빠진 물건들을 지속적으로 박물관에 기증해 1981년 이후 202년까지 4차례에 걸쳐 서화 1,728점, 도자기 2,620점, 금석 석조 고고자료 의 867점이 더해져 총5,205점이 추가로 기증했다. 그래서 동원 선생이 수립한 유물은 집안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고 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이는 모두 10,146점에 이르게 됐다.
이로서 1만 점 유물의 기증이란 전무후무한 일이 성사됐다. 이에 대해 박물관의 한 관계자는 동원 선생은 평소에 ‘한 점 남기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말의 본뜻이 실은 ‘미술관을 통째로 박물관에 주어서 그곳에서 운영하게끔 하겠다’는데 있었는지도 모른다고도 풀이했다. 그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결과적으로 1만여점의 유증을 한국 최초의 사설미술관이 통째로 박물관으로 옮겨진 뒤 현재도 상설 전시와 학술연구 그리고 일반강연 등을 통해 모범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