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전 고려불화-우리나라에 전해진 이웃 나라의 금색 부처님
일본 나라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 1978년10월19일-11월19일
특별전 <고려불화-우리나라에 전해진 이웃 나라의 금색 부처님> 도록 표지
이들 모두가 진정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열성 팬’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해 6월은 시기가 딱 좋았다. 이 해는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카셀 도큐멘타와 10년에 한 번씩만 열리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가 나란히 한날 한시에 개막을 했고 또 격년제의 베니스 비엔날레도 비슷한 시기에 오픈했으며 그에 더해 국제현대미술에 관한 한 하이앤드 시장의 대명사로 불리는 바젤 아트페어가 며칠 상간으로 잇달아 오픈해 문화적 교양에 흠뻑 젖고자 하는 준비된 팬들로서는 당연히 시간과 비용을 내 볼 만한 기회였다.
국내적으로 봐도 당시는 현대미술 시장이 날로 커진 지가 이미 오래이고 미술감상도 확실한 교양 아이템의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거기다 경제신문 같은 데에서는 현명한 사람이라면 대체투자 대상으로 그림 만한 것이 없다고 알게 모르게 소개하고 있는 터라 최첨단의 현장을 목격, 체험하는 일이 하등 이상할 것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문화에 냉담한 한국의 사회 분위기상 일각에서는 여전히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 야단스러운 딜레탕티즘의 하나로 치부하는 시각이 없지 않았는데 과거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인식은 한층 심했다.
2017년에서 거꾸로 44년을 거슬러 올라가 1973년 봄. 당시 한국은 그럭저럭 평온한 사회(小康社會)는 결코 아니었다. 그 한해 전 겨울에 국민투표를 통해 제3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유신헌법 아래의 제4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 유신헌법에 대해서는 각계각층에서 반대 의견이 표출되면서 연초부터 정중동의 불안 같은 분위기가 사회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그런 어수선함을 억누를만한 좋은 당근, 즉 경제성장의 과실은 아직 수확되기 이전이었다.
그래서 그런 시국에 ‘좋은 전시가 있으니 해외에 나가 보고 오겠다’라는 것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몇몇 사람들이 해외-해외라고 해봤자 일본이지만-로 과감히 나가 볼만하고 특별한 전시를 보고 돌아왔다. 그러나 어딘가 뒷머리가 당겨지는 듯한 부담을 피할 수 없어 아예 가기 전에 이 장도를 공식 행사로 포장했다. 즉 신문사 취재 여행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973년 4월, 한국일보 문화부 주도의 ‘일본 속의 한화(韓畵)’이란 취재 여행이 시작됐다.
취재팀은 단촐했다. 프랑스 특파원을 지낸 뒤 본사로 돌아와 문화부장을 지내고 나중에 편집국장까지 역임한 김성우 당시 부국장과 서울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로 한국미술에 관한 저서(『한국회화소사』)가 있는 이동주 교수가 메인이었다. 이들이 애초에 겨냥한 목적지는 나라(奈良)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이었다. 이곳에서는 이해 4월부터 한 달간 ‘조선의 회화(朝鮮の繪畵)’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여행의 발단은 이 전시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이동주 교수가 사석에서 말을 꺼낸 것을 민완의 김성우 부국장이 놓치지 않고 기획으로 성사시킨 것이었다.
일본은 과거부터 다도의 영향도 있어 한국 도자기를 열광적으로 애호했다. 그 한편으로 한국의 다른 문화, 즉 회화나 서예 같은 데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한국 그림이 일본에 제법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일본에서도 전쟁 이후 한동안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이들을 거들떠볼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일본의 경제성장과 사회 안정은 이른바 한국전쟁을 계기로 군수 특수가 생기면서 시작돼 이후 19년 동안 매년 10%씩 경제가 성장하는 고도경제성장기를 맞이했다. 1973년 무렵이 되면 이 고도성장기가 일단락되는데 이 무렵 문화계에서도 전쟁 이전과 전쟁 도중의 빈곤과 궁핍에서 비로소 벗어나 주변을 돌아보게 됐고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조선의 회화’ 특별전이 열린 것이다.
