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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미술을 이끈 전시] 13. 인사동에 옛 그림 전시라는 새 시대 개막
  • 2016      

조선시대 逸名회화(Ⅰ,Ⅱ): 무낙관 회화 특별전
1981년2월20일-2월26일(Ⅰ), 1982년2월23일-3월4일(Ⅱ) 서울 동산방화랑




고미술 시장에서 흔히 듣는 말로 물각유주(物各有主)라는 말이 있다. 물건마다 제각기 주인이 있기 마련이란 말인데 주인도 주인 나름이어서 혹시 좋은 주인을 만나게 되면 다 같은 물건이라도 처지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달라진다.   

예로 도자기 병을 하나 들어보자. 어느 집에 대대로 내려오던 오래된 병 하나가 있다고 치고 이것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인사동에 굴러 들어가 한 가게 진열장에 놓이게 됐다고 하자. 진열장에는 도자기가 몇 개 더 있었는데 어느 날 수집가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마음에 들어 적당한 값을 주고 사 가지고 갔다. 그후 그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병을 자랑하곤 했는데 마침 그 중에 박물관 사람이 하나 있어서 ‘이런 병은 박물관에도 드문 것이니 박물관에 있으면 딱 좋겠다’라고 속삭이자 주인은 쾌히 선심을 써서 이 병을 곧장 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렇게 되면 이 병은 인사동이나 애호가 집에 있을 때와는 달리 박물관에 들어간 뒤부터는 크게 처지가 바뀐다. 즉 사사로운 물건이 아니라 박물관의 어엿한 수장품의 하나가 돼 전시가 열릴 때마다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의 찬탄을 한 몸에 받고 또 근사한 도록에도 실려 대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영광도 누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물건에 따라서는 본래 가치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환경에 따라 부가가치라고 할 만한 그 무엇이 나중에 따라붙기도 한다(이렇게 없던 부가가치를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 예술이고 문화의 역할이다). 어쨌든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인사동 상인 가게에 있는 물건은 다는 아니겠지만 개중에는 억울한 손해를 보는 것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다른 식으로 말하면 저평가된 가치주라고 할 수도 있는데 경우의 수로 보면 저평가된 가치주로 보기보다는 억울한 손해를 보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사회에 남아있는 유교적 명분이나 체면과 관련이 깊다. 유교에서는 항상 자기 절제를 요구하면서 ‘황금을 보기를 돌처럼 하라’‘이익을 도모하는 장사는 유자(儒子)가 할 일이 아니다’와 같은 말로 끊임없이 자기를 단속시켰다. 그래서 그런 미술사학계의 학자들 역시 골동 시장인 인사동을 우회하거나 가더라도 가급적이면 남의 눈에 띠지 않는 시간에 슬쩍 다녀가는 등 조심을 했다.

지금보다 그런 명분이 훨씬 심했던 81년 새봄 무렵 저평가된 가치주만 추린 것 같은 조선시대 옛 그림 전시가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열렸다. 조계사 맞은편에 있는 동산방 화랑에서 2월20일부터 26일까지 딱 일주일간 열린 ‘조선시대 일명(逸名)회화’전이 그것이다. ‘일’자는 ‘달아날 일’자로 일명이란 ‘이름이 잊혀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제를 ‘무낙관 회화 특별전’이라고 했다. 낙관이 없다고 했지만 일부는 낙관이 있음에도 나중에 찍은 것이 분명하거나 혹은 흐릿해서 도저히 판독할 수 없어 일명으로 분류된 것도 있다.

