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세린
조선시대 무덤에는 사람들이 썼던 다양한 공예품이 매장되었다. 왕실 역시 마찬가지인데 다채로운 용도와 형태를 지닌 공예품이 출토되었다. 이 중 하나가 화장품을 담은 화장용기이다. 현재 왕실 무덤 중 숙신공주(1635-1637), 영조의 딸 화유옹주(1740-1777), 사도세자의 아들 의소세손(1750-1752), 사도세자의 딸 청연공주(1754-1821), 정조의 후궁 원빈홍씨(1766-1779),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1782-1786)의 묘에서 화장용기가 발굴되었다. 이 중 숙신공주와 원빈홍씨 묘에서 출토된 화장용기는 기물에 문양의 형태로 음각을 하고 음각된 부분을 납으로 채워넣는 납입사(鑞入絲)로 장식되어 있다.
납입사는 주로 은제공예품에서 확인되는데 현재 전해지는 유물의 수는 극히 적다. 수량이 많지 않은 까닭에 금속공예 입사의 세부기법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명칭도 일제강점기 장식재료를 녹여 발랐다는 뜻으로 사용된 소상감(銷象嵌), 납을 입사했다는 뜻의 연입사(鉛入絲)로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시대 문헌기록에는 납입사라는 명칭이 확인되고 있어, 이에 대한 정정이 필요하다.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위계가 높은 은제공예품과 의례용품 위주로 왕실에서 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현재 숙신공주묘 출토 <은제화장호>를 제외하고는 문양이 납으로 온전하게 시문된 상태로 전해지는 유물이 거의 없다. 또 18세기 이후 중국에서 들어온 장식기법인 법랑이 문양 부분에 장식재료를 발라서 기물에 흡착시킨다는 점에서 장식원리가 거의 동일해 조선의 전통 장식기법인 납입사와 법랑이 혼용된 사례도 적지 않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해지면서 표면이 손상된 예도 많아 납입사 유물과 법랑, 납입사가 혼용된 유물을 분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도1. 숙신공주묘 출토 <은제화장호> (1630년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숙신공주묘에서 출토된 <은제화장호>는 은으로 제작된 화장용기 표면에 고사인물문이 납입사로 장식된 유물이다. 처음에 이 유물은 크기가 아주 작기 때문에 어린 공주의 무덤에 부장하기 위해 소형으로 제작된 유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화장호와 화장호 속 화장품의 분석을 통해 실제 사용된 분이 담겨있음이 확인되어, 이 화장호 역시 실제 사용된 것임이 확인되었다(이송란, 「조선후기 은제화장용기와 화장문화」, 『미술사학』29,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5). 그리고 이 용기의 실제 주인은 숙신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1618-1674)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숙신공주의 사연을 생각해보면 인선왕후가 일찍 죽은 딸을 위해 부장품이자 모정을 담은 정표의 하나로 무덤에 넣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도2. <은제화장호> 뚜껑과 표면장식세부
숙신공주(1635-1637)는 효종(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딸로 현종의 누나이기도 하다. 1636년(인조 14년) 일어난 병자호란이 조선의 패배로 끝나면서, 소현세자 부부와 당시 봉림대군이었던 효종, 인선왕후는 청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3살이었던 숙신공주도 함께 가게 되었는데, 청으로 가던 중 병으로 사망했다. 전쟁 후 볼모로 함께 가던 중 죽은 공주에 대한 인선왕후의 마음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과 인선왕후의 마음을 생각해보면, 화장호의 매납은 충분히 설명된다.
도3. <은제화장호> 표면장식의 고사인물문 세부
화장호를 좀 더 살펴보면 화장호의 외면에는 산수인물도를 시문했는데 전체적으로 문양을 음각한 후 납으로 입사했다. 문양의 전반적인 조형과 표현은 회화적인 모습이 두드러진다. 납입사는 장식재료를 실 형태로 제작해 문양 부분에 넣는 다른 입사의 세부기법에 비해 액체형태로 된 장식재를 넣기 때문에 문양의 표현은 훨씬 수월하다. 따라서 기법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이러한 회화풍 문양의 유려한 표현이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도4. <은제화장호> 뚜껑과 뚜껑 내부의 숟가락
또, 화장호의 뚜껑 내부에는 소형의 숟가락이 달려있어 화장품을 뜨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숙신공주묘 출토 <은제화장호>는 현재 잘 알려져 있는 금과 은을 사용한 입사공예품 외에 조선시대 입사공예가 지닌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