전시를 기획한 야마코분카칸은 간사이, 고베, 나라, 미에현 일대에 민영 철도를 그물망처럼 깔고 영업하는 긴키(近畿)일본철도, 일명 테츠(近鐵)가 세운 미술관으로 이 회사는 문화사업을 통해 고객 수요를 스스로 창출한다는 색다른 경영방침 아래 미술관을 포함한 문화시설들을 독려해 철도 연변의 고객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문화 프로젝트를 매년 개최하고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기업미술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야마토분카칸의 일본미술 컬렉션은 일본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뛰어나며 그 위에 중국 특히 남송(南宋) 궁정 화가들이 그린 원체화 그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유명했다. 한국 것으로는 머리가 아홉 달린 용을 병모양으로 형상화한 청자병 등 도자기가 유명하지만 그림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때의 특별전은 자체 소장품 위에 일본 내의 유명 미술관, 박물관 그리고 개인 소장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전시한 것이다. 그런데 기획 과정에서 고려 시대의 불화가 확인돼 몇 점이 포함돼 부제를 ‘일본에 있는 고려, 이조의 작품’으로 했다.
이동주 교수는 이 전시에서 무엇보다 고려시대 그려진 불화에 대한 궁금증을 풀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는 1972년에 『한국회화소사』를 쓰면서 삼국시대도 그렇지만 고려 시대의 그림에 대한 자료가 없어 애를 먹었다. 그래서 탈고에 앞서 일부러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지온인(知恩院) 절에 간청해 온기가 전혀 없는 차가운 방에서 몇 시간 동안 떨면서 몇 점의 불화를 보았고 또 도쿄에서는 네즈(根津)미술관과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 등을 돌아보며 고려시대의 불화를 열심히 살펴봤다.(물론 이때 보았던 그림은 『한국회화소사』에 수록돼 있다.)
<아미타여래상> 1306년, 견본채색, 162.5x91.7cm, 네즈(根津)미술관 중요문화재
1871년에 일본에서 이동주 교수가 고려시대 불화를 직접 본 것은 아마도 한국의 미술전문가로서는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 국내에는 아직 고려시대의 불화라는 개념이 없었고 단어조차 쓰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가 남보다 앞서 고려시대에 그려진 불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분히 근대 최고의 감식가로 이름난 서화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 선생과의 교류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오세창 선생은 간송 전형필의 컬렉션을 자문해준 것으로 유명한데 한편으로 부친인 중국어역관 오경석이 모은 서화에서 자신이 서화가 인명사전(1928년 『근역서화징』으로 간행)을 펴내기 위해 모은 자료 등 다수의 고서화 자료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 속에 고려시대에 그려진 오백나한도도 몇 점이 들어있었고 이 교수가 이것을 직접 살펴보았던 듯 나중에 자신의 책에 수록했는데 아마 이때부터 그의 고려시대의 불화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1973년 한국일보의 취재로 이 교수가 일본에 갔을 때까지만 해도 국내에 알려져 있는 고려 시대에 그려진 불화로는 오세창 소장의 나한도 몇 점 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작은 칠기 나무판에 그려진 불화 한 점이 전부였다. 그 외에 억지로 고려 시대의 불화에 끼워줄 만한 것으로 장르가 조금 다른 영주 부석사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심하게 말해 요즘 고려불화하면 떠오르는, 고운 비단에 화려한 금박 문양이 정교한 필치로 구사된 그런 불화는 당시 국내에 단 한 점도 없었다.