전시를 소개하기에 앞서 당시의 인사동 사정을 좀 설명하면 그 무렵 인사동 미술시장의 주류는 현대미술과 무관한 고미술이었다. 그중에서도 메인은 도자기였고 그다음이 민속품이었다. 그리고 가격은 비쌌지만 물건이 워낙 적었던 불상과 청동 유물이 그 다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화는 이들에 비하면 한참 아래였는데 보이는 것도 민화류가 대부분이었다. 이는 서화 가치가 덜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지난 회에서 조금 언급한 것처럼 당시는 새마을운동 열풍이 전국을 휩쓸면서 지방 도처에서 오래된 물건들이 일제히 고물(古物) 취급을 당하면서 2급, 3급 시장, 즉 고물상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서 추려진 쓸만한 것들이 인사동 시장으로 몰리면서 인사동 시장은 도자기, 민예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으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미술 시장하면 서화였다. 조선시대 미술시장은 빈약하긴 했어도 후기, 말기에 이르면 표구 집, 책쾌라는 불리는 책 거간들이 그림을 알선, 판매했다. 반면 당시에 도자기 시장은 아예 없었다. 백자는 당시 그냥 쓰는 물건이었고 청자는 무덤에서 나온 물건이라서 조상숭배 정신으로 무장된 유교 사회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수집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일제가 되면서 시장 주류가 바뀌었다. 일본사람들이 좋아 죽는 도자기가 메인으로 올라서고 서화의 지위가 내려간 것이다. 거기에는 양적인 문제도 작용했다. 일본의 한 조선도자기 애호가인 시인 한 사람은 어떤 근거에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조선의 도자기를 4억 개로 말한 적이 있다. 서화는 그에 비하면 몇 천, 몇 만 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돼 인사동 고미술시장은 도자기가 주를 이루게 됐고 이는 80년 초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일개 화랑이 옛 그림을 가지고 전시회를 연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었다. 조선시대 그림 하면 누구나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등을 떠올리지만 당시에도 이런 유명 화가들의 그림은 쉽게 볼 수 없는 물건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일명회화’전은 비록 단원이나 겸재의 낙관이 없지만 보기에 따라서 단원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도 또 겸재 그림처럼도 보이는 그림도 다수 소개됐고 또 당시만 해도 인기 높았던 현재 심사정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그림도 대거 나왔다. 첫 번째 전시의 출품작은 113점으로 산수, 인물, 풍속, 화조, 어해 그리고 초상까지 망라됐다.

애초에 전시는 동산방 박주환 사장이 최순우 박물관장에게 작은 그림들에 대해서 상담을 청한 데서 시작됐다(물론 전부가 작은 그림은 아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작자 미상의 그림들을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박주환 사장은 당진에서 올라와 표구 일로 자수성가한 화랑 주인으로 그는 많은 그림을 접하는 과정에서 비록 학자적인 이치나 설명을 달 수는 없어도 나름대로 그림을 보는 안목을 어느 정도 쌓고 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낙관이 없다’고 혹은 ‘낙관이 있지만 잘 보이지 않을 뿐더러 시시한 그림’ 치부를 하면서 소홀히 여겨지는 그림들을 차곡차곡 챙겼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양이 되자 ‘이런 것들이 있는데’하면서 최순우 관장에게 조언을 구한 것이었다.

최 관장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해외 전시나 새로운 자료 발굴 등을 염두에 두고 개인 소장자들의 애장품을 소리 없이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박 사장이 모아놓은 그림을 보자 무릎을 치고 감탄하면서 ‘당장 진가를 가리기는 힘들지만 일반에 공개해 연구자들에게는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또 나아가 그림 애호가들에게 새로운 그림을 감상할 기회를 주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직접 그림을 추리며 전시 제목을 짓고 또 서문까지 써주었는데 그 무렵은 박물관 직원이 화랑에 갈 때 에둘러 돌아갈 때여서 이를 무기명으로 했다. 이렇게 해서 도록에는 누가 쓴 글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인사말이 실렸는데 그 내용에는 그가 동산방에게 적극 전시를 권했던 사정을 분명히 적혀있다.

“우리 고미술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화(書畫)의 보존상태가 그 질과 양으로 보아서 가장 유감(遺憾)이 많은 분야라는 것은 아마 누구도 이론(異論)이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이 말은 지금 남아있는 조선 시대의 일명(逸名) 회화의 비중이 그만치 소중하다는 뜻이 될뿐더러 그러한 뜻으로 이들 조선 시대의 일명 회화들에 대한 회화사적 고찰이 소홀해서도 안 되겠고, 좋은 안목(眼目)의 소유자들이 그 속에서 새 자료를 발굴하고 올바른 감식(鑑識)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열린 전시는 우선 인사동 상인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됐다. 자신들이 아무렇게 다뤘던 그림들이 말쑥한 단장(표구)을 한 채 화사한 조명 아래 전시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는 데 놀랐다. 그리고 그림 하면 박물관과 몇몇 개인 소장가의 컬렉션 정도가 전부라고 생각하던 연구자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번듯한 그림이 일명 회화로 남게 된 것은 상인들 잘못만은 아니었다. 상당수는 소장가 책임도 있다. 조선의 옛 그림은 대폭의 족자나 두루마리도 있지만 상당수는 화첩이나 병풍으로 제작된 것이 많았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와 전쟁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든 복구 시기를 거치면서 많은 화첩이 파첩(破帖)됐다. 즉 낱장으로 분해된 것인데 거기에는 애호가와 상인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점도 있다. 화첩을 통째로 사거나 팔기가 힘들자 서로의 양해 아래 낱장으로 나누어 제일 잘 된 것이나 낙관 있는 부분만을 우선 팔고 나머지를 소홀히 간수하면서 일명으로 불리는 그림들이 생겨나게 됐다. 이는 화첩 뿐만 아니라 8폭, 10폭으로 된 병풍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이 전시는 박물관 이외에서 열린 전시로서는 대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동산방에서는 첫 번째 전시 때 다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다시 추려 해를 넘겨 1982년 같은 시기에 제2탄이 열렸다. ‘續 조선시대 일명회화’에도 1회 때와 거의 같은 구성으로 이번에는 139점이 출품됐다. 그런데 두 번의 전시가 끝남과 동시에 학계를 통해 그리고 애호가들의 증언을 통해 최순우 관장의 기대했던 그대로 그림의 신원이 속속 확인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성내청풍(城內淸風) 지본 28x32cm 


귤헌납양(橘軒納凉) 지본 35.5x30cm 


승록현인(乘鹿賢人) 지본 33x41.4cm 


기마감흥(騎馬酣興) 지본 87.5x50cm


우선 천원(泉源)이란 신원미상의 문인이 시가 적혀 있는 <귤헌납량> 등 4점은 19세기 초에 중인 시인이자 그림을 잘 그렸던 석당 이유신(石堂 李維信, 생몰년 미상)의 그림으로 확인됐다. 1회 때의 <소림(疏林)>과 2회 때의 산수화 두 점은 한 화첩에서 나온 것으로 특히 2회에 소개된 그림에 흐릿한 도장이 판독되면서 18세기 후반의 문인화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의 그림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탄촌>이란 제목에 ‘중국 『당시화보』에 그려진 채충환 그림이 이런 내용이 있어 장난삼아 따라 그려본다(蔡冲寰譜有此本遂戱學之)’라는 화제가 적혀있는 그림은 19세기 초의 문인화가 윤제홍(尹濟弘 1764-1845이후)의 그림인 것이 확인됐다. 그리고 애호가로부터의 정보도 답지했는데 산수화, 고사인물도, 화조영모화가 한꺼번에 그려진 8폭 병풍에 대해서 한 애호가는 ‘오래된 일이지만 유당 최남선 선생 집에서 본 오원 그림이 분명하다’는 증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전시에 나온 <난정수계도>는 나중에 궁중 기록화를 연구한 박정혜 씨를 통해 경종 원년인 1721년의 1웕에 국왕의 친히 임석해 열린 문무 관리의 임용고과 행사를 그린 <경종신축 친정계병(景宗辛丑 親政稧屛)>임이 확인되기도 했다.


해상선인(海上仙人) 지본 43.5x98.5cm 


사인암(舍人巖) 지본 31.5x45.8cm 


소림(疏林) 지본 33.5x23.5cm 


유희(遊戲) 견본 17.3x20cm 


탄촌(灘村) 지본 28.5x42cm


일명회화전에 나온 그림들은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화가나 그림 성격이 판명되는 일이 잦아지며 오래도록 화제가 됐을 뿐아니라 고미술시장 인사동에 새로운 바람까지 일게 했다. 고미술을 다루는 화랑들이 전시라는 이벤트에 눈을 뜬 것이다. 실제로 동산방 전시 이후 인사동 공화랑은 부산의 진화랑과 공동으로 ‘조선시대 회화명품전’을 1983년부터 한두 해 걸러 잇달아 열었고 거기에 대림화랑과 학고재와 같은 새 화랑들도 옛 그림 전시에 합류해 인사동은 도자기 이외에도 볼거리가 있는 새로운 거리가 만들어지게 됐다.