이 취재를 통해 국내에 1306년에 그려진 네즈(根津)미술관의 <아미타여래상>(지금은 <아미타여래도>라고 부르지만 당시는 모두 ‘상(像)’이라고 했다)과 <여의륜관음상>, 스루가(敦賀)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의 <관경변상도>와 <관경변상서품>, 도쿄 센소지(淺草寺) 소장의 화승 혜허(慧虛) 그림인 <수월관음> 등 10여 점이 소개됐다. 이들은 모두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 것으로 그때 함께 연재된 일본 내의 단원, 겸재 그림보다 월등하게 큰 주목을 끌며 일반인들에게 ‘고려불화’라는 생소한 단어를 머리속 깊이 각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관경변상도> 견본채색, 202.8x129.8cm, 스루가(敦賀) 사이후쿠지(西福寺)
혜허慧虛 <수월관음> 견본채색, 144x62.6cm, 일본 센쇼지淺草寺
이 취재를 통해 국내에 1306년에 그려진 네즈(根津)미술관의 <아미타여래상>(지금은 <아미타여래도>라고 부르지만 당시는 모두 ‘상(像)’이라고 했다)과 <여의륜관음상>, 스루가(敦賀)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의 <관경변상도>와 <관경변상서품>, 도쿄 센소지(淺草寺) 소장의 화승 혜허(慧虛) 그림인 <수월관음> 등 10여 점이 소개됐다. 이들은 모두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 것으로 그때 함께 연재된 일본 내의 단원, 겸재 그림보다 월등하게 큰 주목을 끌며 일반인들에게 ‘고려불화’라는 생소한 단어를 머리속 깊이 각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 기획은 속된 말로 대박이 났는데 이는 한국일보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주최측인 야마토분카칸도 예상치 못한 반응에 엄청나게 놀랐을 정도였다. 당시 야마토분카칸의 이시자와 마사오(石澤正男 1903-1987) 관장은 ‘특별전 반향은 예상 이상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회화사를 전문으로 하는 여러 선생님들로부터 진정어린 감사의 말을 많이 전해 들었다. 그리고 해외 도항이 매우 제한된 한국에서도 저명한 전문가 몇 분이 건너오셔서 주최자로서 감격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나중에 말할 정도였다. 이시자와 관장이 ‘한국에서 온 저명한 전문가’라고 한 사람이 이동주 교수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감지금자 대보적경』 권32 (내지) <은니공양보살상> 1006년, 29.2x841.0cm, 문화재청 중요문화재
그래서 야마토분카칸은 내친김에 2탄 성격의 특별전 ‘고려불화’전을 1978년 10월에 개최했다. 당시 일본에 알려진 고려 시대의 불화는 약 70점 정도로 추산됐는데 면밀한 사전준비를 거쳐 이들 가운데 무려 53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 이는 전체의 3/4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며 그 외에도 고려 시대의 그림 자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화려한 변상도(變相圖)-경전을 사경(寫經)하면서 맨 앞쪽에 상징적인 내용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린 것-를 11세기 것부터 시작해 17점을 함께 소개했다.
야마토분카칸의 이 ‘고려불화’ 특별전은 말할 나위도 없이 73년의 ‘조선의 회화’ 특별전의 몇 배 이상으로 일본 국내외에 화제가 됐다. 그래서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 시대에 그려진 불화’로 적당히 얼버무려 불렀던 그림들에 ‘고려불화’라는 고유명사가 새로 붙여졌다. 일본에서도 고려불화는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그림 속에 보이는 한 파트에 불과했다. 연구의 역사도 얼마되지 않아 일제때에는 이런 이색적인 그림이 있는 정도로 소개되다가 1967년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 1900-1967)가 『조선불화징(朝鮮佛畫徵)』을 쓰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동경제대에서 미술사학은 전공한 그는 1935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당시 오타니(大谷)컬렉션의 중앙아시아유물을 보고서 서역미술을 전공하기도 했던 이색적인 미술사학자이다)
그가 논문을 쓸 무렵만 해도 일본조차 ‘고려불화’라는 말이 없었고 또 일부 그림에 대해서는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 중국 원나라 그림으로 간주됐다. 야마토분카칸 전시에 나온 아타미(熱海) MOA미술관의 <아미타삼존상>, 교토 교쿠린인(玉林院) 소장의 <여래좌상> 등은 물론 심지어 수월관음도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다는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의 <수월관음상> 역시 한때 중국 불화라고 여지기도 했다.