삼선암, 보덕굴(三仙庵, 普德窟 산수8폭중) 지본담채 108x48cm(2회 전시)


관록(觀鹿),세마(洗馬  산수영모8폭중) 견본담채 각 129.5x32cm (2회 전시)


수금(水禽) 지본수묵 31.8x25cm (2회 전시)


물론 동산방 화랑 자체도 일명회화 전시에 그친 것이 아니라 속속 새로운 전시를 선보여 1983년의 조선시대 후기회화전 1986년의 관아재문집 출간기념 회화전, 1988년 올림픽기념 민화문자전을 개최했다. 박주환 사장은 그후 화랑협회 회장을 마치고 일선을 물러나고 2세에 경영을 맡겼는데 고미술 전시는 2세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동산방 화랑이 이와 같은 저력을 지속적으로 볼 수 있던 것은 ‘그림은 3장을 사면 한 장은 팔아서 원금을 갚고 다른 한 장은 생활비로 쓰며 남은 한 장은 미래를 위해 남겨두어야 한다’는 박 사장의 신조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모은 그림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을 때 모아 놓은 중국 그림들도 있다. 그가 모은 중국 그림의 실력을 보여주는 자료가 1983년 도쿄대학출판부에서 펴낸 『중국회화종합도록』 전5권의 존재다. 이 책은 도쿄대학 중국미술사 전공교수이자 부설 동양문화연구소 소장인 스즈키 케이(鈴木敬) 교수가 연구소 팀을 이끌고 만든 책으로 여기에는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 타이완, 홍콩 그리고 미국, 유럽의 박물관, 미술관, 개인 소장가의 중국 그림을 총망라한 책이다.

이 책의 발상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중국과 일본을 통 털어 가장 탁월한 중국미술사 전문가의 한 사람이었던 요네자와 요시호(米澤喜圃) 도쿄대 교수가 중화민국의 초대로 고궁박물원을 조사한 적이 있다. 이때는 아직 타이페이에 고궁박물원이 지어지기 이전으로 유물들은 타이중의 창고 겸 동굴에 보관돼 있을 때였다. 그는 여기서 장개석 정부가 가져온 고궁박물원의 서화 약 5천 점을 두 달에 걸쳐 조사했다. 이때 그는 제자인 스즈키 교수를 데리고 간 것이다. 이 일이 있고난 2년 뒤에 이번에는 일본과의 수교도 없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그를 지목해 초빙하면서 중국내 서화를 열람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때도 그는 스즈키 교수 등을 데리고 가 두 달 동안 베이징 고궁박물관을 시작으로 상해박물관, 남경박물관, 서안박물관 등지의 중국 회화를 빠짐없이 조사했다.

이렇게 두 사람은 타이페이와 베이징 두 군데의 고궁박물원의 중국 회화를 모두 본 이색 경력의 연구자가 됐는데 스즈키 교수는 요네자와 교수가 정년 퇴임하고 자신이 동양문화연구소를 맡게 되었을 때 중국 이외에 미국, 유럽, 아시아에 있는 중국회화 자료를 모두 자료화해 연구자에게 제공하자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했다. 그래서 동양문화연구소에는 전세계 20만여점에 이르는 중국회사 사진을 모두 확보하게 됐는데 이 결과가 보로 『중국회화종합도록』이다.(이 책은 첫 5권이 나온 뒤 속집 4권이 더 편찬됐고 현재도 속속집이 준비중인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첫 번째 전집에 국립중앙박물관과 나란히 한국에 있는 중국 회화로서 박주환 컬렉션 20여점이 수록된 것이다.

이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동산방 화랑은 이런 저력이 있는 곳이었고 그 에너지를 때마침 최순우 관장이 현명하게 조력해 인사동에 새바람으로 살려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회화사 연구자들은 ‘80년대, 90년대의 인사동은 볼거리가 많았다’라고 회고하기도 한다. 물론 그 덕분에 일반의 고미술 애호가들도 안복(安福)을 톡톡히 누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y)  
         



이원복, 윤철규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8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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