<양류관음상> 견본채색, 227.9x125.8cm, 교토(京都) 다이도쿠지(大德寺) 중요문화재
이 전시에는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소장의 오백나한도 한 점도 출품됐는데 이는 전시기획 때까지는 일본에 있다가 그후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이 <나한도>의 출품을 계기로 미국 박물관, 미술관과 학계에서도 한국미술 속의 ‘고려불화’가 새롭게 소개되는 기회가 됐다.
<오백나한도> 견본채색, 52.7x40.8cm,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전시 중에 열린 여러 차례의 강연 중에는 1973년 전시관람의 인연으로 이동주 선생도 초청돼 한 차례 강연을 했는데 그 내용은 출품작의 하나인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의 <주야신도(主夜神圖)>에 대해 그림 속의 관지와 제작방식 등을 고증해 이 불화가 고려시대 제작이 아니라 조선으로 넘어와 15세기에 그려진 불화임을 밝혔다. 이로서 고려불화 한 점 없는 한국이지만 고려불화에 대해서 당시 일본과 미국 관계자들에게 한 수를 베푼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주야신상(관음상)> 견본채색, 170.9x90.9cm, 스루가 사이후쿠지 중요문화재
이 전시에는 그가 1973년 전시와 그 전후의 일본 방문을 통해 보았던 고려불화 가운데 ‘아름답도다 고려불화여’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던 후쿠오카 젠도지(善導寺) 소장의 <지장보살상>, 도쿄 세카이도(靜嘉堂) 소장의 <지장시왕상>이 함께 출품됐다. 그 외에도 그가 거론한 도쿄 아사쿠사(淺草)에 있는 센소지(淺草寺) 소장의 <양류관음>는 아쉽게도 이때는 출품되지 않았고 나중에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개최한 ‘고려불화전’때 처음으로 공식 전시에 출품됐다.
<지장보살상> 견본채색, 111.0x43.5cm, 후쿠오카(福岡) 젠도지(善導寺)
어쨌거나 이 전시를 계기로 일본에서도 고려불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해 1981년에 야마토분카칸에서 이 특별전을 꾸민 요시다 히로시(吉田宏志) 미술과장(그는 이후 연수 기회를 통해 서울대학교에 적을 두고 한국회화를 공부하기도 했다)과 당시 일본 내에서 고려불화연구의 제1인자로 손꼽힌 규슈대학의 기쿠다케 준이치(菊竹淳一) 교수가 공동으로, 고려불화에 관한 첫 대형화집인 『고려불화』(아사히신문사 간행)를 펴냈고 또 그해 한국에서도 중앙일보사에서『한국의 미』 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으로 『고려불화』가 이동주 감수로 간행됐다.(1978년 야마토분카칸의 특별전 도록은 1600부 한정판으로 제작했으며 컬러사진은 네즈미술관의 <아미타여래상> 하나만을 수록하고 전부 흑백사진을 썼다.)
물론 이후 국내에서도 고려불화 전공자가 나타나 얼마 전 동국대학교에서 정년 퇴임한 정우택 교수가 규슈대학에 유학가 기쿠타케 교수 아래서 한국인 첫 번째의 고려불화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소더비 옥션에도 고려불화가 출품돼 100만 달러를 넘게 팔리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다시 한번 끌었고 이후 국내에서도 소장가들이 고려불화를 컬렉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마토분카칸의 특별전이 열린 지 15년이 지난 1993년에는 호암미술관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공동주최로 국내 첫번째 고려불화 전시인 ‘고려 영원한 미-고려불화’전이 열려 국내의 애호가, 관람객들을 환호케했다.
야마토분카칸 전시를 통해 세계미술사학계에 새롭게 등단한 고려불화는 그후 정우택 교수 등의 연구에 힘입어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 170여점 정도가 존재하는 것이 확인됐다.(y)